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1, 2024

“바울의 고별설교” (Paul’s Farewell Address)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0:31~32
Service Type:

“바울의 고별설교”

(Paul’s Farewell Address)

7-21-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0:31~32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So be on your guard! Remember that for three years I never stopped warning each of you night and day with tears.)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바울 일행의 <3차전도여행> 과정에서, ‘드로아교회’에서 졸음을 못이겨 3층다락에서 떨어져 죽게 된 유두고를 주께서 바울을 통해 다시 살리는 은혜의 사건을 묵상했습니다.

이제 일행은 앗소에서 여러 지역을 지나 밀라도에 도착하여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마지막 고별설교와 함께 기도와 더불어 뜨거운 사랑과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이렇게 바울이 에베소장로들과 함께 나눈 말씀과 교제 내용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20장 17~38절>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고별설교의 중심메세지일까요?그것은

         첫째) ‘모든 겸손과 눈물의 섬김’이었음을 사도는 간증합니다: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다’ (v.19~21)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그가 행한 겸손과 눈물의 삶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택하여 이방의 사도로 세우시고, 능력으로 동행하신 주의 은혜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철저하게 성령에 매인 삶’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v.22) 바울이 성령의 뜻에 순종함으로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중대한 선교방향을 바꾸었듯이 (16장), 언제나 ‘성령에 매여, 성령을 좇아’ 행했던 삶을 살았음을 그는 고백합니다.

셋째) ‘양떼를 치라’라고 사도는 간곡히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v.28) 사도는 장로들에게 주님의 양들을 보살피고 섬길 것을 강권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과 같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v.31)고 지난 3년간 그가 온 힘을 다해 성도들을 섬겼던 것을 일깨우면, 그렇게 섬겨줄 것을 당부합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남은 인생 여정을 성령을 좇아 온전히 달려가시고,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 온 힘을 다해 섬겨 나감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받는 복된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의 인생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이 험한 세상 가운데 만약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선하게 변화시킨 그 어떤 누군가가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바울은 말을 마친 후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다 크게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헤어짐을 아프게 나눕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20:35)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심없이 주님의 양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런 주님의 목자를 만나셨다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일 것입니다. 저의 인생에도 이런 목자는 있었고, 이런 분들로 인해 늘 저의 마음에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 은혜가 크기에 저도 생명 섬김의 삶을 살고자 하지만, 여전히 저의 사랑 없음과 부족한 섬김을 통감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오늘 말씀 가운데 주님의 선하신 사랑에 빚진 자 되어, 주의 풍성한 사랑에 힘입어 남은 평생을 생명 섬김의 복된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드로아교회’에 들러서 디모데를 비롯한 일곱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1주일가량을 교제했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그 마지막 날인 ‘안식일 다음날’ 곧 ‘주일날’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며 늦은 밤에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 다락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는 실로 안타까운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바울에게 능력으로 임하셔서 유두고를 다시 살리는 권능의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 각자도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다시 살아날 때, 죄에 인한 두려운 ‘심판의 부활’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영생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음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일행은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고, ‘미둘레네’에 가서 ‘기오’와 ‘사모’를 지나 ‘밀라도’에 도착하여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만났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당초 에베소에 방문하여 장로들을 만나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자 계획 했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윈했기에, 시간을 절약하고자 예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에 와 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v.13~16).

이렇게 하여 밀레도에서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과 만나 사랑과 믿음의 뜨거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는 이들을 만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v.18)라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저는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과 나눈 고별설교를 통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무엇이 바울의 고별설교의 중심메세지일까요?그것은

첫째) ‘모든 겸손과 눈물의 섬김이었음을 사도는 간증합니다. 우리가 지난 몇시간을 통해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도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가 성도들과 함께 거둔 복음의 귀한 열매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사도권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할 뿐 아니라, 2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주의 복음을 사모하는 제자들을 따로 세워 날마다 말씀으로 섬겼던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말씀이 세력을 얻고 흥왕하게 되고 믿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던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v.19~21)라고. 이 고백의 의미는 그가 에베소에서 거둔 풍성한 복음의 열매는 그 무엇보다도 날마다 ‘하나님께 모든 겸손과 눈물로 드린 기도와 섬김’의 열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가 말하는 ‘겸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도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통해서 살펴본데로, 그는 고린도사역 가운데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전. 2:3)고 나중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약하고 두려워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자신의 심신이 약하고 겁이 많았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맡기신 양떼를 섬김에 있어서 자신의 의도치 않은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서 혹시라도 양들이 상처 입거나 유기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낮추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그가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겸손한 체’하는 겉모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 (딤전.1:15)라는 철저한 영적 자기인식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자격 없는 자를 일방적으로 택하셔서 ‘이방의 사도’로 세워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그가 깨닫게 되었을 때 바울은 겸손하고 낮아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눈물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눈물은 무슨 눈물일까요?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의 심정과 그들을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생명주시길 간절히 구하는 눈물’이요, ‘유대인들과 복음을 대적하는 수많은 이방인들로 인하여 흘린 수많은 고난의 눈물’이요, 이런 고난의 삶 가운데서도 예상치 못한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하게 되었을 때 ‘그가 흘린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바울이 성도들에게 자신의 삶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핵심은 ‘내가 이정도로 복음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여러분과 함께 거둘수 있었던 근거는 나의 의지와 노력과 실천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라는 진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성도를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자격 없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큰지를 철저하게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지금 이 크신 주님의 은혜를 성도들과 간절히 나누길 원했던 것입니다.

