September 1, 2024

“가이사에게 상소하노라” (I Appeal to Caesar)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5:11~12
Service Type:

“가이사에게 상소하노라”

(I Appeal to Caesar)

9-1-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5:11-12

11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12 그 때에 베스도가 배심원들과 협의하고 “그대가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로 갈 것이오”하고 말하였다

[설교 요약]

          오늘 사도 바울은 새로운 유대총독 <베스도> 앞에서 유대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v.11)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바울의 결정은 무슨 이유에 근거한 것일까요? 그리고 사도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아야 할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사도행전 24장>에서 베스도의 전임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바울의 재판을 지연시켰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2년간 별 이유도 없이 이렇게 재판을 미루다가 결국 떠납니다.

이제 바울은 2년만에 재개된 재판에서 새로운 총독 앞에서 자신의 케이스가 무죄임을 주장함과 동시에 이 법적 소송을 로마 황제에게 의뢰하여 줄 것을 상소합니다. 그리고 총독은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로마황제에게 자신의 재판을 상소했을까요?그 이유는

첫째, “신변적인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에서 ‘40명’의 암살대원이 결성되어 바울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몄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행.23:12-15). 그리고 2년이 지났지만, 이런 악한 음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행.25:2-3). 설령 베스도가 그를 석방한다고 할찌라도, 이런 살해위협은 더해 갈 것이기에 그는 로마황제에게 소송한 것입니다.

둘째, “선교의 전략적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뛰어난 선교사역의 전략가였기에 자신의 ‘로마시민권’을 통해 ‘로마황제’에게 직접 상소함으로 그는 광범위한 <복음전파>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재판을 활용하여 세계의 중심인 ‘로마제국’과 ‘황제’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를 삼고자 한 것입니다.

셋째, “주께서 로마의 비젼”을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이 2년전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가기 전날 밤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이런 주님의 위로하심과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리라’는 약속은 분명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소송한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이, 그리고 수많은 복음의 증인들과 같이 주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삶을 결정하고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는 복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최선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학생때는 어떤 전공을 정하고 어느 학교에 갈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떤 직장에 갈 것인지, 그리고 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친구를 사귀고, 이성과의 사귐에 있어서는 평생을 함께 할 어떤 배후자를 택할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뿐 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 자체가 그야말로 크고 작은 수많은 결정의 연속인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일어나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하루를 마감하며 누워 잠을 자는 순간까지 단 하루 동안도 우리 각자는 수많은 결정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일인지라 행하고는 기억조차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가량 구금되어 있으면서 참으로 지리하게 <재판지연>상황을 견디는 가운데,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침 유다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베스도>와 유대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의 재판을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결정은 무슨 이유에 근거한 것일까요? 그리고 사도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아야 할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제가 조금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사도 바울은 지난 <사도행전 24장>의 설교를 통해 살펴 본 것처럼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첫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유대지도자의 주장을 대변한 변사 더둘로의 거짓된 고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왜 그의 주장이 잘못된 것인지?’를 자세하고도 설득력 있게 피력했던 것입니다. 그로서 <24장>의 기록을 보면, 총독 벨릭스는 이들 양측 주장을 듣고나서, 사실상 ‘사도 바울의 무죄’를 충분히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그 어떤 로마당국에 대한 정치선동이나 유대군중을 소요시킨 혐의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유대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잘 아는 그가 볼 때도 사도는 유대 율법을 어기거나 성전을 더럽힌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그가 바울의 무죄를 선언하지 않고, 은근슬쩍 재판을 무기연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2절>인데,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리하리라” (행.24:22)고 말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부장 루시아’을 기다린다는 구실로 바울의 재판을 무기연기하는 것입니다.

