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지 말라” (Do Not Worry)
“염려하지 말라”
(Do Not Worry)
10-20-24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25-26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이니하냐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ain) (마. 5~7장)의 말씀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말씀 가운데 ‘재물’ (돈)에 대한 ‘천국 시민된 성도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v. 25)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크리스챤들은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본문 앞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고 도전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염려’의 출발은 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재물’을 섬김으로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 줍니다.
둘째, “누구도 염려한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v.27)라고 주님은 반문하십니다. 염려는 전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천부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v. 31-32)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그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선하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인하여 염려하기도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써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 (v. 33-34)를 누려 나가는 성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주님의 ‘천국헌장’ (The Chapter of Heaven)이라고 불리는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ain) (마. 5~7장)에서 주님은 ‘천국시민으로서 마땅히 성도가 지녀야 할 ‘영적이며 윤리적인 본성’ (the spiritual & ethical nature)에 대해 선언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누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합당한 자인가?’를 깊은 감동과 영적 탁월함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 산상수훈의 한부분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v. 25)라고 도전하십니다. 왜 주님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염려가 충만한 이 세상에서 ‘염려하지 말라’라고 도전하시는 것일까요? 과연 ‘염려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왜 염려하지 않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약속된 은혜일까요? 저는 이런 점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경우는 ‘5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1~2)라고 시작하는 말씀은 ‘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와 같이 시작한 첫번째 주제되는 말씀은 ‘산상수훈’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고, 영적인 울림을 주는 <팔복/ Beautitude>이라는 소제목으로 불리는 말씀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마. 5:3-5)라고 계속해서 ‘누가 복이 있는 자’인지를 <12절>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님은 <여덟가지의 복>으로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말씀드려면, 저의 설교를 평소에 귀 기울여 들으시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될 것인데, 그것은 제가 2주전에 ‘시편 1편’의 설교에서 ‘축복된 사람’은 누구인지를 나눈바 있습니다. 마치 <시편 1편>이 구약에서의 ‘축복된 사람’을 정의한 말씀이라면,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말씀은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누가 ‘복된 사람’인지를 정의한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은 ‘팔복’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기에, 다음 시간을 기약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큰 그림에서 ‘산상수훈’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여러 신학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 사랑’ (신.6장)과 ‘이웃 사랑’ (레.19장)이라는 대표적인 명령을 하셨는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신약을 대표할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산상수훈은 “천국시민의 삶을 간명하면서도 심오하게 선언한 말씀인데, 이런 ‘천국헌장’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는 자요, 진정한 복된 자”라고 주께서 밝히셨다고 성경학자들은 주석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해서 살펴보자면, 먼저 <마. 5:1-12>에서는 ‘팔복을 통해 천국시민의 특징과 그 복이 무엇인지’를 주께서 선언하시고, <5:13-16>에서는 ‘천국시민의 참모습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정의’로서 밝히시고, <5장 끝절>인 <48절>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천국시민의 기본생활, 즉 [구제/기도/금식/재물관/믿음의 확신/ 이웃에 대한 태도]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마지막 <7장>에서는 ‘<성도의 삶의 원리> (1-12)와 <생명의 길> (13-29)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전체 가르침에서 볼때는 <천국시민의 실제적 삶의 내용>에 있어서 ‘물질관’에 해당하는 부분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천국시민일진데, 우리 성도의 ‘물질관’은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본질적으로 밝혀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도전하시는 ‘문제제기’이자, ‘설교제목’이기도 한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도전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왜 우리 크리스챤들은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앞절에서 이렇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밝히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기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시작하시는 이유는 <19절>에서부터 밝히시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v.19-20)고 말입니다. 사실 목사님들 중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20절>말씀을 성도들이 ‘헌금’해야 할 이유를 밝히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물론 ‘헌금’도 성도가 ‘하늘에 쌓는 보물’의 일부이겠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도가 이와 같이 ‘하늘에 쌓는 보물’은 ‘물질’만이 아니라,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시간’과 ‘관심’과 ‘희생’과 ‘섬김’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늘에 쌓는다’는 것을 단순히 ‘저금통에 동전을 넣듯이’ 혹은 ‘은행에 돈을 저축하듯이’ 보관한다는 의미보다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의 결단을 통해 관심과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보물처럼 가장 아끼는 그 무엇을 하늘에 쌓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16장 1~13절>말씀임을 알 수 있는데, 주님은 이런 상당히 묘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9)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뜻일까요? 얼핏 보면, 마치 <불의하게 번돈으로 친구를 삼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씀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불의와 불법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비록 돈을 벌고 또 돈을 쓰지만, 중요한 것은 이 ‘돈/재물’을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속담/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 만약 우리가 이 돈을 사용 (투자)하여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친구를 삼는다면,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스스로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돈/재물’과 더 나아가 ‘시간’과 ‘관심’과 ‘사랑’과 ‘섬김’을 투자하여 그 한 영혼을 친구로 삼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실로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이라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공교로운 것은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오늘 본문 앞의 <마태복음 6장24절>과 정확히 같은 본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염려하지 말라”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결론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한다는 뜻이요, 그분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이 하나님은 ‘공중을 나는 이름모를 새 한 마리조차 먹이시고 입히시거늘, 하물며 그의 자녀된 너희일까 보냐?’는 것입니다 (v.26~30). 그럼으로 이 선하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그분의 권능을 믿는다면, 결코 염려함으로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누구도 염려한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설교자가 ‘염려’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듣은 적이 있습니다. 