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7, 2024

“소동이 있었으니” (There Arose A Great Disturbance)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9:23~26
Service Type:

“소동이 있었으니”

(There Arose A Great Disturbance)

7-7-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9:23~26

23 그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About that time there arose a great disturbance about the Way.)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A silversmith named Demetrius, who made silver shrines of Artemis, brought in a lot of business for the craftsmen there.)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He called them together, along with the workers in related trades, and said: “You know, my friends, that we receive a good income from this business.)

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And you see and hear how this fellow Paul has convinced and led astray large numbers of people here in Ephesus and in practically the whole province of Asia. He says that gods made by human hands are no gods at all.)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몇시간에 걸쳐 사도바울의 ‘3차전도여행’ 가운데 ‘에베소교회’에서 행한 선교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주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도권의 권능을 행할 뿐 아니라, 2년동안 매일 <두란노 말씀사역>을 통해 놀라운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행. 19:20).

이런 에베소에서 풍성한 영적 열매를 거둠과 동시에,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복음의 역사에 대적하는 심각한 소동이 벌어짐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에베소에서 ‘아테미’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 필요한 금은장색품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었던 ‘데메드리오’라는 자가 동료업자들과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처단하라고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다행이 이 소요사태는 그 지역 서기관이 이런 집회의 불법성을 그들에게 인식시킴으로 소요는 일단락되었지만, 저는 이 소요사태는 복음역사의 중요한 의미를 시사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베소 소요사태로부터 배울수 있는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복음은 기존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시에서 뿐 아니라,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지역에서 벌어지는 영적 역사는 ‘죄악과 악한 영들’에게 속한 그 사회의 기존질서를 성령의 능력으로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괴되어야 할 핵심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우상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이 나의 내면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것은 ‘내가 먼저 복음으로 내면의 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와졌는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복음의 진리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내 속에 있는 ‘우상’이 제거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롬. 12:2).

바라기는 우리 속에 있는  굳은 마음의 밭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갈아 뒤집어 내 죄를 겸손히 자복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날마다 육신에 속한 정욕을 죽여나감으로, 복음으로 세상의 죄악된 구조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주역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사도바울이 ‘3차전도여행’ 가운데 ‘에베소교회’에서 행한 중대한 선교사역의 변환점에 대해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곧 <말씀사역>인데 ‘두란노서원’에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2년동안이나 날마다 말씀으로 그들을 섬기고 훈련시켰던 사역입니다. 주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도권의 권능을 행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에베소교회’에서 행한 강도 높고 깊은 <두란노 말씀사역>을 통해 놀라운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v.20)고 저자 누가는 기록합니다. 복음의 말씀으로 뿌린 씨앗들이 이제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장> 후반절이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에베소에서 발생한 극심한 소요사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소동은 주의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발생되는 영적 반응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 (행. 17:6)이라고 사도 바울과 제자들을 질책하고 폄하했지만, 어쩌면 이 말 속에 진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이 어지럽고 죄가 관영한 세상을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뒤흔들고 뒤집어 엎는 영적 혁명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 각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각자 되돌아 보고, 어둡고 병든 세상을 복음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뒤흔들어 진리로 새롭게 하는 충성된 주의 증인되시길 기대 합니다.

