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0, 2024

“너는 내 것이라” (You Are Mine)

Preacher:
Passage: 이사야 (Isaiah) 43:1
Service Type:

“너는 내것이라’

(You Are Mine)

11-10-24

이사야 (Isaiah) 43:1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But now, this is what the Lord says – He who created you, Jacob, He who formed you, Israel: “Do not fear, for I have redeemed you; I have summoned you by name; you are mine)

[설교 요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면, 여러분은 이 자녀의 특권과 은혜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이런 영적 축복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묵상하길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장 <42장>에서 하나님은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보라” (사.42:18)라고 이스라엘민족을 질타하십니다. 영적으로 귀먹고 눈먼 죄악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어지는 <43장>의 첫 말씀인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 대신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v.1)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이토록 돌보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그분의 만드신 바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v.1a)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손으로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마음으로 낳으셨기에 그들을 지극히 돌보시는 것입니다.

둘째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1절>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v.1b)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구속하다’ (redeem)는 의미는 <값을 지불하고 사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 곧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생명 값을 치루셔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셋째,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v.1c)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부르신 말씀이 바로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6-27)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뿐 아니라, 그 아들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셔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그 선하신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철든 자녀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요즘 집사람과 저는 사람들의 ‘상처와 치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련자료와 영상물을 보곤 합니다. 이와 같은 ‘내적 상처’에 관련해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의 하나가 ‘어릴적 겪게 된 부정적 경험’인데, 이런 어릴적 경험은 커서도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그 사람 내면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그 사람을 고통과 아픔의 뿌리가 되는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치유를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은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은 ‘이런 영적 축복의 은혜를 현재 나 자신이 진정으로 깨닫고 누려 나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과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된 아들과 딸이 되었다면 이런 영적 신분의 변화가 나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를 우리 각자가 돌아보고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누려 나가는 시간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이사야서> 전체를 개괄적으로 (큰 그림에서) 살펴보면, 이사야서는 총6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주제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이사야’의 뜻: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인데, 이 책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는 ‘1~39장’으로서 <죄악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고, ‘후반부’는 이어지는 ‘40~66장’으로서 <하나님의 회복과 위로>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사야 43장의 오늘 본문말씀은 이사야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후반부의 도입에 해당하며, “메시야로 인한 회복”이라는 소주제를 가진 <40장에서 시작하여 48장까지의 단락>에 포함된 말씀입니다. 참고로 후반부에서 이어지는 두번째 단락 <49~57장>의 소주제는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그리고 마지막 단락 <58~66장>의 소주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먼저 한가지 이해할 것은 이사야가 <43장>의 첫 말씀인 오늘 말씀을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선언하기 전, 앞장 <42장>을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백성’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악한 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보라” (사.42:18)라고 영적으로 귀먹고 눈먼 죄악된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눈을 떠서 보고 귀를 열어 들으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앞장의 내용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죄악된 그들을 버리실 것이다’ 혹은 ‘그들을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선언하시리라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오늘 오늘 본문의 <43장>이 시작되면서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v.1)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의 그 불순종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백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범죄한 그의 백성에게 오히려 그의 긍휼을 한량없이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v.2)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이토록 돌보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과 좀더 깊이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그분의 만드신 바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입양하는 사람들을 그 아이들을 ‘입양’했다고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낳았다’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으로 사랑함이 육체로 자녀를 놓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43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v.1a)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진리를 그분을 믿는 성도들은 인정하면서도, 과연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 에 대해서는 잘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과연 어떠하실지를 추측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묘사해보라고 한다면 제가 가장 그 분의 마음에 가깝게 비유할 수 있는 것의 하나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한 예로서 <열왕기상 3장>에 보면 ‘두 여인이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왕>에게 한 아기를 데리고 와서 서로 자기 아기라고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두 여인은 한 집에서 살았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게 되었고, 한 여인이 밤에 그만 자기 아들 위에 누워 아이가 깔려 죽게 되자, 다른 여인이 잘 때 죽은 자기 아이와 상대 아이를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다른 여인이 깨어서 죽은 아이가 자기의 아이가 아닌 것을 인식하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실랑이하다가 결국 솔로몬왕에게 판결해 달라고 온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칼을 가져오라 말하고 이렇게 명령합니다.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왕상.3:25)라고 말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중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왕상.3:26a)라고. 그러나 다른 여인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왕상.3:26b)고 말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누가 이 아이의 진짜 엄마인지 아시겠죠?! 이렇게 솔로몬은 지혜롭게 진짜 엄마를 판별했다는 것인데, 여러분과 저를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 아기의 친엄마 보다도 더욱 우리를 위하여 마음이 타는 듯하고 더 깊이 사랑하신다고 제가 말한다면 제가 지나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실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욱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11:8)라고 하나님은 망해가는 북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불타는 마음을 토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참된 이스라엘, 곧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신 그분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깊고 넓은 사랑으로써 말입니다.