염려는 “안해도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안 하려고 노력했지만, 순간 순간 기어올라오는 염려를 막을 수 없게 되자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하루, 즉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하고 자그만 상자를 만들어 무엇이라도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게 되면 바로 메모지에 적어서 상자에 넣고 ‘염려의 날’로 미뤘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되어 한 개 한 개 염려 쪽지를 집어 들고 그 내용을 살펴봤을 때, 그에게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괜스레 불안하고 염려스러웠던 것들이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조금만 시간을 두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그 생각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기에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v.27)라고 반문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질문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염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염려한다고 조금이라도 상황이 개선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염려는 ‘백해무익’일 뿐 아니라, 오히려 하면 할수록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해를 끼칠 따름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는 전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주님은 단지 ‘염려하지 마!’라고 명령만 하고 끝내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의 핵심은 ‘그것이 무엇이든 염려가 몰려올 때는 곧장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아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번째>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셋째, “천부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 이어 <31절>에서 다시 한번 우리 성도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v. 31)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 이유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v. 32)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처럼 구하지 말라’고 도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한다는 말일까요? 이방인들은 끊임없이 염려하고 근심 걱정하면서도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게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말라’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근심과 염려로 가득찬 간구’는 주인되신 하나님, 아니 ‘선한 하늘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요, 그분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이방인들처럼 염려함으로 구하는 모순된 간구 (기도)가 아니라, 기쁨과 확신 가운데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이유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그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언제 필요한지를? 왜 필요한지를? 모두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그 선한 뜻을 따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가 한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적지 않은 우리 크리스챤 청년들 중에 <‘기독교/성경’은 크리스챤들이 가난하게 살라고 가르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마치 ‘신앙 좋은 크리스챤들은 <청빈락도>처럼 돈없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라는 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돈/재물’ 자체를 ‘선’이나 ‘악’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자녀였던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딤전. 6:10)라고 ‘돈을 사랑함’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주께서 앞서 밝히셨듯이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뜻이요,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내가 돈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욕심과 힘에 사로잡혀서 돈의 명령에 끌려 다니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돈을 사랑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이 재물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주께서 도전하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 성도의 물질사용의 중요한 기준을 이렇게 간결하게 제시한바 있습니다; <‘벌 수 있는 만큼 많이 벌라’ (Earn as much as you can), ‘저축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저축하라’ (Save as much as you can),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만큼 많이 드려라’ (Give to God as much as you can)>고 말입니다. 이 짧은 문장속에 우리 크리스챤의 건전한 물질관과 어떻게 그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물질사용인지를 잘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결코 오늘 말씀을 포함한 <마태복음 6장>의 ‘물질관’에 있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나 ‘돈을 저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돈/재물을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고 주님은 핵심을 짚으십니다. ‘내가 돈/재물을 사용하는 그곳에 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돈을 사용하는 그곳에 내 마음이,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믿고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당신의 통장 (account)을 저에게 보여주십시요. 그렇다면 저는 당신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당신에게 당장 알려주겠습니다!”라고. 그 사람의 돈의 사용하는 곳을 보면 그 사람의 중심 (가치관)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왜 우리는 염려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한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물질을 그 주신 목적대로 지혜로운 청지기와 같이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도구로 주신 물질의 노예가 되어 헛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이 염려는 아버지의 뜻을 벗어나, <물질에 대한 탐심>에 사로잡힘으로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 살아가게 될 때 이 염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더욱 나를 옥죄고 불안과 고통으로 내 모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물질의 종이 될 때, 우리는 머리로는 염려는 결코 그 키를 한자라도 자라게 할 수 없고, 도리어 삶을 피폐시키고, 어느 심리학자의 끔찍한 표현처럼 ‘느린 형태의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이 염려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종과 같이 사로잡히는 것은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 끊임없이 발생하는 일과 사건, 사고들, 어저께 반도 못끝낸 과제물과 눈 앞으로 닥친 시험준비, 뭔가 잘못 꼬인 실타래처럼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상황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들이 우리의 긴장과 스트레스와 염려를 자연스럽게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이라고 묘사되는 그의 ‘빌립보서’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엄청난 도전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아니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던집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런 바울의 놀라운 도전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오늘 말씀을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첫째, <바울이 우리를 향해 일부나 어느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도전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둘째, <이와 같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이 실제 가능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자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자녀들이 이땅을 살아가면서 끝임없는 근심과 염려 속에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제가 깨닫게 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기’를 결단하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뢸 때, 하나님은 비로소 세상이 줄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하나님의 평화와 안식을 허락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불안과 불만이, 스트레스와 긴장이 충만한 이 세상 속에서 과연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여러분의 한번 잠깐 그렇게 시도해 보았다고 해서 ‘피터팬의 원더랜드’처럼 마술적으로 일거에 염려가 사라지고 평화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진리를 근거로 현실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일평생 살아가면서 이런 우리 복된 삶을 서서히 갉아 먹는 근심과 염려, 그리고 더 나아가 죄와 날마다 싸워 나갈 때, 그 막연하게 느껴졌던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하신 평강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이고, 점점 더 충만하게 누려 나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런 염려로부터 해방되어 주의 약속하신 평화와 기쁨을 날마다 누려 나감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을 경험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