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에 매인 바” (Be Bounded with This Chain)
“쇠사슬에 매인 바”
(Be Bounded with This Chain)
9-22-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8:20-22
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For this reason I have asked to see you and talk with you. It is because of the hope of Israel that I am boun with this chain.”)
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이 없느니라 (They replied, “We have not received any letters from Judea concerning you, and none of the brothers who have come from there has reported or said anything bad about you.)
22 이에 우리가 너희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But we want to hear what your views are, for we know that people everywhere are talking against this sect.”)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마지막장 <28장>에 다다랐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성령행전’의 놀라운 역사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시간 <27장>에서 사도 바울과 수백명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광풍을 만나 크나 큰 위기를 만났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 하심으로 사도 바울의 리더쉽을 사용하셔서 배에 탄 사람 모두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전하셨던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작은 섬, ‘멜리데’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28장>이 시작되는데, 바울이 섬의 원주민과 함께 불을 피우다가 독사에게 물렸으나 아무런 해도 받지 않는 사건 (v.2-6), 그리고 바울이 추장 ‘보블리오’의 부친과 섬의 여러 병든 자를 고쳐주는 내용 (v.8-10)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섬에서 3달가량의 겨울을 나고서, 이제 다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수라구사’에서 ‘레기온’을 지나 ‘보디올’과 ‘압비오’ 그리고 ‘삼관’에서는 성도들의 사랑의 영접을 받음으로 더욱 담대한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v.11-15).
이리하여 마침내 바울은 로마에 입성했고, 군사 한명과 따라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v.16). 그리고 며칠 후에 그곳에 사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왜 자신이 로마에 죄수의 몸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고, 그에 대한 반응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17~28절>의 내용입니다. 그는 그 핵심적인 이유를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v.20)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쇠사슬’에 담긴 3가지 역설일까요?” 그것은
첫째, “조건적인 역설”입니다: 누구도 ‘쇠사슬에 매인 죄수’와 같은 악조건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 감으로 감당했던 ‘궁핍과 핍박과 약함’을 통해 도리어 강하게 세우시는 주님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고후.12:9-10).
둘째, “모든 성도가 맞이하는 역설”입니다: 사실 영적 눈을 열고 살펴볼 때, 이런 바울이 감당했던 ‘죄사슬의 삶’은 모든 신실한 성도의 <대가지불>입니다. 성도 각자의 ‘쇠사슬의 매임’과 같은 고통 가운데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림으로 마침내 은혜를 누린 역설의 삶입니다.
셋째, “복음의 역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산이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16)라고.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복음을 들고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고난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강하게 세워 주심을 경험하고 복음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충성된 주의 제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마지막장 <28장>에 다다랐습니다. 우리는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28장을 끝으로 사도행전을 마무리할 것입니다. 작년 ‘9월3일’ 주일에 <사도행전> 첫 설교를 시작한 이후로 만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주의 사도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력으로 증거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행하게 하신 ‘성령의 행하심’ 곧 ‘성령 행전’의 역사를 우리는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공동체 위에도 이런 성령의 충만하신 임하심을 소망하며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남은 <28장> 내용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27장>에서 사도 바울을 포함한 276명의 배를 탄 사람들이 ‘유라굴로’ 태풍 가운데 위기에 처한 고난의 상황을 통해 그 사건의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이 로마로 가던 ‘알렉산드리아’배에 탔던 바울과 모든 사람들이 태풍으로 인해 지중해를 표류하며 겪었던 위기상황에 대해 세세한 내용까지는 다 나누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공동체도 이 배의 선장과 선주와 같이 어리석은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큰 인생의 광풍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고, 역설적으로 이때가 우리 크리스챤이 어둡고 절망적인 인생과 공동체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밝힐 최적의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불행히 배에 탄 사람들이 여러 번의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밤에 바울에게 보내셔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감사하게도 그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반드시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 증거할 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의 손에 맡기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배가 항해를 시작한지 14일 가까이 지중해를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어느 섬에 가까이 가게 되었으나, 배가 육지 가까이 갔을 때 모래언덕에 부딪혀 좌초되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우려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백부장은 