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4, 2024

“바울의 간증” (Paul’s Testimony)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2:6~8
Service Type:

“바울의 간증”

(Paul’s Testimony)

8-4-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2:6~8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설교 요약]

만약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다면, 그로 말미암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영생의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구원의 간증’이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사도 바울의 <간증>을 보게 됩니다. 그의 간증을 이와 같이 요약할수 있습니다.

  • 나는 유대인중에 유대인이었다 (v.3)
  •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율법을 배웠다 (v.3)
  • 율법의 열심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핍박했다 (v.4-5)
  • 그러나 ‘다메섹 언덕’에서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v.6-21)
  • 나는 내가 미워하고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v.10-13)
  • 나사렛 예수님은 나를 그의 증인으로 세우셨고,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셨다 (v.14-21)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이런 구원의 간증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유는

첫째,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간증하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볼 것인가?’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렵고, 주님의 제자로서 치뤄야 할 ‘댓가지불’ (paying the cost)이 두려운 것입니다 (요.14:1).

둘째, ‘종교적 의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간증이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허락된 자녀의 특권임을 알지 못할 때, 단지 종교적 의무로 생각함으로 부담스러워하고 부정적으로 여깁니다.

셋째, ‘구원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구원의 사실>보다 현재 누릴 <구원의 감격>이 없기에 사람들과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삶은 날마다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노래하며, 전파하는 삶입니다 (시. 96:1~2)

