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과 종교인” (Believer vs Religious Person)
“신앙인과 종교인”
(Believer vs Religious Person)
12-1-24
본문말씀: 요한복음 (John) 4:23~24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설교 요약]
저는 오늘 주님의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신앙인’과 ‘종교인’의 삶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지역 수가성 여인과의 만나시는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그녀와의 대화 가운데 ‘그녀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다’ (v.17-18)고 그녀 인생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인은 주님을 ‘선지자’ (v.19)고 인식합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무엇이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배로 하나님을 추구하는지?’ 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깨닫고 나서, <예배>에 대해 묻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참된 예배’ 곧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를 목말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v.24)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들’ (시간, 장소, 방법, 전통 등)에 언제나 마음이 빼았겼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소망하는지?’ 입니다: 주께서 <예배의 본질>에 대해 그녀에게 가르쳐 주셨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두번째 대화의 ‘주제’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v. 25)라고. 이때 주님은 그녀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v. 26)고 자신을 밝히셨고, 그녀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말씀은 무슨 뜻인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을 증거하는지?’ 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깨닫았을 때 ‘즉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v.29)라고.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 믿으세요!’라는 외적인 전도 이전에 ‘먼저 삶의 변화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죄 용서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깨닫을 때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향유 옥합’을 주께 부어드린 여인처럼 (눅. 7장) 변화된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유대종교지도자와 같이 형식화된 종교적 껍질을 벗어버리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서 받으실 산제사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햇빛이 내리 쬐는 어느날 유대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제자들과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가지 다른 대부분의 유대인과 전혀 다른 경로를 택하였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지역’을 곧장 통과해 갈릴리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남쪽 유다지역에서 북부 갈릴리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이 이 길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지름길을 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대신 이들은 우측에 있는 요단강 건너편의 ‘베레아’지역을 택하여 빙돌아 가는 우회로로 갔던 것은 오랜 기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인들’과 ‘남유다’백성들 간의 갈등과 반목의 골이 깊어지고, 급기야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혼혈정책으로 인해 이스라엘민족의 순수성이 사라지게 되자, 남유다 백성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능멸했고, 마치 개처럼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상종하지 않기 위해 가까이 갈수 있는 길도 포기하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곧장 사마리아를 지나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마리아 성에서 그 유명한 스토리인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이런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종교인이라는 상반된 삶과 비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우리 각자의 믿음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예수님의 사마리아지역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은 그녀가 아마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중동의 뜨거운 한낮의 햇살을 맞으며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우물물을 길으러 나오는 가운데 시작됩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물 좀 달라” (v.7)고 먼저 말씀하셨고, 두사람의 대화는 더 깊어집니다. 특별히 그녀는 ‘유대인의 남자’가 왜 사마리아여인인 자기에게 말을 거는지에 대해서 상당한 경계심과 의문을 품고 대꾸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은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실 뿐 아니라, 결정적인 한마디를 하십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전 인생을 꿰뚫어 보는 한마디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그녀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다’ (v.17-18)고 그녀를 수십년 동안 잘 아는 가까운 이웃처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은 그녀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를 상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렇게 그녀의 인생을 다 드러내신 것일까요? 아마도 그녀는 적당히 예의 갖추고 포장해서 대화할 그런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주께서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으로 예수님은 바로 문제의 핵심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예수님께서 밝히신 그녀에 과거를 볼 때,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결코 원치는 않았겠지만 험한 인생을 산 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임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기에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보니 선지자로소이다” (v.19)라고. 그녀는 주께서 한마디로 자신의 전인생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삶을 꿰뚫어 보시는 그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며, ‘이분은 필경 놀라운 권능을 지닌 유대인의 선지자중의 한 명이 아닐까?!’하고 깨닫았다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누가 진정한 신앙인인가?’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그렇다면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과 그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 대조적인 삶을 이해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점일까요?” 그것은
첫째, ‘예배로 하나님을 추구하는지?’가 다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예수님께서 그녀의 지난 세월을 너무도 정확히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녀가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사실과 현재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굳이 이 여인에게 이런 많은 시련과 필경 숨기고 싶었을 것 같은 과거의 아픈 경험들을 정확히 드러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를 부끄럽게 하거나, 창피주시고자 하심 이거나 혹은 자신이 남의 인생을 꿰뚫어 보는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임을 과시하고자 함일까요?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상처가 드러나지 않고는 치료될 수 없듯이, 그녀의 깊숙히 숨겨진 마음의 상처를 주께서 드러내심으로 그 상처를 치유코자 하심이요, 더 나아가 그녀의 과거를 드러내신 그 중심되는 이유엔 그녀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그녀 앞에서 말씀하시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 궁극적으로 자신을 믿어 그녀를 구원코자 원하셨을 것입니다.
