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8, 2024

“상처의 치유” (Wound Healing)

Preacher:
Passage: 창세기 (Genesis) 45:5,7~8
Service Type:

“상처의 치유”

(Wound Healing)

12-8-24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45:5, 7~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설교 요약]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욱 심각함을 보게 됩니다. 저는 창세기에서 요셉의 삶을 통하여 내면의 상처는 무엇이며, 이 상처는 어떻게 궁극적으로 치유될 수 있을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12아들중 노년에 낳은 11번째 아들로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하면 할수록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형들이 그를 돈을 받고 상인들에게 팔아버리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창. 37장).

이때부터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어지는데,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애굽의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애굽의 총리’로 등극합니다. 이제 20여년만에 형들과 다시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며, 어떻게 요셉은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었을지?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첫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갔을 때나, 보디발의 집에서 주인 아내에 의해 억울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힐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39:9)라고 ‘하나님이 참된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이런 요셉과 하나님은 언제나 동행하시고,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깨닫음”으로써 입니다: 20여년의 고난을 거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양식을 사러 온 형들과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v.5) 라고 도리어 형들을 안심시킵니다. 자신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지난 날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형들을 용서함”으로써 입니다: 요셉이 진실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 되어진 분명한 외적 증거는 ‘형들을 용서함’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부러 ‘형들과 동생 베냐민’에게 누명을 씌우는 상황극을 벌려 형들이 자신을 판 잘못을 진실로 뉘우치고, 변화되도록 도왔습이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선을 베풀 뿐 아니라, 진정한 치유를 경험케 되는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아무 잘못도 없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보혈 흘리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누리고, 우리 속에 있는 크고 작은 상처와 아픔이 성령의 은혜로 치유함을 받으며, 이 상처가 변하여 생명을 살리는 생명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욱 심각하고 치료되기 힘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목격할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고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좀 더 가까이에서 그 형제, 그 자매의 삶을 보게 되면 그 크기는 다를지라도 제각기 자신이 경험한 상처로 인해 고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상처는 말하자면 어릴 적 받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 학대나 충격적인 상실의 경험들 그리고 커오면서 겪게 된 인간관계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 각자가 받은 고통과 충격으로 인한 내면적 상처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과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삶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우리 내면의 상처는 무엇이며, 이 상처는 어떻게 궁극적으로 치유될 수 있을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창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의 한명인 ‘요셉’의 삶에 대해 아마도 잘 아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열두아들 중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 중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라헬’에게서 늦은 나이에 태어난 아들이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여기서 요셉과 같이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고도 복된 것이겠지만, 문제는 부모의 사랑이 한 아이에게만 집중되었을 때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그만큼 많은 문제와 상처를 야기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야곱의 가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이 말년에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 요셉을 편애함으로 채색옷을 입히고 애지중지한 만큼, 역설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나머지 아이들은 아버지의 그 부족한 (빼앗긴) 사랑의 양만큼 칼과 창이 되어 그들을 찌름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어린 요셉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면 할수록 형들은 그를 더욱 더 시기하고 미워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형들의 요셉에 대한 미워하는 감정에 결정적으로 기름에 불을 부친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두번에 걸친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먼저 요셉은 첫번째 꿈을 꾸게 되는데, 이렇게 그는 꿈을 그들에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8)라고. 형들이 이 말을 듣고 상당히 기분이 상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그리고 얼마후 요셉은 두번째 꿈을 꾸게 되는데 “내가 또 꿈을 꾼 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창. 37:9)라고 말함으로, 마치 형들이 요셉을 향해 절하게 된다는 식의 요셉의 말에 그들은 이제 극도로 요셉을 미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날, 형들이 세겜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로 심부름을 보냈고, 그가 찾아 갔을 때 형들이 그를 멀리서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19)라고 비꼬듯 말하며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결국 그를 죽이는 대신 어떤 이스마엘 족속의 상인에게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 넘깁니다 (창. 37:27~28). 그리하여 이때부터 요셉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시작됩니다. 저는 물론 이 시간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전 인생을 다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요셉이 경험한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어 갔던 그 충격과 상처를,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편애의 피해자였던 형들의 상처가 어떻게 치유함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은 23여년가량 지납니다. 성도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요셉은 상인들에 의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갔으나, 그 집에서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하여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받고, 그 집 제반을 관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용모에 반해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그것을 그가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고자 했다’고 그 남편에게 거짓누명을 씌움으로 억울하게 요셉은 감옥에 가게 됩니다 (창.39장). 그러나 요셉은 그 감옥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옥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형통하게 되었고, 감옥에서 2년가량을 인내하며 지내다가 결정적으로 바로왕이 꾼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애굽의 총리로 등극합니다 (창. 40~41장).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주신 두번의 겹치는 꿈을 통해, ‘7년 대풍년’후의 ‘7년 대흉년’이 올 것을 예언하신 것을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해석하게 되자, 바로왕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한 요셉을 총리로 등용했습니다. 그리하여 7년의 대풍년동안 거둬들인 막대한 곡식을 최대한도로 저장함으로 다가올 7년 대흉년을 지혜롭게 대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형들이 요셉을 판지 20여년이 지난 후,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상상할 수 없는 고위관직에 등용된 이후에 형들과의 상봉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스럽게 극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 온 천하에 흉년이 시작되었음으로 가나안 땅에 살던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도 흉년의 고통이 심해졌을 때 급기야 야곱은 아들들에게 양식이 풍부한 애굽에 가서 사올 것을 명합니다. 이제 저는 형들을 만나는 과정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면서 어떻게 요셉은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었을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입니다: 사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인물 중 요셉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삶 자체가 파란만장하냐 아니냐라는 것보다도 더 관심가지고 볼 점은, 요셉이 젊은 시절 겪었던 대부분의 사건들이 너무도 어처구니 없고 억울하다는 점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철모르고 꿈을 얘기함으로 형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노예로 팔아 넘기는 형들의 행동은 너무도 잔인하고 악한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받았을 충격과 절망감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어땠을지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는 근면과 성실을 다해 일했고, 그리하여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집안 모든 제반업무를 총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잠시 살펴봤듯이, 성적으로 문란한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몇번씩이나 준수한 요셉을 집요하게 유혹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거역)하리이까” (창.39:9)라고. 요셉의 이런 고백에서 알수 있는 것은, 그의 모든 삶의 동기는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내와의 불륜은 당연히 육신의 상전인 보디발에 대한 배신이겠지만, 이런 불륜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주인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것임을 요셉은 확신했기에 범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요셉이 그녀를 거부하자 이것에 앙심을 품고, 도리어 그가 자신을 겁탈하고자 했다고 남편에게 거짓 누명을 씌움으로 요셉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상황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온 힘을 다 쓰는데, 왜 돌아오는 것은 억울한 옥살이 입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요셉이라고 왜 낙심과 좌절의 순간이 없었을 것이고, 세상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요셉이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모든 부정적이고 원망스런 상황을 이겨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비록 그 당면한 순간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을찌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했기에 자신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갔을 때에도, 그리고 주인의 악한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할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신뢰함으로, 있는 그곳에서, 주어진 상황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요셉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 곧 깊은 신뢰와 사랑이 그가 받았던 그 모진 세월의 아픔과 상처를 이겨내고 치유받을 수 있었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날마다 그와 동행하여 주셨고, 상처를 치료하여 주셨으며, 부모와 형제와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진정한 위로와 사랑으로 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깨닫음”으로써 입니다: 요셉은 어린 소년시절에서 시작되어 20여년의 긴 고난과 훈련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당시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극적으로 형들과 상봉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42장> 이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아버지 야곱의 명대로 애굽에 왔고, 요셉이 총리가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형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양식을 사고자 합니다. 그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창. 42:6~9)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다시 형들을 만나서 그들의 절을 받게 되었을 때, 그가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꿈”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어릴 적 꾼 꿈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형들로부터 절을 받고 나서 자신이 꾼 꿈, 즉 ‘자기 짚단을 향해 형들의 짚단이 절했던 꿈’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를 향해 절하는 꿈’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꿈이 성취되었음을 자신이 깨닫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단순히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 자체를 즐기고 만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꿈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가 깨닫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v.5,7)