우리는 먼저 ‘에베소’지역은 지난 시간에도 잠시 살펴본데로, ‘이오니아’주의 수도인 항구도시로써, 당시 로마의 최대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적인 대도시의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에베소는 철학과 예술 그리고 특히 ‘달의 여신’이라는 ‘아데미’여신의 신전이 있었는데 지난번 살펴본 고린도와 같이 신전을 중심으로한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신전’유지에 따르는 은장색업과 같은 <신전 비지니스>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소요사태를 가져온 배경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가장 세련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대도시의 하나요, 문화와 철학 그리고 예술의 중심도시로서 뿐 아니라, 아데미 여신숭배에 따른 깊은 영적 타락과 악한 영에 장악된 죄악된 도성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에베소 도성에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들고 찾아온 한 사람 사도 바울로 인하여 이 큰 도시가 완전히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로인해 큰 소동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전파한 깊고 강력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인함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이 2년간 날마다 주의 말씀,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신실하게 전했을때, 놀라운 영적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마술로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했던 삶이 얼마나 죄악되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헛된 우상숭배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이 결국 이 세상을 주관하는 어둠의 주관자, 악한 영 사단 마귀를 숭배하는 악한 행위임을 이들이 깨닫게 되었을때, 거짓신과의 접신과 주술로써 많은 돈을 벌던 용도로 사용하던 책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두 불살랐던 것입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v. 18-19). 여기서 언급한 그 책 값을 돈으로 계산하면 <은 오만 드라크마> (드라크마; ‘노동자 하루품삯’)쯤 된다고 했는데, 그것을 NLT 영어성경에는 ‘several million dollars’ 곧 ‘수백만 달러’로 번역했고, 한화로는 대략 ‘50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인 것입니다. 이런 막대한 액수에 달하는 책을 이들은 가지고 와서 한대 모아 불살랐습니다. 이로말미암아 주의 말씀은 더욱 힘을 얻고 강력하게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같은 에베소사역을 마무리하고 나서,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작정하고, 남은 자신의 전도사역을 끝까지 비젼 가운데 충성되게 행해나가기를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거기 (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v.21)라고.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이자 뛰어난 선교전략가인 바울은 이제 주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그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까지 복음의 씨를 온전히 뿌리길 굳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벌어지는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소요사태인 것입니다. 이 사태는 ‘데메드리오’라는 에베소의 은장색업자가 선동함으로써 동료업자들과 군중들이 이에 동조함으로 벌어진 소요사태인 것입니다.

