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1, 2024

“사십명의 맹세” (The Oath Of Forty)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3:12~13
Service Type:

“사십명의 맹세”

(The Oath of Forty)

8-11-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3:12~13

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The next morning the Jews formed a conspiracy and bound themselves with an oath not to eat or drink until they had killed Paul.)

13 이 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명이더라 (More than forty men were involved in this plot.)

[설교 요약]

우리 인간이 행하는 것 중에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헛된 맹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또 한번의 어리석은 맹세하는 자들을 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울을 죽이겠다고 사십인이 극악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사도행전 22장>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갔다가 어떤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로마군대 천부장의 조처로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바울이 모인 유대군중들을 향해 자신의 신앙간증을 나누었던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사태가 있던 다음날, 천부장은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종교지도자들, 곧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소집하고, 바울을 참석시켜 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이유를 알고자 합니다. 그리고 <23장>이 시작되면서, 사도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고, 그들이 반박하는 내용이 <1~10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그들의 뜻대로 바울을 고소할 수 없게 되자, 40명의 소위 ‘암살특공대’가 결성되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v.12)고 잔인한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 악한 계략을 성공시킬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유대인들의 암살음모를 통한 영적 가르침일까요?그것은

         첫째, ‘유대인들은 불법적으로 복음을 저지함’을 봅니다: 문제는 법적 절차를 통해 사도 바울을 소송하기 힘들게 되자, 40명의 극단주의자들이 암살음모를 꾸미고, 더욱이 대제사장과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공회원들이 이 음모에 동조함으로 함께 불법적인 악을 저지른다는 점입니다 (v.12~15).

둘째, ‘주께서 바울 곁에서 그를 붙드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미 바울의 주요한 사역의 전환점마다 나타나신 주께서 악한 자들의 맹세하기 전날 밤 바울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v.11)라고 힘주십니다.

셋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지키심’을 깨닫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악한 계략을 하나님께서 수포로 돌아가게 하시는 과정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조카’와 로마군대 ‘백부장과 천부장’을 (군사 470명) 사용하셔서 바울을 철통같이 지키시고 마침내 그를 로마에까지 입성 시키십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주의 선한 뜻 가운데 악한 자의 헛된 맹세를 파하고, 함께 연합하여 복음의 진보를 이루고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를 거두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인간이 행하는 것 중에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헛된 맹세일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헛된 맹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의지 너머의 있는 것이기에 우리 주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마. 5:33~34)라고 말입니다. 오늘 또 한번의 어리석은 맹세하는 자들을 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v.12)는 극악하고 잔인한 맹세를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과 살기등등한 유대인들의 갈등과 충돌 가운데 도도하게 흐르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이다” (시.3:6)고 주를 향해 담대히 외친 다윗과 같이,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과 같이 믿음으로 악한 영들과 세상의 헛된 연합을 파하고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과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살펴본데로,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부터 ‘성전을 더렵혔다’는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그 말에 흥분한 유대군중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까지 직면합니다. 그러나 로마군대 천부장으로부터 그 소요사태가 진정되었고,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유대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간증을 나눕니다. 그리고 이 간증은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 되시다’는 복음증거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바울이 간증가운데 주께서 그에게 명하시길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행. 23:21)고 하는 말까지 들었을 때, 유대군중들은 또 다시 갑자기 흥분하고 분노하며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라고 소리치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구원관과 오만한 선민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할례 받지 못한 가치없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며, 이들은 도리어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몰고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천부장이 급히 바울을 군중들과 격리시키고, 병영 안으로 데리고 가서 ‘왜 유대인들이 그에 대해 이렇게 소리 지르는지?’를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여 신문하라고 명합니다 (v.24). 그래서 군인들이 가죽줄로 바울을 매고 채찍질하고자 했을 때, 바울은 옆에 있던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v.25)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은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그가 로마 시민권자임을 보고했고, 천부장은 이 사실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v.29). 그리고 그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지, 그 진상을 알고자 하여 대제사장과 온 유대공회를 소집하고, 바울을 데리고 와서 그 앞에 세웁니다 (v.30). 여기까지가 <사도행전 22장>의 후반부의 내용이고,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이어지는 <사도행전 23장>의 전체내용은 유대인 공회와 그리고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이 서게 되는 장면 (내용)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23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유대공회원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행. 23:1)라고. 그런데 이 말을 듣자 말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선 사람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했고, 바울은 그를 향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23:3)라고 그를 강하게 비난합니다. 이때 이 말을 들은 곁에 선자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v.4)고 바울을 힐문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했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v.5)라고. 이 말은 바울이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죄의 유무도 확인하지 않고 ‘입을 치라’고 명하는 아나니아의 행위 자체는 명백히 불법적이고 결코 공의롭지 못한 판결권자의 태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에게 말한 사람이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표현이 과했음을 구약의 출애굽기 말씀 (출. 22:28)을 인용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선 신학자들 사이에서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시력이 매우 약해 있었음으로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원래 바울이 청년시절에는 유대종교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으나, 주님의 택함 받은 사도가 된 이후로 오랫동안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교류가 없음으로 인해 아나니아 대제사장을 알지 못 했으리라고 신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사도는 ‘그가 먼저 나에게 무례하고 불공평한 태도를 보였다’는 식으로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지 않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진실함과 용기가 아닐까요?