요셉이 주장하는 요지는 ‘저는 지난 세월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리게 된 이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크신 섭리하심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형들이 자신을 팔지 않았다면 역설적으로 자신은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형들 가족을 포함한 세상의 수많은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v.8)고 요셉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얼마이든지 간에 이 지나온 시간 가운데 경험한 모든 것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우연은 없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연약과 실수와 상처까지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며, 그럼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 안에서 여러분과 저의 모든 아픔과 상처는 도리어 그분의 선한 도구가 되어 아름답게 쓰임 받게 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비로소 완벽하게 우리의 상처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형들을 용서함”으로써 입니다: 사실 이런 ‘상처와 치유’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 상처의 고통에서 회복될 수 있는 근본적인 길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신앙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내게 상처준 그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내 자신을 그 불행한 기억과 상처로부터 자유케 되는 최선의 길’임을 알지만, 실제로는 ‘그 상처가 아묾만 하면 다시 그 아픈 기억을 소환하여 상처를 헤집고, 나에게 상처를 준 그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하며 끝까지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상처’의 고통은 없어지지 않고,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요셉은 지난 시절의 모든 고난과 상처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이해했기에, 형들을 도리어 다독여주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v.5)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서 일부러 형들을 도둑으로 누명을 씌우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는 과정속에서 형들 마음 깊숙이 있는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꺼집어 내게 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뉘우치게 도와 줌으로 형들을 용서했고, 이 과정속에서 형들 또한 사랑받지 못한 상처도 함께 치유하도록 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된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주기도문’에서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2) 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용서’에 대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우리를 향한 분명한 도전은 ‘만약 하나님 아버지께 죄 용서함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너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나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기 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요 그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요셉을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묘사합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면서도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과 ‘그가 겪은 고난과 상처가 도리어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바로 죄 없으신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많은 질고와 고난을 겪으시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명을 내어 놓으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생명을 누리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에 이사야가 이와 같이 오실 메시야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라고. 우리가 예수님의 그 상상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난을 대신 질수는 없고, 요셉과 같은 그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그대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할찌라도, 우리 각자가 경험한 아픔과 상처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신앙공동체와 이웃과 세상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축복된 통로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최근에 들은 한마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저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고, ‘그 많은 역경을 거쳤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어떤 사람의 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고난 가운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라고. 이렇게 욥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 같은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그분의 내 인생을 향한 선하신 뜻을 더욱 더 깨닫아가고, 그리 인해 나의 모든 고난과 상처가 치유함을 받고 나에게 상처준 그 영혼을 주안에서 용서함으로 그 많은 아픔과 상처가 변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를 맺고, 세상을 살리는 주님의 축복된 제자들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