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5, 2025

“심령이 가난한 자” (The Poor In Spirit)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1~3
Service Type:

“심령이 가난한 자”

(The   Power In Spirit)

1-5-24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1~3

1 예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Now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2 입을 열어 가라사대 (and He began to teach them. He said:)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설교 요약]

          2025년 새해를 맞아 성도 여러분과 가정 모두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주부터 예수님의 <산상수훈>말씀으로 함께 은혜의 시간 갖고자 합니다.

오늘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하는데, 먼저 <마태복음 5~7장>에 거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산상수훈> (山上垂訓)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께서 ~ 산에 올라가 ~ 입을 열어 가라사대” (v.1,2)라고 말씀처럼,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심’이란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고, <천국시민의 대헌장>, <인간윤리의 황금률>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이런 산상수훈은 ‘천국시민의 삶을 간명하면서도 심오하게 선언한 말씀으로써, 이런 ‘천국헌장’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는 자요, 진정한 복된 자임을 주님께서 도전하신 말씀’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살펴보자면,

  • <5장>을 시작하면서 “팔 복” (1-12); “세상의 빛과 소금” (13-16); 하나님 나라의 의” (17-48)
  • <6장>에서 ‘구제, 기도, 금식, 물질관’과 같은 “천국시민의 기본생활” (1-34)
  • <7장>에서는 “성도의 삶의 원리” (1-12); “생명의 길” (13-29)

이라고 간추리게 됩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본문말씀에서 무엇이 예수님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욕심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의미는, 주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려움’ (마.19:24)을 경고하셨듯이 ‘부자가 물질에 탐욕을 부리듯’하지 않고, ‘빈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 입니다.

둘째, ‘갈급하다’는 뜻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는 그 가난한 심령으로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만이 주실 수 있는 <죄사함과 영생>의 은혜를 갈급히 구했기 때문이요, 그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 (v.3) 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요하지 않고, 가난한 심령이 되었다’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요하다’는 뜻입니다 (눅. 19-21). 자신의 계획과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고 감사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제 새해를 가난한 심령이 되어 세상의 헛된 유혹에는 빈 마음 되고, 하나님께는 부유함으로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의 나라와 그의 의를 날마다 추구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아 성도 여러분과 가정에 하나님의 복되신 은혜가 넘치는 한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올해가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서기 2,000년을 시작하며 ‘밀레니엄’ (Millennuim) 새 천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세계가 흥분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사반세기’, 곧 ‘25년’이 지났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오늘 예배 참석한 청년들 중에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적으로 또 한 해가 시작되었고, 육체적인 나이가 한 살 더 먹는다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이 새로운 한 해를 그분의 생명과 말씀과 함께 시작하고, 허락하신 이 한 해를 보내며 진정한 감사와 귀한 열매로 이번 해를 마무리 할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이번 주부터 <마태복음 5~7장>에 걸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함께 깨닫음과 은혜의 시간 갖기 원합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산상수훈’의 말씀을 강해설교로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마침 새로운 한 해를 열며, 이번 기회에 이 말씀을 나누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모쪼록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한 시간되기 기대합니다.

오늘은 <산상수훈>메시지 첫번째 시간으로서 ‘서론’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먼저 주님의 ‘산상수훈’에 관련한 그 의미와 배경을 설명하고, 그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첫번째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v.3)라는 말씀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마태복음 5~7장>에 거친 이 긴 설교말씀을 <산상수훈> (山上垂訓)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 산에 올라가” (v.1)라고 표현되어진 것, 다시 말해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심’이란 뜻에서 ‘산상수훈’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의 여러 다른 말씀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주장합니다. 특별히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요약>, <천국시민의 대헌장>, <윤리의 황금률> (The golden rule of morality), 그리고 <성경중의 성경>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으로서,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기초이며, 대헌장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헌법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하나님나라의 시민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나가고, 어떻게 우리가 속해 있는 천국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쫓아 기쁨과 자원하는 심령으로 이 온전하신 법에 순종하여 아름답게 성취시켜 나갈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천국시민의 삶을 간명하면서도 심오하게 선언한 말씀으로써, 이런 ‘천국헌장’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는 자요, 진정한 복된 자’임을 주님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산상수훈’을 큰 그림에서 내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1-12절>에서는 ‘팔 복’ (The Beatitudes)을 통해 천국시민의 특징과 그 복이 무엇인지’를 주께서 선언하시고, 이어지는 <5장13-16절>에서는 ‘천국시민의 참모습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밝히셨고, 그리고 <5장17-48절>인 <끝절>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6장1-34절>에서는 ‘천국시민의 기본생활’, 즉 [구제/기도/금식/재물관/믿음의 확신/ 이웃에 대한 태도]에 대한’ 영적 가르침을 주시며, 마지막 <7장>에서는 먼저 <1-12절>에서 ‘<성도의 삶의 원리>에 무엇이며, 그리고 이어지는 <13-29절>에서는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놀라운 말씀의 진리와 권세로써 주께서 말씀하신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산상수훈에서 주께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팔복’의 첫번째 복에 대해 오늘 남은 시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무엇이 예수님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욕심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하셨을 때, ‘가난하다’는 <개념>이 사실 그 당시의 전통적인 가치관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당시의 가치관에서는 ‘매우 생소하고 혁명적으로 까지 다가오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봤을 때 <‘가난하다’는 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다>라고 그들은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돈/물질’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시며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 19:24)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이 심히 놀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인데, 이런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 가는 것보다 어렵다면, 도데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5)라고 주님의 말씀에 놀라고 혼돈스러워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물질숭배’사상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첫 사람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속에서는 한결같이, 아니 더욱 더 팽배해지고 있다고 제가 말씀드린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듯이 ‘가난한 자들은 작은 나눔과 선물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허세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사실은 ‘부자로 살면서도 작은 것에 감사하며 겸손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면서도 허세부리고 살아가는 한심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나머지 7가지 복’인 ‘이러이러한 자는 ~ 복이 있나니’라는 <4~12절>말씀 전체를 포함하고 상징하는 말씀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난하다’는 말씀 속에 상징되는 ‘’욕심부리지 않는/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한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주시기 원하는 자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소유한 자는 필연적으로 ‘애통한 마음’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깨끗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마음’으로 확장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처럼 ‘작은 것에 만족하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입니까?

