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All Become What I Am)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All Become What I Am)
9-8-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6:28~29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작은 말로 나를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Then Agrippa said to Paul, “Do you think that in such a short time you can persuade me to be a Christian?”)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Paul replied, “Phort time or long – I pray to God that not only you but all who are listening to me today may become what I am, except for these chains.”)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종반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도행전>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사도 바울의 충성과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이해해 나가는 시간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사도행전 26장>은 유대 분봉왕인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이 변론을 행함으로 시작됩니다 (행. 26:1-3). 바울은 사도행전에서는 마지막에 해당하는 또 한번의 자기변론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합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변론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자신의 신앙이 정통신앙 임>을 주장합니다:
- 먼저 자신은 신실한 유대인으로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음 (v.4-5)
- 청년시절, 나사렛 예수를 대적하고 그를 믿는 자를 박해하고자 온 힘을 다 했음 (v.9-12)
- 그런데,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기 때문임 (v.6)
- 이 약속은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인데, ‘메시야가 오셔서 마지막날, 의인과 악인을 다시 살리셔서 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유대 정통신앙’을 자신이 믿는다는 것 (v.7-8)
- 그러나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만남으로 자신의 어두운 눈이 밝아지고,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메시야심을 깨닫게 됨 (v.13-15)
둘째)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주님은 바울을 구원하여 제자 삼으심으로
-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선지자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선전하라고 (v.23)
-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을 얻게 하라고 (v.16-18)
그럼으로 사도는 온 힘을 다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으로 아그립바왕과 모든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바울처럼 복음을 자랑하며 자신에 대해 당당한 주의 증인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종반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도행전 말씀의 마지막 종반부는 사도 바울의 ‘재판과정’을 다룬 내용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재판받는 과정과 또 로마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도행전>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우리 크리스챤이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이해하고 적용할 점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충성과 그를 이끄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오늘 함께 이해해 나가는 시간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사도행전 26장>은 사도 바울이 유대 분봉왕인 ‘아그립바’와 유대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행. 26:1)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런 변론하는 기회가 주어졌느냐고 했을 때, 이것은 누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 <25장>에서 말씀드렸듯이 새로 유대총독으로 베스도가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유대 본봉왕이었던 ‘아그립바’가 ‘버니게’와 함께 인사차 그를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그립바가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여러날 방문해 있는 동안 베스도를 통해 바울의 소송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고, 아그립바가 관심을 보임으로 바울의 변론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그립바는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소문과 유대인 지도자들과의 갈등에 대해 이미 들었을 것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바울을 만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건 <25장> 끝에서 보면, 베스도는 이튿날 바울을 데려오게 해서 왕 앞에 세우고 “나는 살피건대 (그에게서)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행.25:25-26)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어지는 <26장>에서 바울의 자기변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자기 변론’ (=신앙고백)은 오늘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가 <행.9장>을 통하여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회심의 사건이 처음 기록된 이후에 바울은 기회가 있을 적 마다 이런 자신이 회심사건을 직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고자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26장>에서는 앞에서 바울이 이미 언급한 내용도 있고, 언급하지 않은 내용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도 바울 자신의 <회심사건>을 통해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저는 큰 그림에서 보았을 때 크게 두가지로 그가 변론함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의 신앙이 정통신앙임>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자신과 기독교인들을 고소하는 것처럼 나사렛 예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신앙은 ‘이단신앙’이 아니라, 모든 구약의 말씀을 따른 올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그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사도 바울 자신의 신앙이 정통신앙임>을 밝히고자 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본문이 <4~16절>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성장배경’을 언급합니다. 자신이 젊은 시절 예루살렘에서 생활하였고, 유대종파 중에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의 교훈을 좇아 생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많은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v.4-5). 그리고 나서, 그는 곧 바로 문제의 핵심으로 접근하는데, 그것은 ‘왜 자신이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게 되었는가?’하는 원인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v.6)라고. 바울은 지금 자신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동족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이단이라 취급받고, 그로 말미암아 수없이 많은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겪는 핵심적인 이유가 놀랍게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자신이 믿고 바란다>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대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신실한 성도들을 지금 무고하게 정죄하고 핍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v.7-8)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점을 바울은 <24장>에서 벨릭스 총독에게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24:15)라고.
