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2, 2025

“애통하는 자” (One Who Mourns)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5:4
Service Type:

“애통하는 자”

(One Who Mourns)

1-12-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4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설교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 주님의 ‘산상수훈’ 첫 시간으로써, 서론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7장>에 걸치는 긴 설교 말씀인데, 그 말씀이 시작되는 ‘팔복’ (the Beatitudes)의 첫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팔복’의 그 두번째 시간으로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고자 합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v.4)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무엇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죄 용서를 받은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1-2)라고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아의 사역’을 선포하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그분께 회개로 나아오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죄 씻음 받음의 크나큰 기쁨과 위로’ (시. 32:1)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죄를 슬퍼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라고 <‘2가지’의 슬픔>을 언급합니다. 핵심은 ‘육신적인 근심’은 ‘절망과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곧 ‘죄를 미워하고 애통해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시민된 성도는 언제나 ‘육신 가운데 거하는 죄에 대해 슬퍼함’으로서 하나님의 사하여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과 함께 우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로마서12장>에서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제사의 삶을 살 것인가?’를 밝히면서, 그 구체적인 적용의 하나로써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라 가르칩니다. 첫째, 주께서 하나로 맺어 주신 신앙공동체 안에서, 둘째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믿지 않는 이웃들의 고통과 아픔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산 제사’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과 이웃’의 죄와 허물로 인해 애통하지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죄사함과 위로를 누리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지난 시간 신년 첫 말씀으로 주님의 ‘산상수훈’의 서론 메시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7장>에 걸치는 긴 설교말씀, 곧 ‘산에 오르사 입을 열어 가르친 말씀’임을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산상수훈은 <천국시민의 대헌장>이라 불리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진정으로 그 천국의 기쁨과 생명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가 주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도전하시는 핵심이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시민의 대헌장’과 같은 이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들을 뿐 아니라, 이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며 깨닫아 나가고 적용해 나감으로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임한 천국을 지금 이 곳에서부터 누려 나가게 되는 것이요, 이런 자가 진정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천국시민은 어떤 자인가?’로 요약되는 산상수훈의 말씀이 첫 시작되는 ‘팔복’ 즉 ‘여덟까지 복’으로 주님은 그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시간, 첫 시간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된 자인가?’>에 대해 살펴보았고, 오늘은 둘째시간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v.4)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난시간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v.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요?’ 왜냐하면, 그는 ‘욕심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적지 않은 부자들처럼 물욕을 부리지 않고, 또한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처럼 끊임없이 경쟁하고 집착하고 육신적인 소욕을 부등켜 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음을 비우고 겸손히 낮아진 자가 가난한 자요, 복된 자입니다. 또한 그는 ‘갈급한 자’라고 했습니다. 육신과 세상에 대해서는 빈마음이요 가난한 마음이지만,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는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듯 갈급히 구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런 영적으로 갈급한 자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난한 심령을 소유한 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가난’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한 자임을 결론적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부어 주실 충만한 은혜를 소망하며, 날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심령이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요, 이런 심령 속에 ‘천국은 이미 충만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두번째 ‘팔복’인 ‘애통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v.4)라고.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죄 용서를 받은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는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나서, 이제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번째 사건이 갈릴리 회당에서 말씀으로 가르치셨던 사역임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규례를 따라 성경을 읽으셨는데, 그 성경말씀이 구약의 <이사야 61장 1~2절>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 61:1)고 시작하고 나서, <2절>에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 (보복)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2)라고 이어집니다.

과거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지난날의 죄악을 미워하고 애통함을 통해 하나님께 참회함으로써 죄 용서하심을 받고 때가 되었을 때 구원의 해가 도래함을 선포했듯이, 이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로서 행하실 사역이 바로 이 예언의 성취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해 주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를 놓아주며, 슬프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허락하시는 것’이 메시아 되신 자신의 사역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읽어 주시고 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고 놀라운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그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의 겪게 된 마음의 고통과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에 대하여)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시. 32:3-4)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죄를 고백했을 때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5)라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라는 진정한 복을 다윗이 노래(고백)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그 죄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죄 용서하심과 그 깨끗하게 씻어 주신 영혼 가운데 허락하시는 위로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으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복으로 나아가는 심령들을 향해 ‘이사야’가 ‘모든 슬픈 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예언했듯이, 이제 때가 되어 우리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애통하는 자’가 복된 이유는 이처럼 ‘죄 용서’함을 받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과 이웃을 향해 그 애통은 더욱 깊어집니다.