그 소요사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데메드리오가 주장하기를 ‘에베소 은장색업자들은 그동안 아데미여신 우상을 조각하고, 신전을 금은등으로 장식하는 일을 통해 많은 부를 누렸는데, 바울이라는 자가 이곳에 갑자기 와서 온통 세상을 요란케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바울의 말로 인해 자신들의 생업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숭배하는 아데미여신도 업신여김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이 바울이라는 자를 가만 두어서는 않된다고 그는 사람들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리했을때, 흥분한 군중들은 2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v.34)라고 소리치며 금방이라도 폭동이 날듯한 살벌한 상황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다행히, 이 소요사태는 에베소를 관할하는 서기장의 냉철하고 지혜로운 조치로 이런 소요사태가 ‘불법집회’임을 밝힘으로써,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키고 그 모임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v.35-41). 그러나 <19장>후반부에 자세히 기록된 에베소 군중들의 소요사태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에베소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의 내면에 흐르는 의미를 살펴보며 우리가 함께 이해하고 적용할 점이 무엇인지를 알아 나가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베소 소요사태로부터 배울수 있는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복음은 기존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저와 함께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해 오셨다면, 주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선포된 곳에서 반드시 벌어지는 2가지 현상을 확인할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주의 말씀이 힘있게 역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자가 날로 늘어나는 교회의 부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복음의 사역을 시기하고 성령을 대적함으로 사도들과 믿는자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방해의 역사’ 또한 어김없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인데, 에베소교회가 사도바울의 표적과 기사로 인한 많은 권능의 역사와 2년동안의 두란노 말씀사역으로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악한 영들의 성령을 거역하고 방해하는 역사 또한 강력하게 벌어짐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에베소시에서 벌어진 놀라운 ‘영적 부흥’과 함께 ‘복음을 대적’하는 영적으로 첨예한 대립의 역사를 보며, 이 소요의 소용돌이를 꿰뚫고 지나가는 핵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는 그 지역과 사람들의 기존질서를 뒤집고 파괴하는 다이나마이터보다도 더 강력한 <복음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역이 어떤 곳인지에 관계없이 이 모두를 꿰뚫고 지나가는 ‘기존질서’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일반화해서 말하면, ‘사회질서’ 혹은 ‘가치관’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 사회의 종교와 문화, 철학과 전통을 따라 형성된 다양한 ‘사회질서와 가치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을 한마디로 ‘우상숭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우상숭배’ (Idolatry)는 사실 오늘 본문처럼 ‘아데미’여신이나, ‘제우스’ 혹은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거짓신들에 대한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요, 더 본질적인 우상숭배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상’(Idol)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대신하는 그것’이 ‘우상’인 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모양의 우상으로 바꿨느니라” (롬. 1:21-23)라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돌이나 나무에 조각하고 새긴 어떤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가야할 관심과 사랑과 영광을 가로채는 그 모든것이 바로 ‘자신의 우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들라면, 부자청년에게 있어서는 ‘그의 많은 재산’이 우상이었고, 사울왕에게는 ‘타인의 시선과 비교의식’이, 그리고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높아진 마음’이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서 보자면, 미국인들의 경우는 한 ‘저널’에서 꼬집어 표현한데로, 보스턴사람들은 ‘지식’ (knowledge)라는 우상, 워싱턴사람들은 ‘권력’ (power)라는 우상, 그리고 뉴욕사람들은 ‘돈’ (money)이라는 우상을 섬긴다고 날카롭게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이 과연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에 에베소사람들은 ‘거짓신들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행한 것인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질서와 가치관의 문제점’ 곧 ‘모든 우상숭배의 허상’이 반드시 드러남으로 기존질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영적 타협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하는 시점이 오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복음으로 그 곳을 영적 분쟁을 일으키고, 기존의 질서가 본질적으로 뒤엎어지고 영적인 소요가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 누리게 되는 온전한 영적 재창조의 역사를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2 Corinthians 5:17)라고,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영적 창조와 질서를 위해, 기존의 헛된 가치관과 우상이 파괴되어져야만 하는  필요불가급한 과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전하는 주의 말씀으로 인해 가정과 친구들과 이웃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복음의 역사에 쓰임받고 있습니까?

둘째, ‘복음이 나의 내면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런 자녀로서 살아온 기간은 얼마나 되셨습니까? 1년입니까? 10년입니까? 아니면 평생입니까? 물론 중요한 것은 이런 기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믿고 거듭나고 난 이후에 내 삶의 내적 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 말씀을 오해없이 듣기 바라는데, 저는 ‘우리가 마음의 변화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은혜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그 자녀에 합당한 삶으로 성숙되어 가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하는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하라” (롬. 12:2)라고.

사도는 지금 세상의 불신자들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마음에 꼭 드는 그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간절한 사랑으로 독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이와같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삶’이 곧 ‘복음으로 인하여 내 삶의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뒤집히고 내 육신에 속한 가치관이 뿌리채 뽑히는 경험을 하는 삶’이요, 여러분은 이런 삶을 경험하고 있는가? 를 저는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본질은 앞에서 말했듯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우상을 깨닫았고, 깨닫았다면 그 우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해 묵고 굳어져버린 잘못 형성된 가치관과 생활습관을 이해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잘못된 굳은 마음의 밭을 갈아 뒤집어 엎을 결심을 했습니까? 저는 물론 압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없애보고자 결심한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이것은 한두번 시도했다고 결코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삶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내가 만약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의 깨우쳐 주심으로 내 죄를 겸손히 자복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심령의 변화로 말미암아 날마다 육신에 속한 정욕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죽여나감으로 주님의 기쁨, 곧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기쁨과 감사와 만족’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도 여러분의 진정한 내적 변화를 삶을 통해, 여러분이 뿌린 생명의 복음으로써 세상은 크게 소동하고, 마침내 놀랍게 변화 되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역사에 귀하게 쓰임받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