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어찌하여” (Why My Soul?)
“내 영혼아 어찌하여”
(Why My Soul?)
10-13-24
본문말씀: 시편 (Psalms) 42:5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Why, my soul, are you downcast?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아마 우리 성도 여러분 중에는 자신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뭔가 아쉬워하고 불만해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또한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42편>의 주제를 “고난의 밤에 부르는 성도의 노래”라고 하는데, 시인은 자기 자신을 향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v. 5a)라고 말을 걸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v. 5b)고 도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성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곧 ‘자기 사랑’에 대해 묵상하기 원합니다. 먼저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4-40).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9)는 말씀 속에 진정한 이웃사랑은 ‘내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자기사랑일까요?” 그것은
첫째,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 16:26)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성경은 참된 사랑은 이 땅에서 잠시 부귀와 쾌락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요. 3:16).
둘째,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5)라고 사랑을 정의합니다. 이런 이웃을 향한 사랑은 앞서도 살펴봤듯이, 먼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서 실천되는 것입니다.
셋째, “내 자아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v. 5a)라는 말씀과 같이, ‘자아 (self)의 모든 부정적인 말을 듣기 전에, 자아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라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다스려 나가는 것이 ‘영적 침체’를 벗어남으로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실천방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죄를 미워하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자아를 다스려 나감으로 진정한 자기사랑을 실천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아마 우리 성도 여러분 중에는 자신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뭔가 아쉬워하고 불만해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수 있었고, 그들 중에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엔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좀 지나쳐서 소위 ‘공주병’ 혹은 ‘왕자병’으로 불리는 ‘자기도취’형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금 소개했던 한 자매처럼 자신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의외로 많이 만날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또한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열등감에 사로잡혀 평가절하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우월감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진정한 자기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이 땅을 살아가면서 완벽한 인격으로서의 자기사랑을 실천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 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인격을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우리 자신에 대한 진정한 자기 사랑을 날마다 더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지난 주의 <시편 1편>말씀에 이어 오늘 <시편 42편>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총 150편에 이르는 시편말씀은 크게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오늘 말씀은 제 2권의 첫 시편말씀으로서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스길’이라는 단어는 <교훈의 시>라는 뜻으로써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으로 예배드리고, 성도를 교훈했던 시가 ‘마스길’인데, 성도들이 ‘고라 자손’의 인도를 따라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42편의 오늘 본문 <5절>말씀이 끝절 <11절>과 이어지는 <43편>의 끝절 <5절>에서도 후렴처럼 반복되는 것으로 볼 때, 신학자들은 이 두편의 시가 원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42편>의 주제를 “고난의 밤에 부르는 성도의 노래”라고 말하는 성경학자도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 이유는 다를찌라도 밤과 같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갈망하며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시인의 고통과 간구를 ‘영혼의 어두운 밤에 부르는 노래’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시편 42편>을 평소에 묵상하시는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이 시편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42:1)라고 시작하는데, 이 <1절>은 매우 시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깊은 영적 목마름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간구와 탄식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왜 시인이 이렇게 간구하는 지에 대해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이 탄식과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유는 그에게 고난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v.3)라고 그를 조롱했고, 또한 이전에 성일 (=유대명절)을 지키며 신실한 성도들과 함께 기쁨의 찬송을 마음껏 부르며 ‘하나님의 집’ 곧 ‘성전’에 예배하러 갔던 때를 기억하고 그의 마음이 매우 낙심되고 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이유로 해서 더 이상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 드리지 못하게 되었거나, 혹은 몸은 성전에 가 있을지라도 어떤 <죄의 문제>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겪음으로 해서 더 이상 기쁨과 감사의 진정한 영적 제사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고통 가운데 자기자신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v. 5) 라고. 문제는 ‘어떤 외부의 환경’보다도 ‘시인 자신의 영적 상채’가 매우 우려스럽고, 절망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성도의 ‘영적 침체’ 그 자체라기 보다는, 우리 각자에 대한 인식이요,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사랑>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만족하십니까?”라고. 그리고 제가 대학생시절, 한 자매가 자신을 매우 낮게 평가했던 것에 대해 제가 느꼈던 의야함과 궁금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먼저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에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물론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길 기뻐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그 분명한 예로서,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무엇이 성경말씀의 가장 중요한 명령이신지?’