둘째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선언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v.1b)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깊이 사랑하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먼저 앞서 살펴본데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그렇다면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라고 질문하는 사람에 대한 대답처럼 이어지는 두번째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나니)” (v.1b)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어느 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구속할만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확인해볼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구속하다’입니다. ‘구속하다’는 영어단어는 ‘redeem’이고, 그 의미는 <값을 대신 지불하여 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느 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가? 라고 질문했을 때, ‘값을 주고 그들을 사 올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3~4절>에 소상히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v.3)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 곧 ‘대속물’로 주셔서 다시 사실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값을 치르고, 우리를 다시 사셨나요?’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할 것인가?’가 어쩌면 그것을 사는 사람이 그 존재에 대한 가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평범한 메이커의 ‘중고 자전거’한대를 사는 가격으로 ‘수천만원’식이나 지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국보급의 ‘고려청자’를 제 정신이라면 단돈 몇 만원에 사고자 마음먹는 사람도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자 어떤 값을 지불하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 주고 사시기 위해 그의 외아들이요, 성자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의 대가지불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그 아들의 보배로운 생명을 주고 사실만큼 우리의 가치를 그 아들의 셩명만큼 존귀하게 평가하신다는 뜻이요, 그만큼 우리를 상상할 수 없을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의 경우에는 왜 하나님은 이토록 저를 사랑하시고, 보배롭게 보시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v.4)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다면,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면, 과연 그 누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값진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니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저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셋째,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끝이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v.1c)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불렀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는 존재하는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아!’라고 그 이름을 부르셔서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좀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요.10:11)고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들은 여러 유대인들이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6-27)라고.

여기서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으며 ~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선한 목자되신 예수께서 자신의 양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 양들이 주님께 반드시 반응한다는 뜻이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양된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그들은 그 음성에 반응하여 세상민족 가운데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부르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을 구원코자 부르시는 것이요, 그의 자녀삼고자 부르심이요, 세상민족들의 죄악된 삶에서 구별되어 그들을 <하나님의 성민>이 되게 하시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에서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양된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이, 신약에서 선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양된 ‘영적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인>을 부르심으로 정확히 오버렙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양들을 부르심으로 구원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그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로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2주전 금요일 ‘찬양의 밤’행사 때 주제 말씀으로 삼았던 <베드로전서 2장9절>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지명하여 부르심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고 거룩한 백성으로 복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요,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하시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값을 주고 다시 사시고 지명하여 부르심으로 그의 보배롭고 존귀한 백성 삼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어지는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하심을 입었나니,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함이라” (사.43:10)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참된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이 보배롭고 존귀한 그분의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19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사.43:19)는 신실하신 약속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그분을 믿는 여러분과 저를 값 주고 사셔서 그의 소유된 백성 삼으심을 성도 여러분들이 믿으신다면, 바라기는 이제 우리를 부르신 그 선하신 은혜를 더욱 깨닫고 누려 나감으로 ‘하나님의 증인’ 곧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에 걸맞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그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행하실 영광스럽고 위대한 새 일을 함께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