과연 주님과의 대화 가운데 그녀는 예수님이 범인이 아님을 직감함으로 그녀의 대화의 주제가 완전히 바뀌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당신은 선지자가 틀림없습니다’라고 주님을 이해하고 나서 이렇게 질문과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v. 20)라고.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이곳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는데, 그렇다면 어느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까? 어느 쪽 예배가 하나님께서 전정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라는 뜻의 질문이 아닐까요? 저는 이런 여인의 갑작스런 대화의 주제가 바뀐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그 이유가 ‘상대방이 대단한 유대종교 지도자이니까, 평소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지금은 뭔가 내가 종교적으로 관심이 많고 경건한 척 보이고자’하여 이 여인이 <예배>를 꺼집어 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평소에 늘 가슴깊이 담아 두었던 궁금함과 간구가 있었다고 저는 추측해 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은 ‘우리 사마리아인들’ 혹은 ‘당신네들 유대인들’ 중 어느 예배 (제사)를 인정하십니까?>라는 질문이요, 이것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질문에 대한 그 놀라운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v.23~24)라고 말입니다. 이런 여인과 주님의 예배에 대한 대화를 통해 제가 이해하게 되는 진리는 진정한 신앙인은 그 무엇보다도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 자신이 소속된 종파가 왜 정당하고 그들의 정한 규칙 (규례)이 왜 전통적인 것인지를 고수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배가 진정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영생의 구원’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요, 예배인지를 겸손히 되돌아보며, 그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나의 생각과 삶을 수정하고 순종하고자 추구하는 자가 신앙인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마리아 여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정한 예배’를 추구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거기에 비해, 북 이스라엘과 남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그리심 산 성전’과 ‘예루살렘성전’의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고, 성전 제사의 방법과 예법에 온 신경을 다 솟았지만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제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큐티나눔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형식만 남은 종교인들이 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선언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예배의 형식적인 외형만을 고집하며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가 아닐까요? 또한,
둘째, ‘그리스도를 소망하는지?’가 다릅니다: 이런 오늘 본문의 <예배의 본질>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사마리아여인의 두번째 대화의 ‘주제’로 넘어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이 이름모를 한 사마리아 여인은 정숙하고 신앙심 깊은 삶을 살아왔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반면에 삶의 많은 질고와 풍파를 경험한 여인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힘들고 험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를 추측해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그녀의 반응일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v.24)는 가르침에 대해 이제 물흐르듯 이렇게 반응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v. 25)라고 말입니다.
이런 그녀의 말에서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간절히 기다렸던 존재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구원자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녀가 지금 주장하는 핵심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과연 누구의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라고 그녀가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럼으로 우리 인간은 각자 자신이 믿고 싶은데로 믿고, 행하고 싶은데로 행동하지만, 그녀가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실 것임을 자신은 분명히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이런 놀라운 대답을 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v. 26)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원을 주시는 메시야’를 찾는 그 누구에게나 자신이 바로 그분 이심을 결코 숨기지 않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 뿐 아니라 복음서에 보면 구원을 갈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을 밝히 보여 주시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오직 자신을 통해 구원이 주어지며,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갈 수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수많은 유대백성들은 예수님이 정말 구약에서 예언하는 ‘그리스도’인지 다시 말해 예수님 자신이 표현하시는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신지 아닌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통하여 종교적 이익 카르텔을 형성하고, 주님의 자신들을 향한 진리의 말씀을 교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고, 한편 우매한 백성들은 유대전통과 선민의식에 젖어 단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받았다는 것 자체로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이 보장되었다는 철저한 영적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자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깊은 영적 잠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도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고 말입니다. 비록 사마리아 여인은 많은 성경의 지식은 부족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소망했던 마음의 중심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즉시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나 어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많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신 구원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마음은 수많은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계율로 가득 찬 나머지 그 마음에 주님이 들어갈 조금의 틈도 없었던 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삶의 염려와 그 마음에 온갖 잡념으로 가득차서 정작 주님은 내 삶의 주인도 아니요, 동반자도 아니요, 문 밖으로 몰아내고 있지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진정으로 내 안에 주인으로 계시느냐 아니냐가 진정으로 신앙인인가 종교인인가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증거하는지?’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그녀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셨을 때 그녀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기쁘고 흥분해서 즉시 동네로 뛰어가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v.28~29)라고. 여인에게서 배울 점은 자신이 믿는 바는 즉시 행동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우연히 우물가에서 만난 한 젊은 유대인 남자가 놀랍게도 바로 ‘그리스도’되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결코 뜸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물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마을로 뛰어 들어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v.29)고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누가복음 7장>을 찾아보면 또 한 명의 여인을 만나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 여인은 유대인들이 소위 ‘죄인’이라고 불렀던 ‘윤락여성’ (몸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 7:36~50>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께서 ‘시몬’이라는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 여성은 비록 그 집에 초대받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이전에 정확히 언제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은혜와 죄 용서함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께 받은 은혜와 용서에 감격하여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로 닦고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주께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이런 그녀의 행동을 바리새인 시몬은 음란한 동기로 오해했지만, 주님은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7)고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를 밝혀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이런 여인의 행동 동기는 ‘주님께 받은 사랑이 많음이요, 죄 용서함 받은 감격이 크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점은, 주님은 마치 ‘어떤 사람은 주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은 더 큰 용서를 받았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 받았다면, 우리 모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받고, 갚을 길 없는 크나큰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 더 사랑을 받고, 누가 덜 받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더 사랑하고, 죄 용서함을 적게 받은 자가 적게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심에는 강한 역설과 도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주님의 죄 용서해 주심의 은혜와 영생을 베풀어 주신 놀라운 사랑을 만약 우리가 깨닫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더욱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원의 감격과 그 은혜가 얼마나 크나 큰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주님을 향한 사랑도 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몬처럼 적당히 하는 시늉만 내고, 주님을 위해 자기 집에 들어오실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주님께 입맞춤도 하지 않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에 늘 인색하고 냉냉하고 계산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사마리아여인처럼 뛰어나가 주님을 기쁨과 확신으로 증거하는 일은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끔 교회에서 ‘교인 총동원 전도행사’로 행하면 마지 못해 전도하는 식이 전부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마리아여인과 그리고 누가복음의 여인과 같이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은혜로 인하여 그분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이런 자발적인 증인된 ‘신앙인’의 삶이 소위 오늘날 ‘선데이 크리스챤’이라 불리는 ‘종교적인 크리스챤’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v.24)라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시간과 장소, 형식과 전통과 자기확신과 기준에 관계없이 언제나 중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언제나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림을 기뻐 받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유대종교지도자와 같이 종교화 되고 형식화 삶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비록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 날마다 중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복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