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았느냐”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성령을 받았느냐”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6-23-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9:1~3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While Apollos was at Corinth, Paul took the road through the interior and arrived at Ephesus. There he found some disciples)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So Paul asked, “Then what baptism did you receive?” “John’s baptism,” they replied.)
[설교 요약]
지난 시간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의 ‘고린도사역’을 중심으로 <2차선교여행>을 마무리했음을 살펴보았고, <18장>후반부의 <23절>부터 <3차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이제 <사도행전 19장>은 시작하면서 <아볼로>라는 한 인물을 주목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v.1)라고. 그리고 그가 누군지에 대해 앞장 <18:24-25>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로써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쳤지만, 요한의 침례만을 아는 자’라고 이미 설명합니다.
다만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인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성도들을 그동안 가르쳤기에, 그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곳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문제가 있음을 바울은 그들과 교제 가운데 알아 차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19:2a) 물었고,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19:2b)고 답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12명의 제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성령의 은사를 그들이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과연 무엇이 성령을 받았다는 뜻인지?” 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오직 ‘구원받은 자만이 성령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성령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았다면, 우리 각자는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성령을 좇아 그분의 다스림을 받게 될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곧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라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갈.5:22-23).
바라기는 성령님의 충만하신 다스림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향해 주님 만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운 아들과 딸로 성장해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복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평상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고 확신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영 성령과의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 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절대적인 사역’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8장>에서 <2차선교여행>을 마무리했음을 우리는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정정드리면) <18장22절>에서 <2차선교여행>이 마무리되고, <18장23절>부터가 바울의 새로운 <3차선교여행>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23절>부터 그의 3번째 선교여행을 시작하며, 먼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앞선 ‘1 &2차 선교여행’ 과정에서 복음으로 낳은 모든 제자들을 믿음으로 굳게 하였음을 마지막절 <2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v.24). 그리고 나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울의 ‘3차선교여행’은 <19장 1절>의 오늘 말씀에서부터 <21장 14절>까지 이어집니다.
이제 <사도행전 19장>은 시작하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v.1~2)라고. 여기서 우리가 먼저 한가지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은 <아볼로>라는 인물인데,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v.1)라고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이 제 3차선교여행을 시작하는 <행. 18:23> 바로 다음절 <24~28절> 끝절까지 아볼로를 이렇게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행. 18:24-25)라고. 그리고 나서,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진리의 도를 더욱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었고, 그 결과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참된 메시야시요, ‘성령과 불’로 침례 베푸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가 ‘아가야’지방의 수도인 ‘고린도’에 건너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유익을 끼쳤는데, 그 중심되는 이유는 그가 구약성경에 능통할 뿐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깨닫고 이제 힘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유대인의 말을 제압했기 때문이라고 <27~2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말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저의 질문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왜 성경은 <18장 후반절>의 <제 3차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아볼로’라는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주목하여 기록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이유가 아볼로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3차선교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에베소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 관계성이란 곧 아볼로가 에베소지역에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주의 도를 열심히 전했는데, 문제는 그가 ‘요한의 침례’만을 알 따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볼로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에 대해 지극히 초보적이고 제한적인 지식만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침례를 줄 때 단지 침례 요한이 전한 침례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침례를 요한이 주었습니까?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4:17)고 회개의 침례를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침례를 행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그때 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 1:20~23). 그때 사람들이 그에게 따져 묻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베푸느냐” (요. 1:25)라고.