왜 벨릭스는 이런 바울의 재판에 대한 이런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지도자들을 의식한 지극히 정치적인 약삭빠른 처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법적 케이스’는 로마통치자들에게는 마치 ‘뜨거운 감자’와 같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고, 자칫 유대지도자들을 자극하고 반발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소송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소송케이스는 법대로 (양심대로) 한다면 당연히 ‘무죄’가 선고됨으로 속히 끝나야 하는데, 그렇게 했을 때 유대지도자들의 반발과 이것이 어떤 정치적 소요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정치적인 우려를 했기에 벨릭스는 ‘천부장’을 핑계로 재판을 질질 끌다가 결국 자신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 끝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벨릭스가 바울이 무죄였다고 판단했던 또 하나의 근거가 있는데 그것은 <23절>말씀입니다.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행.24:23)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만약 벨릭스가 바울에게서 죄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는 결코 바울에게 자유를 주고, 친구들이 와서 그와 교제하고 필요한 것들을 가져 주는 등의 ‘특별대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법을 어긴 혐의가 있는 자에게는 로마당국은 결코 이와 같은 자유와 특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건, 총독 벨릭스는 이렇게 2년을 재판 연기하다가 무책임하게 떠났고, 그의 후임으로 ‘보르기오 베스도’가 신임 유대총독으로 오게 됩니다. 이렇게 베스도가 새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25장>은 시작됩니다. “베스도가 도임한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 쌔” (행.25:1-2)라고. 유대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자신에 관할지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신속하게 가서 유대지도자들과 말하자면 ‘상견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대제사장과 유대 고위관직자들은 새 총독을 보자마자, 집요하게 ‘바울의 소송문제’를 꺼집어 냅니다. 그들은 점잖고 예의바른 척하면서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재판을 받게’ 하는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v.3a). 이들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에 자객들이 매복해 있다가 그를 암살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입니다 (v.3b). 그러나 베스도는 그들의 계략을 눈치 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다만 그들 중 유력자 (책임자)들이 자신과 함께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바울이 무슨 잘못이 있다면, 그곳에서 그를 고소하라’고 제안합니다 (v.4-5).

그리고 나서, 8일 혹은 10일 후에 베스도가 가이사랴로 내려 갔고, 그 다음날에 그의 제안대로 예루살렘의 여러명의 유력자들이 따라 내려가서 베스도가 집도하는 가운데 만 2년만에 <바울의 재판>을 다시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이 불려 나왔을 때 유대지도자들은 바울을 둘러 싸고 여러가지 중대한 혐의로 그를 고소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입증할만한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잘못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v.6-7). 이런 가운데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갖고, 이렇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v.8)라고. 이때 베스도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유대인들이 듣기 원하는 한가지 제안을 바울에게 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v.9)라고.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v.10)라고 분명히 대답합니다.

자신은 자기 동족 유대인에게 어떤 불의를 행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골자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약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죽을 만한 범죄를 행했다면, 결코 죽는 것도 피하지 않겠지만, 나를 고발한 자들의 고발내용이 전혀 ‘사실무근’ 이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v.11)라고 그는 분명히 로마황제에게 자신의 재판을 의뢰할 것을 천명했고, 베스도는 “그대가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로 갈 것이오” (v.12)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왜 바울은 로마황제에게 자신의 재판을 상소했는가?하는 이유를 좀더 깊이 살펴봄으로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함께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이유는 첫째, “신변적인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사도행전 21장>에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 흥분한 유대군중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후에 가이사랴의 감옥에서 2년동안의 감금생활을 하는 동안 유대인 지도자들의 사도를 해하고자 하는 위협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2년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그를 극도로 미워한 극단적 율법주의자로 결성된 40명의 암살단이 조직되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 (행.23:14)하면서 그를 죽이고자 했었는데, 시간이 지났다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새로 총독이 된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첫 인사차 방문한 자리에서조차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바울을 다시 고소’ (행.25:2)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재판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v.3) 2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지도자들은 조금의 틈만 나면, 바울을 죽이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도 바울도 잘 알고 있었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동안 바울의 조카 혹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이런 유대지도자들의 음모를 그는 충분히 간파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베스도가 집도하는 이번 재판에서 바울은 자신이 무죄가 선고되어 풀려 난다고 해서 신변적으로 안전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잘 알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다면, 이들 극렬한 유대인들은 호시탐탐한 기회를 노리고, 오히려 그가 로마 감옥에 있을 때보다 더 손쉽게 자신을 공격하고 죽일 수 있음을 그는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지금 상황에서는 무작정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와 같이 로마군의 강력한 보호 아래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는 것이 그의 목숨을 지키고, 가장 신변적인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바울은 충분히 이해했기에 가이사에게 상소했을 것입니다.