바라기는 베드로의 권면과 같이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구원의 간증을 항상 예비’ (벧전.3:15)함으로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만약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셨다면, 그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영생의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음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구원의 간증’이 있습니까? 구원받으면 그만이지, 굳이 간증이 필요하냐구요?!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신의 구원간증이 왜 필요한지 확신이 없다면,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면, 왜 주님은 우리를 구원받은 날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죄와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우리를 남겨두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선한 영향력 (미션)을 행하시고자 원하시기 때문이요, 그 미션의 중심에 우리 각자의 ‘간증’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각자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아들을 통해 나를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과 딸에 합당한 장성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깨닫아 나가는 시간되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성도 여러분의 평생의 삶 가운데 날마다 그 한량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구원의 은혜를 사도 바울과 수많은 주의 충성된 제자들과 같이 노래하고 증거하는 복된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21장>에서 사도가 <3차전도여행>을 잘 마무리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됨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일행들이 마지막 돌아오는 과정에서 ‘두로’와 ‘가이사랴’지방의 성도들과 교재할 때, 이들은 성령의 일러주심을 통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고난을 확신하고서는 바울을 강하게 만류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계시를 통해 더욱 더 예루살렘의 입성을 굳게 결심합니다. “나는 주 예수를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행. 21:13)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크리스챤은 동일한 성령께서 장래의 일들을 깨우쳐 주심을 때로 경험하지만, 도리어 그분의 뜻을 잘못 오해할 수 있음을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을 좇아 성령에 매여 순종하며 살아온 삶이기에, 이 결정적인 순간에 성령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이것이 비록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도,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 담대하게 입성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잠시 살펴본데로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아고보와 성도들과의 교제를 나누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잘못된 모함으로 인해 분노한 유대군중들에 의해 또 한번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로마군인들이 바울과 이들 군중들이 바울과 이들 군중들을 격리시켰고, 바울은 로마군인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군중들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런 바울의 변론, 곧 그의 ‘간증’이요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가 오늘 본문이 포함된 <행. 22장>의 <1~21절>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 자신의 <간증>을 묵상해 봄으로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고, 적용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들이 왜 흥분하고 분노하는지도 잘 모르는 군중들 앞에서 침착하고 담대하게 이렇게 그의 변론을 시작합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니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v.1-2)라고. 바울은 뛰어난 복음사역의 전략가요, 전파자답게 같은 동족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자라온 성장배경을 가감없이 설명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그 성에서 자라 그 당시 유대인 최고의 석학으로 알려진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가르침을 받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동족 유대인들처럼, 아니 그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대한 율법의 열심’으로 충만했던 자라고 스스로 자부했음을 그는 고백합니다 (v.3). 그뿐 아니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v.4~5)라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그가 율법을 사수하고자 하는 열심이 얼마나 심했던지, 나사렛 예수를 믿는 신앙, 곧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자 잡아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든 어느날, 그의 인생이 송두리체 바뀌게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날도 누군가의 집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청년 사울은 그들을 일망타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고 다메섹 언덕을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사울이 정오 12시쯤되어 다메섹 언덕에 다다랐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침으로 인해 그가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찬란한 빛 가운데 이러한 음성이 분명히 들렸던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v.7)라고. 그때 사울이 “주여 뉘시니이까” (8a)라고 물었고, 그분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8b)고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21절>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간증은 사실 지난번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의 회심’이란 제목으로 함께 바울의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을 통해 대부분 살펴보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교회생활 어느 정도로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적어도 한번이상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 사건을 설교시간에 들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박해하던 도 (종교)의 우두머리인 ‘나사렛 예수’,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온 힘을 다해 잔멸하고자 했던 청년 사울이 그 강렬한 광채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그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v.10)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한번의 순간적인 만남을 통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그토록 심히 미워하고 핍박하던 사울에서, 마치 오랫동안 주님을 따랐던 충성된 제자의 한명처럼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이런 엄청난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로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한편 청년 사울은 한 낮의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 그 햇빛보다도 더 강렬한 주님의 찬란한 광체를 보았고, 그로 말미암아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의 사건을 ‘매튜헨리’는 청년 사울의 육신의 눈이 멀게 된 사건에 담긴 영적 진리를 이렇게 주석합니다. “바울은 육적 실명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영적 실명상태를 인식하게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간증과 같이 바울은 갑자기 앞을 못보는지라 사람들은 손에 이끌리어 주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다메섹에 들어 갔고, 그 곳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던 주님의 신실한 제자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그의 눈을 다시 보도록 안수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울이 주께 질문했던 답을 아나니아는 대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v.14~15)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은 지체하지 않고, 주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아 구원 얻게 됨을 사람들 앞에서 침례로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가 예루살렘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께서 다시 한번 나타나셔서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v.21)고 명하셨음을 간증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그의 이 말을 듣고서는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v.22)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바울에 대한 분노와 강한 적개심을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군대 천부장은 이 사태가 위급함을 간파하고 긴급히 바울을 격앙된 군중들로부터 격리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이처럼 ‘주께서 그를 이방인에게로 보냈다’는 말에 격노한 이유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굳게 믿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구원관과 오직 자신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오만한 선민의식을 강하게 자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와 같이 바울은 자기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속에서도 침착하고도 담대하게 어떻게 자신의 삶이 이토록 극적인 변화를 누릴수 있었는지를 진솔하게 모인 수많은 동족 유대인들 앞에서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행. 26장>에서도 쇠사슬에 묶인 죄수의 몸으로 그는 세상 왕들과 위정자들 앞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구원간증을 담대하 나누었습니다. 그는 허락된 삶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구원 간증을 통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복되고 멋진 삶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함께 잠시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겐 이런 간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겐 간증이 있습니다”라고 답하신다면, 여러분은 복된 인생입니다. 계속해서 이 구원의 은혜를 만나는 모든 사람과 나누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저에겐 아직 구체적인 간증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신다면, 왜 여러분에게는 이 구원의 간증이 없는 것일까요? 저는 성도 여러분과 수많은 크리스챤들의 ‘뜨거운 감자’ 곧 ‘구원간증’이 왜 없는 것인지를 한번 거꾸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구원의 간증을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두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해 구원받았다고 믿는 성도들조차도 남의 시선을 너무도 강하게 의식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뭐하고 생각할까? 나를 예수쟁이, 기독교 맹신자라고 판단하지 않을까’하고 남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그들의 판단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제자가 되게 될 때,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고난과 핍박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댓가지불’ (paying the cost)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파문되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내가 원치 않는 취급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눈 앞에 두고, 두려움에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이 모든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이 두려움의 뿌리는 바로 주님을 신뢰하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종교적 의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이 ‘구원의 간증’을 굳이 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의무감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왕에 할 바에는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회심과 같이 극적인 간증을 원합니다. 이왕 간증을 하려면, 뭔가 남들이 들었을 때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드라마틱한 신앙고백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구원간증’을 준비하는 것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21세기의 대표적인 크리스챤 리더의 한명이었던 ‘존 스토트’목사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그의 책에서 ‘천국의 사냥개’되신 예수님께서 끈질기게 자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심으로서 어느날 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제가 문을 연것일까요, 아니면 그분이 문을 여셨을까요? 물론 제가 열었지만, 그분의 끈질긴 두드림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였고, 심지어는 불가피하기까지 했습니다”고 스토트목사는 간증합니다. 참된 간증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가감없이 진솔하게 내가 받은 구원의 사건과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간증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성도들 가운데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영적 사실을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는 데서 오는 영적 오해에서 비롯됨을 봅니다. 물론 오늘 사도 바울의 간증에서는 그가 주님을 만나게 된 과거의 <다메섹 도상>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다메섹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은 과거의 첫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도리어 더욱 더 풍성하고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누려 나가고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의 핵심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16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13-14) 또한 <시편 96편>에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찌어다” (시. 96:1-2)고 구원의 하나님을 날마다 송축하고 그의 은혜를 노래하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과거 한때의 받은 구원이 아니라, 그 구원이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확장되어 짐으로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 증가하는 것이 구원의 현재성이요, 생명성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언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는지에 관계없이 더욱 더 구원의 감격과 간증으로 날마다 충만해져야 하는 지의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이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수없이 많은 찬양과 경배의 찬송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올려드린 이유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전. 3:15,16)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 가운데서 ‘당신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언제라도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온유와 겸손함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진솔하게 여러분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묻는 자에게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그 이유를 사도 베드로는 그 앞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바라기는 여러분을 어두운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불러내어 생명의 빛과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덕을 마음껏 선포하고 날마다 받은 구원에 감격하며 노래하는 복된 여러분의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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