그때 요한이 이렇게 분명히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 1:26-27)라고 말입니다. 침례자 요한이 그렇게 물로 침례를 행한 목적은 바로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준비케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회개의 침례’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한의 침례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아볼로’도 마찬가지로 아마도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에베소에서 그 도를 전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가 전한 진리는 요한이 전한 회개의 메시지까지 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신 구체적인 구원의 복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행. 19장>의 말씀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윗 지방을 다녀 이제 에베소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복음의 가르침을 받기 전에 단지 요한의 회개를 촉구하는 침례와 관련된 매우 제한된 말씀만을 전했기 때문에, 이곳 에베소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문제가 있음을 바울은 그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직감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그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뭔가 부족한 (이상한) 것을 알아 차리고, 이렇게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19:2a)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도들과 성령님과의 관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만큼 성도의 삶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칩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령님의 우리 거듭난 성도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만, 오늘 제가 성도 여러분과 이 성령님에 대해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하는 것은 오늘 사도 바울의 질문이자, 설교제목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사도행전19장>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요한의 침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성경말씀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인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추구해 가는 가운데 기독교의 여러 교단을 초월해서 동의하는 점은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성령충만을 경험하느냐?’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먼저 ‘성령은 별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것이 전부다’라고 이해하는 신학이 있고, ‘그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은 예수 믿고 나서 두번째로 다시 받는 것이다’라는 ‘오순절 성령운동’파라고 하는 그룹들의 신학, 그리고 ‘성령충만은 신자가 된 이후에 주어지는 충만함이지만, 오순절파에서 주장하듯 내가 원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주셔야 받을 수 있다’라고 이해하는 청교도성도들의 신학등이 있음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일부 ‘오순절 성령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이 마치 ‘보시오. 오늘 본문의 에베소 성도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직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고 난 이후에 성령을 별도로 받기 위해 또 다시 구해야만 합니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자 말아야 하는 핵심적인 것 한가지는 오늘 본문의 사건은 기독교회가 형성되는 첫 출발점인 초대교회 형성시기에서 매우 드물게 발견하게 되는 ‘예외적인 성령의 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외적인 경우’라는 뜻은 오늘 본문의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아직까지 올바른 복음의 핵심 즉,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라는 이와 같은 진정한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가 아니라, 다만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침례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사도행전 19장>은 이제 앞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반드시 성령이 임하게 되는 구원의 역사’의 ‘과도기적 시기’ (transitional period)에서 보여주는 성경의 드문 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가지 주목할 점은 사도는 ‘아직까지 요한의 침례’ 밖에 모르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성령인지?’를 신학적으로, 현상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한 것은 간단하면서도 핵심적으로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하고 점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는가?’가 이 질문의 핵심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그동안 아볼로를 통해 구약에 속한 마지막 선지자, 침례자 요한이 말한 ‘오실 메시야’를 회개함과 물 침례로 준비케 하는 말씀만 들었지, 이미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원을 이루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복음은 듣지 못했기에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밝혔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는 것입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만약 우리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함으로 구원받지 못한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질문한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각자 우리의 자신의 믿음 가운데 적용해 볼 점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성령을 받았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캘리포니아 ‘그레이스’교회의 ‘존 맥아더’목사는 오늘 본문의 에베소성도, 12명에 대해 설교하면서 <전환된 믿음>의 한 보기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런 전환된 믿음은 먼저 <9장>에서 ‘청년 사울에서 사도 바울로서의 회심’의 역사, 그리고 조금 전에 살펴본 <18장>의 ‘아볼로’의 복음으로 인한 참된 믿음, 그리고 나서 <19장>에서 ‘에베소의 12제자들’의 온전한 믿음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과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의 이러한 믿음의 변화에서 공통되는 점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이전의 믿음과 이후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바뀌게 되었고, 오직 그분으로 인해 이들 모두는 비로소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심을 주님 자신이 밤에 구원받기 원해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분명히 밝혀 주셨음을 통해서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이 형제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성령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마음의 문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됨으로 구원받았는가?’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형제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1a)고 질문했을 때,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1b)고 대답합니다. 안타깝게도 에베소 형제들에겐 아직 성령의 임하시는 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임과 동시에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상태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 자체가 임하지 않았는데, 무슨 성령의 다스림을 받겠습니까?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는 결코 ‘성령의 다스림’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침례요한이 증언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이심을 밝히 말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고 안수 했을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함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것입니다 (v.4-6).
여기서 저는 한가지 우리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 여러분’에게 이점을 확대해서 적용해보기 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다면, 반드시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고 싶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고 성령과 우리 구원받은 성도와의 관계를 잘 설명합니다. 우리가 비록 성령을 통해 거듭남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지만,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육체에 속한 욕망이 성령께 불순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조차도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께 순종하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기도와 말씀과 인격적 결단을 통해 철저하게 나를 성령께 순복하고,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정.의를 사용하여 선하신 성령님께 자발적이요 인격적으로 다스림을 받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진리와 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우리를 선하게 다스려 가길 것입니다.
셋째,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만약 여러분과 제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긴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제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영생 얻음’에 대한 구원의 확신에서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의 영 성령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맺어주실 ‘풍성한 열매’ 곧 ‘성령의 열매’를 나는 맺어가고 있는지?’를 우리 각자는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5:22-23)라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이 성령의 열매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누리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단순히 ‘성령이 여러분 속에 계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더욱 더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간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 안에서 우리 주께서 약속하신 축복된 삶이요, 풍성한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의 풍성한 통치하심에 순종하는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써 세상과 육신과 악한 영과 싸워 이겨 나가며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구원받은 자의 축복된 삶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충만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향해 주님 만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운 아들과 딸로 성장해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