이런 설왕설래가 있고나서, 바울은 이 산헤드린 공회원 안에 두 그룹이 나누어져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것은 이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인파>라는 ‘매우 정치적이고 지식층으로 특정’ 지어지는 그룹과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파>라고 불리는 ‘종교심이 강하고 특히 율법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룹의 유대종교의 대표적인 두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특별히 교리적 (신학적)관점에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일수 없고 동화될 수 없는 영적 단절 상태임을 사도는 잘 알았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v.8)고 저자 누가는 간략하게 그들의 교리적 차이를 핵심적으로 잘 표현합니다.

따라서 사도는 이렇게 공회 앞에서 외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v.6)라고. 바울은 매우 영리하고도 지혜롭게 이들 두 그룹의 영적 차이를 간파하고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의 이슈를 부각시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울의 이 말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큰 다툼이 생겨 무리가 둘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파에 속하는 몇 서기관들이 일어나서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v.9)하고 바울의 주장을 두둔(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두개파 사람들과 큰 분쟁이 생기게 되었고, 다툼이 과격해지자 혹여나 사도 바울이 그들 사이에서 찢겨 죽을 것을 우려한 로마군대 천부장이 바울을 급히 무리 가운데서 빼내어 군대 병영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후에 <사도행전 23장> ‘12절에서 끝 절 35절’까지는 요약하면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로마군대의 구출작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을 핍박하고 가로막던 로마의 위정자들이 지금은 도리어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된 사도 바울의 생명을 지키는 ‘철통 같은 호위병’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게 증거하는 주의 제자 사도 바울을 안전하게 지켜 보호하시고자, 유대인들의 교활한 살해 계획을 무산시키시고, 사도가 꿈꾸는 <로마입성>을 위해 로마의 최강군대를 동원하셔서 극진히 보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유대 극렬분자 40명의 바울을 향한 치밀하고도 교활한 살해음모가 무산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성도가 이해할 영적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무엇이 유대인들의 암살음모를 통한 영적 가르침일까요?그것은