둘째, “선교의 전략적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사를 공부해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과 주의 사도들이 첫 복음사역을 시작한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는 로마제국이 ‘팍스 로마나’ (Pax Romana)라고 불려지는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2세기경의 시기’가 시작되는 바로 직전 단계였는데, 탁월한 학식 뿐만 아니라 뛰어난 선교 전략가였던 사도 바울은 이런 로마제국의 힘과 평화를 최대한 복음전파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당한 방법이라면 이와 같은 ‘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와 영향력과 평화를 선교사역에 활용하기를 결코 꺼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울이 ‘로마시민’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사도행전 22장>에서 사도 바울을 유대군중들에 의해서 죽게 될 위험에서 건져낸 로마군대 천부장이었던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느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행.22:28) 라는 그들이 대화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 당시 로마 영토였던 다소에서 출생했는데, 그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다’는 사실은 그의 부친이 이미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유력한 유대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사도는 이 로마시민권을 필요에 따라서 ‘소극적’으로는 ‘자신이 억울하게, 그리고 불법적으로 신체적 위험이나 살해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적극적’으로는 ‘복음의 진보’를 위해 그의 로마시민권을 지혜롭게 사용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행. 25:8)라고. 그는 이렇게 직접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복음’이 율법이나 성전에 어긋나지 않고, 로마정부와 황제에게도 해를 끼치는 이단사상이 아님을, 아니 이스라엘과 로마제국과 온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 참된 진리의 종교임을 확인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전에 사도가 <18장>에서 ‘고린도’전도사역을 행했을 때,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아가야 총독으로 있던 ‘갈리오’가 관할하는 법정으로 데려갔었는데, 그때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과 사도 바울의 문제는 로마당국에 대한 불법집회나 소요사태가 아닌, 유대인 자체의 율법과 명칭과 언어에 관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바울을 무죄로 판결하고 석방했던 것입니다 (행. 18:12-17).

아마도 바울은 그때의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판례를 근거로, 유대인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 (압력)을 받을 수도 있는 유대총독의 재판을 받는 것보다는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신학의 대가로 평가받는 미국 풀러 신학대학의 ‘김세윤’ 교수는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가이사에게 직접 상소함을 통해서 로마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꿈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치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유대지역 분봉왕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이 복음을 제시하며 “(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행.26:29)라고 선언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처럼 다양한 선교전략적 이유로 가아사에게 상소를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셋째, “주께서 로마의 비젼”을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왜 사도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소송했는지?’는 우리는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습니다. 더 이상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우리에게 ‘사도가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 상소했던 동기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구절을 이미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것은 <사도행전 23장 11절>이라고 믿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 암살단원 사십명의 맹세로 인해 가이사랴로 긴급히 470명의 로마군사들에 의해 호송되기 바로 전날 밤,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힘을 주시고, 비젼을 새롭게 하신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로마군대에 의해 호송되는 그의 택한 제자에게,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그 재판결과가 어찌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 가까이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고 힘주시고 ‘반드시 로마에 가서 주님의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임을 신실하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을 함께 살펴보면서, 주님은 사도가 <2차선교여행>을 시작할 당시 그가 가고자 하는 소아시아로 향한 길을 막으시고 반대로 유럽으로 향하는 ‘마게도냐’로 선교방향을 바꾸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행.16장). 왜냐하면 잠언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는 것입니다. 그토록 주님의 충성된 사도요 성령충만한 바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도 인간이기에 주님의 그 넘치는 지혜와 완벽한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선교일정을 모두 깨닫을 수 없었고, 온전히 결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시도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의 손길이 없었다면 결코 바울이 바울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라는 사도의 고백은 결코 그가 겸손해서 과장되게 한말이 아니라, 정확한 자기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도가 유대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한다는 것은 사실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가이사’는 어떤 특정 로마황제의 이름이 아니라, ‘로마황제’의 ‘대명사’ (pronoun)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황제는 그 악명높은 ‘네로’황제였습니다. 바울이 그에 대해 정보가 전혀 없어서 황제에게 소송하고자 결심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우려상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최종적으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고자 굳게 마음먹은 근거는 바로 주님께서 그에게 힘과 소망을 주시고,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거하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어떤 위험과 장애물이 그 앞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그것은 마치 사나운 늑대 가운데 연약하 양을 보냄과 같은 위험하고도 쉽지 않은 일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이 세상에서 주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행하는 그런 삶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양을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은 위험하고 어려운 삶이 어쩌면 우리 크리스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제자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이기는 지혜는 결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지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 지헤는 바로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지혜요,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변치 않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죄와 세상과 악한 영을 대적하여 복음을 들고 싸워 이긴 수 없이 많은 주의 충성된 증인들이 날마다 공급받은 지혜인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약속 “볼찌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날마다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는 약속을 신뢰함으로 공급받은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앞서간 사도 바울과 주의 충성되 성도들과 같이 주의 영, 성령의 은혜로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함’으로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