바울을 살려줄 생각에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이 물에 먼저 뛰어내려 육지로 가게하고, 남은 사람은 널빤지나 부서진 배의 조각을 의지하게 하여 마침내 모든 사람이 무사히 육지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 28장이 이어집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멜리데/ Malta>라 불리는 섬이었고, 오늘날은 ‘몰타 공화국’에 속한 여러 섬 중에서 가장 큰 섬 <몰타> 섬입니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배에 탔던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구사일생으로 어느 조그마한 섬에 도착했는데, 그 섬이 ‘멜리데’라는 섬이었고 이 섬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동정심이 가득하여 조난당한 3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 준 것입니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며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28:2)라고. 그런데 이때가 차가운 늦가을 (혹은 초겨울)로서 비가 내릴 뿐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추운 바다에 빠져 온 몸이 젖어 추위에 떨고 있었음으로, 섬 주민들이 동정심 가득히 긴급하게 불을 피워 추위에 얼어 있던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단지 손님처럼 원주민들의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난파당한 자들의 실질적 리더답게 주민들을 도와 함께 나뭇가지를 거두어 불에 던져 넣었는데,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떨어진 나뭇가지와 낙옆 사이에서 숨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독사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원주민은 독사가 손을 물은 것은 ‘이 사람이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v.4)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몸이 붓거나, 갑자기 엎드러져 죽지 않자, 이제는 정반대로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이것이 매우 잘못된 생각임을 알리고, 이런 이적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능력임을 밝혔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가 바울과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흘이나 융성한 대접을 했습니다. 그때 마침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 (=풍토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이 가서 그에게 손을 얹어 기도함으로 그를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섬주민들 중 많은 병들 자들이 바울에게 와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또한 기쁨과 감사함으로 바울과 함께 한 자들을 대접했고, 이들이 떠날 때 필요한 물건을 배에 가득 실어 보냈습니다. 이 자그마한 섬, 멜리데는 실로 나그네와 환난 당한 자들을 긍휼이 여기고, 돕는 선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많은 병고침의 역사를 누리고, 틀림없이 바울과 동역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오는 많은 영혼들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렇게 석달을 이 섬에서 겨울을 지난 후에 ‘디오스구로’라는 이름의 ‘머리장식’을 가진 ‘알렉산드리아’배를 타고 이들은 다시 마지막 로마로 향한 항해를 떠났습니다 (v.11). 그리하여 이 배는 이제 ‘수라구사’항에 입항하여 사흘을 머문 후에 ‘레기온’에 들렀다가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그리스도인 성도들’을 만나 그들의 초청으로 일주일을 머물러 교제했다가 이제 드디어 ‘로마’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 수도 ‘로마’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압비오’ 광장 (저자)과 ‘삼관’이라는 마을까지 성도들이 나와서 일행들을 맞이했는데,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큰 위로와 함께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번 로마로 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름도, 성도 알수 없는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을 통해 복음으로 씨를 뿌리게 하시고, 이제 이렇게 태어난 신실한 성도들을 예비하셔서, 자신을 뜨겁게 맞이하게 하셨기에 바울은 실로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드디어 수도 로마에 도착하여 병사 한사람과 함꼐 따로 지내도록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며칠이 지난후에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왜 이곳에 죄수의 몸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로마황제에게 소송할 수밖에 없었는지? 를 설명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유대지도자들의 답변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17~2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말씀 가운데서 사도가 자신이 왜 이런 죄수의 몸으로 로마황제에게 자신의 재판문제를 상소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하며, <20절>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v.20)고 변호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쇠사슬’이라고 의미에 담긴 역설이 매우 큼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쇠사슬’에 담긴 3가지 역설일까요?” 그것은
첫째, “조건적인 역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9장에서 바울이 다메섹 언덕에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이 얼마나 극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의 삶을 살았던가 하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삶이 이처럼 복되고 멋지며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았는지는 한가지 한가지 나열하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삶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33년의 긴 기간동안 변함없이 충성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수 있게 했던 비밀은 역설적으로 <대가지불>의 삶 가운데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대가지불>의 삶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의 대가지불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저는 지난 시간에도 잠깐 나눴지만,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린도성도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3~27)라고.
