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 2024

“베뢰아 사람들” (The Bereans)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7:11~13
Service Type:

“베뢰아 사람들”

(The Bereans)

6-2-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7:11~13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Now the Berean Jews were of more noble character than those in Thessalonica, for they received the message with great eagerness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 하나 (As a result, many of them believed, as did also a number of prominent Greek women and many Greek men.)

13 데사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But when the Jews in Thessalonica learned that Paul was preaching the word of God at Berea, some of them went there too, agitating the the crowds and stirring them up.)

[설교 요약]

            오늘 말씀은 ‘베뢰아 성도’의 깊은 영성과 주의 진정한 제자로서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참된 성도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난 몇시간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과 일행은 ‘마게도니아’의 으뜸가는 성,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 ‘귀신들렸던 여종’ 그리고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빌립보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빌립보성에서 연결된 ‘에그나티아’ (=로마 고속도로)를 따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성에 도달하는 것이 <사도행전 17장>의 도입 부분입니다. 이곳에서도 이들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 복음을 영접하는 경건한 무리가 생겼고, 이를 시기하여 주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성을 소란케 했습니다 (행. 17:2-9).

이런 소요사태로 인해 바울과 일행들은 ‘데살로니가’에서 73km 떨어진 <베르미온 산>기슭에 자리잡은 ‘베뢰아’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곳에서도 유대인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이 말씀을 받은 베뢰아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에게 많은 귀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뵈뢰아 성도들로부터 본받을 점일까요? 그것은

첫째, “신사적”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나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v.11a) 여기서 ‘신사적’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유게니스”이고,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의 뜻을 가집니다. 따라서 베뢰아 사람들은 편견 없는 ‘열린 마음’을 가진 고귀한 성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v.11b)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with great eagerness)의 헬라어 원어의 뜻은 <열심히, 자진해서, 준비된>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슴이 시냇물을 간절히 찾듯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말씀을 열심을 다해 자발적으로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베뢰아 성도의 ‘뜨거운 영성’입니다.

셋째, “날마다 말씀을 상고”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뢰아 성도의 특성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 (v.11c)하였습니다. 여기서 “상고하다” (examine)는 ‘헬라어’ 원어 “아니크리노”는 <자세하게 골라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베뢰아 성도들의 ‘차가운 이성’을 보여줍니다.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가르침을 조사하고, 성경으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베뢰아 성도가 보여준 열린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받고, 더 나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말씀을 분별하고 깨닫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평소에 신.구약 말씀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고, 묵상할 때마다 많은 감동과 도전을 뱓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있는데, 그 말씀은 여러분도 잘 아는 <시편 1편>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라고. 누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축복된 사람>인지를 이 말씀보다 더 명료하고 감동적으로 저에게 밝혀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과연 어떤 자인지를 잘 설명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저는 오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v.11-12) 바로 베뢰아교회 성도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대표적인 ‘복 있는 삶’을 실제로 삶에 적용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함께 ‘베뢰아 성도’의 참된 영성과 주의 진정한 제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지난 몇시간에 걸쳐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복음의 진보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이 ‘제 2차 전도여행’ 가운데 ‘빌립보’성에서 해했던 전도사역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과 성별, 나이, 그리고 영적 상태는 각각 달랐지만 <자주장사 루디아> <귀신들렸던 여종> 그리고 <로마 감옥 간수>에게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자유케 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과 권능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렸던 여종의 주인들로부터 거짓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로마관리들에게 많은 매질을 당하고 감옥 깊이 감금되었으나, 이들은 도리어 한밤중에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렁차게 기뻐 찬송했을 때, 죄수들이 그 소리를 들었고 갑자기 큰 지진과 함께 옥문이 열리고 발에 차였던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사건을 통해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이들이 전한 복음을 영접하고, 그와 그집이 모두 구원받는 복된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과적으로 옥에 있던 여러 죄수들과 간수와 그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볼 때, 바울과 실라가 왜 억울하게 매질 당하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하는 이유를 좀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절망적인 감옥에 갇힌 죄수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간수와 가족에게 주께서 그의 충성된 증인인 사도바울과 실라를 통해 생명의 복음으로 그들을 구원시키고자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행전 16장>의 마지막부분, <35~40절>에 대해 잠시 확인하고 넘어가고자 하는데, 그것은 ‘이 사건이 있던 그 다음 날, 로마 감옥을 지키던 간수의 상관이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명했지만, 바울은 간수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37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v.37)