둘째) ‘철저하게 성령에 매인 삶’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v.22)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바로 ‘성령께 매인 사역’ (the compelled ministry by the Spirit)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도행전’을 처음 시작하면서 왜 많은 성경학자들이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지 하는 중심적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2차선교여행을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바울은 원래 더베, 루스드라, 드로아를 거쳐 계속해서 비두니아로 이어지는 ‘소아시아’선교를 원했지만, 예수님의 영이 이를 허락지 않으심을 그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밤에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16:9)는 환상을 보게 됨으로써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자신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성령을 좇아 ‘마게도냐’ 곧 오늘날 유럽 땅으로 첫발을 디디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펴본데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로 이어지는 마게도냐 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성령을 쫓아 나아가는 사역이요,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께 순종하는 사역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바울의 사역이 그토록 충성되고 충만한 복음의 열매를 거둘수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성령을 좇고, 성령께 매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청년들과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가졌는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민형제가 저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장기적인 목회방향은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때 저는 문뜩 지난 저의 30년 가까운 미국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감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는 1995년에 미국에 처음 와서 제가 전공하던 섬유공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가능하면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 교수 혹은 연구원이 되어 청년들을 신앙적으로 돕는 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되돌아 볼때, 저의 뜻과 주님의 뜻은 달랐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처음 유학 올때부터 품었던 ‘학생사역’은 감사하게도 허락하셨지만, 그 중간과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과연 제가 남은 저의 사역을 생각하면서 제 나름데로 꿈꾸고 소망하는 바는 있습니다. 우리 아포슬교회가 수없이 많은 학생 청년들이 몰려와서 ‘아틀란타’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크리스챤 청년문화를 선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저의 비젼입니다. 그러나, 비록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지식과 실천력과 신념이 결코 약하지 않았지만, 성령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깨닫았을 때 철저하게 그 뜻에 자신의 사역과 삶을 교정함으로 진정한 열매를 거둘수 있었던 것처럼, 저 또한 모든 계획과 저의 신념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 때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주께서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의 ‘성령의 매인 삶’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셋째) ‘양떼를 치라’라고 사도는 간곡히 권면합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요한복음>의 마지막장, <21장>을 읽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도마와 여러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때 낙심하여 다시 과거 자신들이 생업으로 삼던 물고기 잡던 일로 되돌아가서 밤새 물고기를 잡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뭍으로 되돌아왔고 있었고,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해변가에서 숱불에 생선을 구어 그들에게 주셔서 먹게 하시고 나서 제자 베드로에게 이렇게 3번씩이나 묻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그때 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 21:15~17)고 분명히 3번씩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이 주님의 명령은 단지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명하심이 아니요, 주님을 믿는 모든 그분의 제자들을 향한 명하심 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사도는 그의 진정과 사랑으로 깊이 녹아 있는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간절한 고별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그들을 독려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v.28) 사도는 지금 모인 장로들에게 주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곧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 온 힘을 다해 섬기고 충성되게 보살피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듯이 이렇게 간곡히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v.31~32) 오늘 본문에서 성도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를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돌보는 작은 목자의 상한 심정’을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간곡한 권면을 통해 강하게 느낄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v.35)라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지금까지 살펴본데로, 사도는 자신이 가진 물질(재물)을 아낌없이 성도들, 곧 주님의 양떼를 위해 내어 놓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관심과 사랑을, 그리고 이제 자신의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그분의 맡기신 양떼들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으면서 삼년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했고, 이제 그들을 주님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어린 양들을 에베소의 장로들, 곧 ‘주님의 작은 목자들’에게 남기며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주님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주님의 어린 양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양들은 결코 여러분의 인생에 ‘걸림돌’도 아니요,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존재’도 아니며, 여러분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거추장스럽고 성가신 존재’가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진실로 바울에게 은혜 베푸셨드시, 주님의 몸을 함께 일구어가며 참된 만족과 영적 승리의 삶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성도와 교제 가운데 이렇게 자신의 남은 삶을 되돌아보며, 굳게 다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v.24)라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주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여정길 가운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주께 받은 복음증거의 사명을 위해 목숨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써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고, 주께서 예배하신 영광스런 ‘의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