둘째, “죄를 슬퍼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행했던 잘못에 대해 근심하고 회개한 것에 대해 두번째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을 칭찬하며 이렇게 격려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라고. 사실 이 말이 얼마나 사실에 잘 부합한 것인가는 우리가 조금만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잠시 살펴본 것처럼, 다윗은 한때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숨기고 없었던 것처럼 감추려 했을 때 마음속의 말할 수 없는 죄의식과 고통으로 심히 괴로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허물을 고백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께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주홍같이 붉은 죄도 흰 눈처럼 희게 씻어 주시는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인데, 그 이유는 ‘회개를 통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으로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반해, 성경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간적인 후회와 근심을 통해 불행한 종말을 맞았던 몇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저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과 예수님의 12제자중 한 명이었던 <가룟 유다>를 들 수 입니다. 먼저 ‘사울 왕’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뜻’보다도 더 우선시하고 두려워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다윗’과의 끊임없는 ‘비교의식’에 빠져 자신을 ‘열등의식’과 ‘불타오르는 질투심’의 노예로 빠트렸던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통해 몇 번씩이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회개로 나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마지막 블레셋 전투 (삼상. 31장)에서 자신의 세아들과 함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안타깝게도 인간적인 (=세상적인) 근심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회개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알듯이 ‘가룟 유다’의 경우도 대등소의 합니다. 여러 신학자들에 따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것은 단순히 돈에 욕심이 났다는 것 보다도, ‘가룟 유다’의 출신에 기인한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는 ‘열심당원’으로서 그 당시 ‘무장봉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무력혁명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께서 행하신 메시아의 권능과 하나님나라의 선포를 보면서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이스라엘이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장혁명’과는 점점 더 멀어진 ‘자신의 죽음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을 주심으로 유다는 실망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는 자신이 한 행동에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신이 주님을 판 돈을 도로 가지고 대제사장에게 갔고, 결국 그 돈을 던져두고 나가 목메달아 자결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인간적인 후회와 근심에 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근심을 했을 때 안타깝게도 ‘사망에 이르게 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적 (육신적) 근심’은 이처럼 정반대로 결과를 가져올까요? 그 차이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만이 하나님의 용서와 그로인한 진정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처럼 세상적인 관점으로 근심할 때 남는 것은 절망과 죽음이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방법데로 행한 근심은 참된 ‘위로와 회복과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과 함께 우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왜 애통하는 자가 복된지?’에 대해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로마서>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우리 구원받은 자녀’의 축복된 신분을 영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인가를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가 밝히듯 “~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는 것처럼,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며, 변화를 받는 삶’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라고. 저는 사도가 성도의 영적 성숙의 실천에 있어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라고 도전한 것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이 도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내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고, 주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되게 하신 영적 공동체 형제 자매의 유익에 관심가지고 사랑으로 섬겨야 된다’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머리가 둘이고, 몸은 하나인 아이>가 나오는데, 이 아이를 한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두명으로 볼 것인가? 에 대한 판단기준에 대해 이렇게 지혜롭게 조언합니다. “만약 한쪽 아이의 머리에 뜨거운 물을 튀겨서 그 아이가 우는데, 다른 쪽 아이는 아무렇치도 않는다면 이 아이는 한 명이 아니라 두명이고, 반대로 옆의 아이도 같이 놀라 울면 이들은 한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둘은 고통도, 슬픔도, 그리고 기쁨과 영광도 함께 나누고 한 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첫째, 주께서 영적 한 몸으로 맺어주신 ‘영적 공동체’인 성도들과 함께 기쁨 뿐만 아니라, 슬픔과 고통도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거듭난 성도의 열매 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런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교회를 너머서서 내가 살아가는 지역공동체와 국가와 온 세상 전체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빛된 자녀로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크리스챤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과 구원이 모든 민족과 열방 가운데 편만하게 성취될 수 있도록,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억압받는 이웃을 돌보고 함께 고통받고 섬김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임을 믿습니다. 이런 이웃을 위해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하여 충만하게 함께 하셔서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그의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오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애통하는 자’입니까?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슬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병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슬픈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참한 사람은 아닙니다. 심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엄숙한 사람은 아닙니다. 위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 참된 기독교인은 삶 속에서 죄와 그 결과를 봅니다. 그리고 그의 전망은 항상 심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리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는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처럼 진정한 애통함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임하는 참된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십니까? 바라기는 겉과 속이 다른 가장된 유쾌함이나 거짓행복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애통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용서를 통해 참으로 행복한 주님의 아들과 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