사도 바울은 이 시점에서 자신과 실라가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관리들에게 밝히고 ‘이의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로마사람인 우리를 너희가 정식재판을 통해 죄도 정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불법적으로 심하게 때리고, 옥에 가두더니, 이제는 사람들 몰래 우리를 내보내고자 하느냐? 그럴수 없어! 이제 그들이 직접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할 것이오!’라고 바울은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 수 있듯이, 바울과 실라는 <로마시민권자>였는데, 이런 ‘로마시민’은 그 당시 많은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어떤 정식 재판없이 구타당하거나 감옥에 가두어지는 인신구속을 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핏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시민이면서도 정식재판도 거치지 않고 매질당한 것이 억울해서 이렇게 따지고 문제제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 바울이 정말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는 것이 싫고 피하고 싶었다면, 그들이 로마관리에게로 끌려가서 매질 당하고자 할 때 그 사실을 먼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피하고자 자신들의 로마시민권이라는 특권을 사용하기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직하게 자신들의 고난의 잔을 모두 마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팝박의 사건이 모두 끝난 이 시점에서 ‘왜 자신들이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정식재판없이 불법적으로 매질당한 사실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앞으로 이곳 빌립보지역에 주의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의 정당성과 안위를 도모하고자 함입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자가 전하는 이 가르침은 귀신들렸던 여종의 주인들의 모함처럼 사회를 어지럽히고 해를 끼치는 사이비종교사상이 아니라, 그 민족과 나라를 이롭게 하고 그들을 살리는 참된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교회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간수의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가 로마사람이라는 말에 자신들이 잘못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에 그들을 찾아가서 고개숙여 사과하고, 정중하게 그들을 호위하여 그 도시를 떠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들은 ‘루디아의 집’에 가서 성도들을 만나 서로 격려를 나누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빌립보성’을 떠난 이들 일행은 로마의 중요한 고속도로인 <에그나티아>로 연결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성은 항구도시로서 그 당시 로마제국과 동방제국을 연결하는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상업과 무역에 밝은 유대인들이 이곳 데살로니가에 많이 이주해 살았고, 이로 인해 유대인회당도 있었기에 그것이 바울과 일행이 이 지역에서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 회당에서 3번의 안식일을 거치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골자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v.3)라고.

이렇게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그 중에 큰 무리의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이 이들의 가르침을 따랐는가 하면, 일부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1차전도 여행>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여러 지역에서 본 것과 같이 마음에 시기함이 가득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거리의 불량배를 고용하여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성도들이 모여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여 바울과 일행을 잡아 다가 군중들 앞에서 욕보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v.5). 이런 소요사태 가운데 유대인들은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성읍관리에게로 끌고 가서 고소했고, 이후에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푸려 났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데살로니가의 극악한 유대인들로부터 탄압을 피하게 하고자 밤중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성으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성’은 앞서 설명했던 로마제국의 젖줄과도 같은 고속도로 (에그나티아)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고, 데살로니가로부터 73km 떨어진 <베르미온 산> 기슭에 자리잡았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베뢰아>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같은 상업적으로 교역이 활발한 도시는 아니었고, 장색 세공업과 석공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과 실라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제 <베뢰아>지역에서의 복격적인 ‘복음증거’와 ‘말씀훈련’을 두사람이 행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인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v.11)라고. 저자 누가는 베뢰아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상고했다고 이들을 칭찬합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무엇이 뵈뢰아 성도들로부터 본받을 점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신사적”입니다: 먼저 저자 누가는 베뢰아 성도들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나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v.11a)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사적”이라는 <개역한글>버전의 단어가 헬라어 원어에서는 “유게니스”이고,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KJV버젼>에서는 ‘noble’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여기서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문벌)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자 함에 있어서 편견이나 선입관없이 객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열린 마음’ (open mind)을 소유했음을 ‘고귀한’ (=고결한)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뢰아 성도들에게서 무엇보다 먼저 배울 점은 진리를 찾아 감에 있어서 진정한 ‘구도자’가 보여야 할 첫번째 자세는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느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점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유용성이 부족하다>는 것 보다는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는, 더 열심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것보다도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한 열린 마음일 것입니다. 이것이 ‘베뢰아 성도들’이었습니다.