를 묻었을 때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는 <신명기 6장> 말씀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레위기 19장>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내용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2번째로 말씀하신 ‘레위기 19장’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말씀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출발점은 ‘먼저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또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하는 기준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성도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자기 사랑’에 따르는 많은 한계를 봅니다. ‘자기 사랑’은 우리 자신의 미성숙한 인격으로 인해 자칫 ‘자기 자랑/자기 착각/자기 연민’과 같은 비뚫어진 자기 사랑이라는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경우를 우리는 수 없이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극복하고, 고쳐 나가야 할 잘못된 ‘자기사랑’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성도 여러분과 “과연 무엇이 진정한 자기사랑인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6)라고 무엇이 지혜로운 인생인지를 매우 핵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역설적으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4)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축복된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말씀을 통해 우리는 ‘악인의 삶’을 결코 복된 삶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악인의 삶은 지금 당장은 잔꾀를 부려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권력을 손에 쥐고, 부귀영화와 쾌락을 누리며 교만한 삶을 살지만, 결국 그 삶의 종말은 망하는 삶이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속히 사라지는 삶임을 우리는 알기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날마다 묵상하는 삶을 사는 인생은 진실로 축복된 인생이요,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악인은 바람의 나는 겨와 같이 사라져버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악인이 서 있는 곳은 미끄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 73:18). 사실 누구도 어느 순간 이들이 넘어질지 알 수 없기에, 성경은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10)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1년이, 10년이 혹은 100년이 커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흘러가는 시간은 ‘천년’도 ‘하루’와 같은 것 (벧후. 3:8)이기에, 진정 ‘잠시 후면 악인이 없어진다’는 성경말씀은 진실함을 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야, 끝이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들은 사도 바울이 묘사한 것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고전. 15:32)고 소리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 가겠지만, ‘죽음이 전부가 아니요, 그 이후에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의인이 누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삶이 ‘진정한 자기 사랑’의 출발임을 믿습니다.
둘째,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무엇이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고전. 13:4~5)라고. 저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의’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앞서 ‘레위기서 19장’에서 살펴본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명하심과 같이 이웃을 향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않는’ 이 모든 사랑의 조건은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자기사랑’을 한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 ‘이기적이거나, 충동적이고 또는 자기 중심적인 부모가 그의 자식에게 행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부모의 과욕과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자녀사랑은 도리어 자녀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며 서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지혜로운 부모는 진리와 양심을 따라 ‘자식의 어긋나고 비뚤어진 행동을 엘리제사장처럼 못본척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눈물을 삼키더라도 따끔하게 자식을 징계할 수 있고, 때로는 자녀의 연약함에 대해선 내 마음에 들지 안터라도 품어주고 관용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 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나 자신에게도 ‘이기적이고 죄악된 사랑’이 아닌 ‘오래참고 온유하고 지혜로운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실수와 연약함에 대해선 혹독한 그런 뒤바뀐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 진리는 ‘내가 먼저 나를 참되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남도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셋째, “내 자아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시인이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음을 보았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v. 5) 그런데 로이드 죤스 목사는 오늘 본문에서 시인의 상태를 근거로 <영적 침체> (Spiritual Depression)라는 제목의 시리즈설교를 행한 바 있습니다. 이 메시지에서 그는 한가지 우리 인간의 심리상태에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한마디로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영적 침체’의 중요한 원인은 ‘자아’ (self)에게 말하는 대신 오히려 자아의 말을 듣는데 있다’라고 날까롭게 지적한바 있습니다.
이 말은 ‘자아’ (self)의 말을 듣기 이전에 먼저 자아에게 말하고 설득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하고 올바른 영적 컨디션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영적 원리임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각자가 아침에 눈을 뜰 때 하루의 첫 시간을 무방비상태로 자아가 나에게 떠드는 (속삭이는) ‘불평과 불안,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수동적으로 듣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아를 향해 먼저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고” (v. 5a)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v. 5b)라고 자신을 향해 선포하고 깨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자신을 상담하는 이런 구체적이고 선제적인 태도는 자기사랑의 강력한 실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분의 자녀들은 더 깊은 영적 침체라는 수렁에 빠지지 않고, 다시 믿음으로 굳건히 서기 위해서 ‘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 이 위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전직의사이자 목회자인 로이드 죤스 목사는 지혜로운 영적 조언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조금만 마음이 허트러지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아’가 쏟아내는 모든 부정적이고 정죄하는 말에 온통 마음이 빼앗기고 낙심되고 실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육신적인 자아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게 내버려 두지 말고, 오히려 자아를 향해 선포합시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 하느냐!?”라고.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실제적으로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길임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예배 나오면서 ‘기쁨과 만족’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 오셨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마음과 상처받은 심령으로 힘들게 아버지께 나아오셨습니까?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그 사랑하심’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는 복된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고,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되 자신의 연약과 실수에 대해서는 용납하고 관대함으로써, 그리고 ‘자아’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살아가는 이런 자기 자신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