둘째, ‘갈급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살아가던 그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범한 목동이었던 ‘아모스’라는 한 목동을 세우셔서 장차 이스라엘민족이 겪게 될 극심한 고난과 고통을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영적 가르침은 ‘무엇이 우리 인간이 가장 참기 힘든 ‘목마름’이며,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 ‘굶주림’인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목마름’ (spiritual thirsty)이요, ‘영적 굶주림’ (spiritual famine)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결핍’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주님의 말씀을 두고, 수많은 성경학자들이 저마다 그 말씀의 의미를 해석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주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누리게 될 최종적 상태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상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이 저의 것이다” (v.3b)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제가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첫번째 복에 대한 선언이 <왜 나머지 모든 복들을 대표하고 통괄하는 구체적인 이유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아니라,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도 또한 그 축복된 이유의 중심에는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마음이 남들보다 좀더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고, 부러울 만큼 남들과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팔복을 누리는 모든 자들이 공통적으로 누리는 축복의 근거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서 주께서 도전하시는 핵심은 ‘가난한 자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간절히 구하듯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갈급히 구하고 간절히 추구하는 자들이요,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들 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난한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 (벧전. 2:2-3)을 갓난 아이와 같이 간절히 구하고 사모하십니까?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 나가기를 추구하는 자인지를 각자 확인해 보는 것이 오늘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마지막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셋째,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해 보신다면, 얼마나 많은 비유와 함께 ‘역설’ (paradox)로 이어지는지 놀라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고, 그것을 보관할 곡식창고가 부족함으로 속으로 생각하기를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더 많은 곡식을 쌓아 두리라’ 그리고 “내 영혼아 ~ 곡식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눅. 12:19)라고 스스로 만족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향해 이렇게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라고.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고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깨닫게 되는 것은 ‘스스로 부요한 사람’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은 정반대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부자를 어리석다고 평가하시는 이유는 단지 그가 돈이 많고 곡식 창고를 더 크게 지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의지하고 만족하는 핵심 (근거)이 단지 ‘돈/물질’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가르치심의 그 밑바닥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하냐’ 혹은 ‘부자냐’가 질문의 초점이 아니라, ‘스스로 부요하느냐?’ 즉 ‘스스로 세운 계획과 자기만족에 빠져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인색하게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부요하느냐?’ 즉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구원의 은혜를 깨닫아 나감으로 하나님을 향한 풍성한 감사와 사랑이 넘쳐나느냐?’가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의 결과는 ‘천국’이라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난한 심령’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함으로, 그분의 생명 되신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갈급한 심령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갈급한 심령의 최종적인 상태는 어떠할 것인지를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가운데 약속하신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수’를 날마다 누리는 상태라고 믿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속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계획과 자기 야망으로 이미 배부르고 만족하는 자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오직 예수님의 약속하신 참된 음료, 그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간절히 구함으로, 그분의 영 성령을 통해 마침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성령충만한 능력’(요. 7:38-39)을 경험하고 그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누리는 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새로운 2025년 한 해가 밝았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새로운 1년365일을 허락하셨습니다. 더 받은 자도 없고, 덜 받은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어진 기회의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사용할 것인가는 사람마다 전혀 다름을 우리는 압니다. 바라기는 우리 앞에 다가온 일년을 낭비하지 않고 아름다운 열매로 거두어들이는 지혜로운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시민답게 겸손하고 진실함으로 온 힘을 다해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기를 간절히 추구함으로써 주의 영 성령을 통해 날마다 기쁨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강을 누려 나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