이와 같이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이처럼 엄청난 고난과 핍박의 삶을 고백하는 이유는 마치 ‘영적 훈장’처럼 은근히 자랑하고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가 굳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희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너희가 알아라!’고 강조함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런 거짓없는 고백을 통해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 가만히 들어왔던 거짓교사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고발함과 동시에 이런 고난 자체가 자신을 충성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지켜 주신 주의 은혜라는 사실을 그가 깨닫았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10)라고.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바울은 예수 믿고 오랜 기간 그분을 증거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생명의 위협을 거쳐왔지만, 지금 와서 되돌아볼 때 그 고난의 시간은 주님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된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주님을 위해 매맞고 능욕당하고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고 여겼던 그 힘들고 어렵고 약했던 순간들이 사실은 주님이 바울을 실로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순간이요,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도로 강하게 세워 주시는 순간임을 그는 깨닫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핍박과 고난 받고, 약할 때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이 충만하게 그에게 머물게 되는’ (고후.12:9) 은혜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지금 그의 손에 매인 쇠사슬이 결코 부끄럽지도 불쾌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손에 묶인 ‘쇠사슬’의 역설이 무엇인지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고 약하고 쇠사슬에 매였을 때 임하시는 주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크신가를 그가 지금껏 놀랍게 경험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수’라는 ‘쇠사슬’에 묶였다는 악조건이 역설적으로 그를 강하게 세워 주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성도가 맞이하는 역설”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경험한 ‘쇠사슬에 묶인 조건의 역설적인 삶’은 사실 우리가 조금만 믿음의 눈을 열어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신실한 성도들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그들의 영적 승리의 열쇠였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예를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창세기12장>에서 보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75세때 ‘복의 근원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후손을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99세가 될 때까지 약속의 아들을 그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그가 부르심을 받은지 25년만인 그의 나이 100세 되던 해에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은 것입니다. 이삭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심으로 농사를 지었을 때 엄청난 소출을 얻고, 목축하던 양과 소떼가 심히 많아지자 함께 살아가던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때 팠던 우물을 흙으로 메웠던 것입니다. 그때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또 우물을 팠고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이삭은 결코 분노하여 그들과 다투지 않고 또 다른 지역에서 평화의 관계를 가질 때까지 우물을 팠던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야곱은 어떠한가요? 그는 외삼촌 라반 집에서 보낸 20년 세월동안 여러 자녀와 수많은 소떼 양떼를 소유로 삼아 고향으로 돌아 가지만, 형 에서를 속인 죄로 형의 복수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형을 만나기 전날 밤 마지막 얍복 강가에서 성경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한가지 사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사건을 벌입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하나님과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구했고, 그는 환도뼈가 부서지는 고통과 상처 가운데서도 마침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참된 복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브라함의 그 긴 세월의 약속을 기다리는 인내는 곧 그의 ‘쇠사슬’이요, 또한 이삭이 몇번씩이나 블레섹 목자와 싸우지 않고 온유하게 계속해서 새 우물을 팔 수 있었던 용기도, 그리고 야곱이 죽을 힘을 다해 얍복 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을 보내 드리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그분의 참된 복을 구하며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쇠사슬’과 같은 <대가지불>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 요셉은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는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고,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2년간 감옥살이를 하는 한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를 신뢰했을 때 가장 이른 나이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가족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에 의해 비참하게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한 많은 세월이 정말이지 자신의 ‘쇠사슬’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의 시기를 거치고 나서 ‘아이를 낳은 여인이, 이전의 해산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의 존귀함과 영예로운 삶으로 요셉에게 갚아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한 ‘쇠사슬에 매인 삶’은 바울 한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신실한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우리가 인내와 소망으로 극복해야 하는 ‘각자의 쇠사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쇠사슬의 고난을 극복한 이후에 누릴 역전의 삶이 너무도 아름답고 축복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음의 역설”입니다: 제가 사도행전 마지막장 28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죄수의 몸>으로, 그리고 <온몸에 쇠사슬>을 두른 모습을 계속해서 역설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을 어떤 분들은 좀 과장한다든지, 혹은 미화해서 말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기독교회사>를 읽어 보신다면, 저의 말을 더 분명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그동안 살펴보면서 알 수 있었듯이,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통해 거듭난 초대교회 성도들은 왕족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평민이나 노예와 천민과 같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별 기대도, 신경 쓰이지도 않는 미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마침내 로마제국은 복음으로 정복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로마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한지 대략 250여년이 지난 AD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이후 계속된 기독교 수난의 역사가 일단락 된 것입니다. 이름도 성도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미미해 보였던 성도들이 품었던 복음의 능력이 마침내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사도 바울이 수도 로마에 살았던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자기 변론과 복음 증거는, 이어지는 내용의 정황으로 본다면 별 성과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졌다)” (행.28:24,25)고 저자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대인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거부는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언했듯이,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됨으로 놀라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시기 나게 함으로 그들이 마침내 마음을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요, 깊고도 넓은 구원의 경륜이심>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그 모든 믿음 뿐 아니라, 우리의 실수와 실패 그리고 굳어지고 순종치 않는 마음까지도 사용하셔서 복음의 진보를 이루어 가시고, 구원을 완성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요, 복음의 역설인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다시 말해, ‘왜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1:16)라고 말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를 믿을 때 죄 씻음 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쇠사슬에 매인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권능으로 임하는 복음의 역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쇠사슬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은 그 원치 않는 쇠사슬의 역설을 통해 도리어 여러분을 강건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주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까지 바울에게 임했던 그 ‘쇠사슬에 매인 주님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을 더욱 더 깨닫고 복음의 참된 증인으로 세워지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