여기서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 곧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인 것입니다. 또한 메시야가 오심으로 의인과 악인의 부활 가운데 행하실 의로운 심판을 기다리며 소망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다윗과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했듯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어 기름 부으심으로 세우신 메시야는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할 구원자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의로운 뜻을 따라 마지막날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부활’ 곧 ‘부활의 소망’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모든 인류의 구원자 되신 ‘메시야’와 ‘부활’ (부활의 소망)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바울은 간증할 적마다 이 ‘부활의 소망’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6)고 말입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는 ‘메시야, 그리스도’시요,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성도가 의롭게 다시 살아날 소망을 성취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9~18절>에서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주제는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는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한단계, 한단계 좁혀가며 설명합니다. 우선 그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 그들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행. 26:9~12)라고. 그리고 그 날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결박하여 잡아가고자 중동지역 정오의 뜨거운 열사의 햇빛을 맞으며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햇빛보다도 더 밝은 광채가 그와 함께 동행했던 자들 모두위에 비취게 되었고, 그 광채로 인해 거기 있던 모든 자들이 다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히브리말로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v.14)라고. 이에 대해 “주여 뉘시니이까” (v.15a)라고 그가 물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v.15b)고 주님은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그 밝은 주님의 광채로 인해 눈이 멀게 되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내의 한 집에 들어갔고, 삼일 후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가서 그를 안수하게 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한 가운데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마도 간절히 기도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가 경험한 이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하나님께 온전히 깨닫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행. 9장). 이와 같은 바울의 간증에서 그가 힘주어 강조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유대교의 이단종파의 교주쯤으로 알고 심히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만난 나사렛 예수는 왜 그리스도요 메시야이신가?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그분의 신적 현현, 곧 찬란하게 광채가운데 임했던 주님을 만난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지금 바울은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것입니다 (행.23:1). 청년시절 사울 때부터 백발이 성성한 지금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언제나 신앙 양심에 위배되지 않고자 노력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삶에서의 차이점은 과거의 자신은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 (롬. 10:1~3)에 기초한 믿음이었다면, 현재의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음으로 그 뜻에 순종한 온전한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기’ 때문이요,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여전히 청년때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소망하였고, 모세와 다윗과 이사야와 여러 선지자들이 오시리라 예언했던 구원자,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청년시절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바뀐 것은 유대인들이 거부하는 예수님을 이제 자신은 부활의 메시야로 깨닫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메시야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한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v.22).
따라서 바울이 믿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오시리라 예언한 메시야는 이미 오셨고 (사도행전 26장, 당시는 AD 60년경), 예언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v.23). 그럼으로 자신은 유대인의 정통신앙을 믿고 있다가 잘못된 이단사상에 빠져 변절한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조상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구원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그분의 은혜로 영적 눈이 열림으로 깨닫게 되었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됨으로 참되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믿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정통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이제 결론적으로 주께서 자신을 제자 삼으심으로 사명을 주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로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부활의 주께서 어둠의 권세에 있던 자신을 빛으로 인도하심으로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증인된 사도로 세워주셨음을 밝히며 자신이 주께 받은 사명 (명령)이 무엇인지를 그의 증언을 마무리해 가면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v.16-18)고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를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시고,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의 약속한 그리스도, 메시야심을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바울에게 역사하셔서 그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시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 가운데로 돌아오게 한 사건과 동일한 역사를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곧 주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곧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살림으로 주의 제자된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아그립바’왕 앞에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v.29)고 바울이 당당하고도 확신 가운데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과 그 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당 한다는 것까지도 결코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만이 죽은 자를 살리고, 어두운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온 힘을 다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고 확신에 가득차서 아그립바왕과 베스도총독 그리고 모든 높고 낮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그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자기 사랑’은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지 않음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의 비교는 언제나 양날에 선 칼처럼 ‘열등감’ 아니면 ‘우월감’이라는 독소를 끝임 없이 내뿜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나를 발견할 때, 나는 더 이상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우쭐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구원의 사랑 안에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참된 평화를 누리고, 주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바울과 같이 여러분과 저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