둘째,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계속해서 누가는 베뢰아 성도를 칭찬하며, “(베뢰아 사람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v.11b)라고 이들을 특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간절한 마음으로”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파세스 프로뒤미아스”로써, <열심히, 자진해서, 준비된>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NIV>에서는 “with great eagerness” (엄청난 열심으로/ 아주 기꺼움으로)라고, 또한 <KJV>에서는 “with all readiness of mind”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볼 때, 베뢰아 성도들은 온전히 준비된 마음과 엄청난 열심을 다해 말씀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음미할 때, 주께서 복음서에서 ‘<좋은 밭/옥토>에 뿌려진 씨앗’(마. 13:3-9)을 비유로 말씀하셨을 때의 ‘옥토’가 바로 베뢰아 성도의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해 준비되고, 열정적인 영적 상태’가 아닌가 하고 여겨집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우리의 마음상태가 ‘길가’와 ‘돌밭’ 호근 ‘비옥한 옥토’일 때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베뢰아 성도의 ‘뜨거운 영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편의 기자처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라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선하심을 사모하고, 그분의 말씀과 은혜에 사슴처럼 목말라하는 성도의 뜨거운 영적 갈구가 바로 ‘베뢰아 성도’의 영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갈구로 말미암아 날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시. 1:2) 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셋째, “날마다 말씀을 상고”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누가는 베뢰아 성도의 특성으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v.11c)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살펴볼 단어는 “상고하다” (examine, NIV/ search, KJV)는 단어인데, 이것의 ‘헬라어’ 원어는 “아니크리노”로써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럼으로 ‘한글버젼’중 가장 원어성경에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흠정역>에는 ‘상고하다’는 이 단어를 “탐구함으로”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베뢰아 성도들은 먼저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해 나가며 <열린 마음자세>로서 시작하여, 성경말씀을 간절하고 준비된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최종적으로 이 오늘 배운 말씀이 과연 <구약의 말씀/ 선지자의 예언들>과 서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는지를 날마다 확인하고 탐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아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날마다 스스로 ‘성경공부’해 나감으로 자신의 신학을 건전한 말씀 위에 세워 나가고, 배운 말씀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해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베뢰아 성도의 이 마지막 특성을 ‘차가운 이성’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앞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것이 베뢰아 성도들의 <뜨거운 영성>이라면, 이번의 “이것이 (과연) 그런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들의 <차가운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성도의 매우 심각한 문제를 한가지 들라면, ‘적어도 열심 있다고 불리는 성도들이 <뜨거운 영성>은 있는데, <냉철한 이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뜨거운 영성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만큼 큰 성장했지만, 문제는 또한 한국교회만큼 수없이 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활개치는 나라도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차가운 이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은 말씀과 가르침과 그 전파하는 자들의 교리가 과연 성경말씀과 잘 연결되고, 문제가 없는지? 를 자세히 살펴보고, 점검해보고, ‘과연 그러한가’하고 냉철하게 살펴보는 지적 수고를 게을리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악한 영, 사단 마귀는 ‘우리 성도가 올바른 말씀의 기초 위에 서 있지 않을 때’, 언제든지 교활한 거짓 사상과 가르침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장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베뢰아 성도들과 같이 ‘열린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뜨겁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듣고 배운 성경말씀이 과연 믿을만한 가르침과 교훈인지를 스스로 냉철하고 엄격한 지성을 통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십니까? 이러할 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같이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시. 1:3)같이 이런 푸르른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