         첫째, ‘유대인들은 불법적으로 복음을 저지함’을 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을 때,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가로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유대인들 중에 극단적 율법주의자로 추정되는 40명의 ‘비밀결사대’가 조직되어 바울 한사람을 죽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v.12)고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맹세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만약 우리가 바울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 자신들이 가장 무서운 저주를 받겠습니다!!’고 심히 어리석고 헛된 맹세를 하나님께 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이 암살의 음모가 충격적인 것은 이런 극렬분자 40명이 자신들의 암살계획을 유대인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모두 나누고 나서,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단 한명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이 비열하고 야만적인 암살음모를 추진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v.15)라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유인해 데려오면, 이들이 길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암살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학살하는 이런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태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주께서 바울 곁에서 그를 붙드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앞에서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 섰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크게 다툼이 생겨 바울을 보호하고자 천부장이 급히 그를 군대 영내로 데려 가도록 조치했음을 설명 드렸습니다 (v.10). 그렇게 바울이 영내로 돌아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v.11)라고. 그날 밤 주님은 바울 곁에 나타나셔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다시 바울의 인생에서 중대한 갈림길이자 마지막 환난의 문 앞에서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십니다. 주님은 멀찌감치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곁에 오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담대하라’고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왜냐하면 그가 복음전파 가운데 꿈꾸고 소망하는 데로 반드시 로마에 입성하게 될 것을, 세계의 심장인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충성되게 증거할 것을 주님은 약속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울의 복음증거의 삶의 변곡점마다 나타나셔서 그의 곁에서 신실하게 소망과 용기를 주시고 언제나 그와 동행하심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소망과 비젼의 음성을 들은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과 용기로 충만했을 것인지를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셋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지키심’을 깨닫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는 어떤 기적사건을 통해서 보다도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놀랍게 임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바울의 조카>를 통해 이런 유대인의 악한 음모가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 조카의 구체적인 이름은 여기서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청년시절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듯이, 그의 가까운 친척인 조카와 그 가족도 아마 유대민족의 지도자층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 그는 누군가를 통해 삼촌인 바울을 살해하고자 하는 악한 음모를 듣고, 급히 바울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렸고, 바울은 한 백부장에게 자기의 조카를 천부장에게 데려가서 그에게 할말을 하도록 요청합니다 (v.16-17).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조카를 사용하셔서 악한 자의 계략을 무력케 하십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방금 말씀 드린데로, 하나님은 바울의 말을 들은 한 ‘백부장’과 또 ‘백부장’의 말을 들은 ‘천부장’의 마음까지도 주장하셔서 바울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쉽게 무시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 백부장은 그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천부장에게 인도했고, 천부장은 그 청년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면서 그의 말을 경청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신속하고도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천부장은 그날 밤 제 삼시, 곧 오늘날로 하면 ‘밤 9시’가 되었을 때 가이사랴까지 바울을 호위해서 가도록 특단의 조치를 명하는 것입니다.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명과 기병 칠십명과 창병 이백명을 준비하라” (v.23)고 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천명군사의 그의 절반에 해당하는 470명의 군사를 동원해 바울을 철통 경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대종교 지도자와 로마 군대 책임자들의 역설적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유대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사악한 암살단과 한 편이 되어 무고한 한 생명을 없애고자 비열한 음모를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의 조카와 이방인 로마군대 백부장과 천부장은 한 명의 죄 없는 자의 죽임 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복음의 충성된 증인 사도 바울을 철통같이 지키고, 안전하게 유대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까지 호송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과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권능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역사방법을 보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구원하심의 은혜는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사도행전>에서만도, 손에 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표적과 기사라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볼 때는 그런 기적의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 40명이 바울을 죽이고자 헛된 맹세를 하던 전날 밤에 주님은 바울 곁에 서셔서 그를 담대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조카를 사용하셔서 로마군대 백부장과 천부장의 마음을 여셔서 악한 암살음모를 파하신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꿈꾸고 간절히 기도하던 로마제국의 문을 로마군대의 극진하고 철통 같은 호위를 받으며 들어갈 수 있도록 역사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표적과 기사 못지 않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권능의 역사방법임을 이해할 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존귀만을 올릴 따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때로는 길이 막히고, 나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자들이 산처럼 둘러 싸는 고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니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과 같이, 주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그분의 강한 손과 편 팔 아래에서 모든 원수의 헛된 맹세를 파하고, 악한 연합을 무너트리는 주님의 힘세고 충성된 제자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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