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8, 2024

“예루살렘 입성” (Entry Into Jerusalem)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1:10~13
Service Type:

“예루살렘 입성”

(Entry Into Jerusalem)

7-28-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1:10-13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설교 요약]

          <21장>에서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제 일대 전환점을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루살렘 입성’은 곧 사도행전이 마지막국면을 접어듦을 뜻하고, 이제 사도가 세상의 통치자들 앞에서 어떻게 그의 남은 복음증거의 삶을 충성스럽게 마무리하는지를 잘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본문이 포함된 <2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v.1)라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3차전도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진행해 나갑니다 (v.3). 이와 같은 일정으로 해서 <16절>까지 말씀에서 사도의 예루살렘 입성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3-4절>에서 바울일행이 ‘두로’에 도착하여 일주일 가량 머물며 제자들과 교제했는데,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v.4)고 강권했습니다.

한편 일행들은 ‘두로’에서 ‘돌레마이’를 잠시 들렀다가 ‘가이사랴’에 있는 전도자 빌립의 집을 방문합니다. 이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이곳을 방문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예언합니다 (v.11).

이로 인해서 성도들은 사도의 예루살렘 행을 강하게 만류했지만,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 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v.13)고 담대히 대답합니다.

이렇게 동일한 성령께서 예언하셨지만, 성도들과 바울이 보이는 반응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도들은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지만, 바울은 더욱 예루살렘 입성을 굳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은 <성령을 통해 미래를 아는 것>과 <성령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성도의 교제 가운데 성령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깨우쳐 주실 때, 과연 성령의 뜻은 무엇인지를 바울처럼 분별하여 순종으로 나아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21장>에서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제 일대 전환점을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루살렘 입성’은 곧 사도행전이 마지막국면을 향해 나아감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특별히 사도가 유대와 세상의 왕과 통치자들 앞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께 받은 그의 남은 복음증거의 삶을 충성스럽게 마무리하는지를 잘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사도 바울의 모습과 같이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대가지불과 고난의 순간을 맞을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그리스도의 권능과 승리의 약속에 의지하여 이 ‘고난의 골짜기’를 주와 함께 담대하게 나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밀레노’에 잠시 들러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깊은 사랑과 믿음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였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이제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는데, 그의 말처럼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v.22)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지나온 삶이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긴 삶’이요, 이것은 곧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 때문이요, 이것이 지금까지 성령에 매여 성령을 좇아 성령께 순종함으로 살아온 삶의 결과라고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힘주어 간증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간곡히 주님의 양떼를 온 힘을 다해 섬길 것을 당부합니다. 주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곧 주님을 머리로 하여 모인 주의 양떼들을 온 힘을 다해 충성되게 섬길 것을 바울은 간절히 에베소의 작은 목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고별설교를 마치고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기도했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난 후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오늘본문이 포함된 <21장>으로 이어지는데,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v.1)라고.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3차전도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진행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보면, 사도와 그 일행이 ‘고스’를 거쳐 ‘로도’를 지나 ‘바다라’로 갔고, 다시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고 ‘두로’에 상륙하여 거기서 7일을 머물렀던 것입니다 (v.3). 이와 같은 일정으로 해서 <1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일행의 예루살렘 입성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사도행전 21장>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는데 <21장>은 크게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번째 단락은 방금 말씀드린데로 <1~16절>까지로써 ‘사도가 밀레노에서 장로들과 헤어진 이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두번째 단락은 <17~26절>까지인데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일행들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방문한 내용’이고, 마지막 셋째 단락이 <27~40절>로서 ‘바울이 성전에 갔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라고 그를 모함하면서 무리를 선동하여 난동을 일으겼고, 예루살렘에 주둔한 로마군인들이 진상을 알고자 바울을 결박했으며, 바울이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2장>이 바울이 모인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곧 ‘사도 바울 자신의 간증’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남은 시간을 <행. 21장>에서 ‘첫째단락’에 해당하는 <1~16절>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데,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마지막 여정에서 여러 그룹의 동역자와 성도들을 만났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믿음의 교훈으로 적용할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3-4절>에서 바울일행이 ‘두로’에 도착하여 일주일 가량 머물며 제자들과 교제했는데,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v.4)고 강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지게 될 때, 교회에 속한 모든 가족들이 성문 밖까지 전송을 나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로 이들을 보냈습니다 (v.5). 앞장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그러했듯이, 두로교회 성도들도 온 가족들이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바울과 일행을 마지막 전송하며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었다’는 의미는 세상의 권력이나 헛된 신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참된 믿음과 신앙의 정조 그리고 충성의 표시가 ‘무릎 꿇음’이라는 자세로 나타남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행들은 ‘두로’에서 ‘돌레마이’를 잠시 들렀다가 다음날 ‘가이사랴’에 있는 전도자 빌립의 집을 방문합니다. 전도자 빌립은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교회’가 처음으로 선출한 일곱 집사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집사에게는 ‘딸이 넷’있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v.9)고 누가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빌립집사 집에서 있었던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는데, 성경학자들 중에는 아마도 빌립의 딸들도 ‘바울의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예언하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합니다.

이렇게 여러날 빌립집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유대로부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v.10). 이 ‘아가보’선지자는 앞의 <사도행전 11장>에서 성령에 힘입어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행. 11:28)고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바로 그 ‘아가보’선지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바울에게 닥칠 미래의 일을 상징적으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 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v.11) 이와 같은 상징적 예언은 구약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예레미야 1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하셔서 베 띠를 사서 허리띠로 사용하게 하셨다가, 그것을 유브라데 강가의 바위틈에 감추게 하셨습니다. 여러 날 후에 하나님께서 그 띠를 가져오라 명하셨고, 그가 가 보았을 때 그 띠는 썩어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상징적 예언을 통해 하나님은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렘. 13:9)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이사야 20장>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명하셔서 삼년 반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게 하심으로, 장차 애굽과 구스 민족이 앗수르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며 실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수치를 드러낼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띠와 끈’을 사용하고, 어떤 행위를 통하여 때로 하나님은 매우 강력한 예언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이 결박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했을 때, 그 말을 들은 그곳 사람들과 심지어 누가를 포함한 동역자들까지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 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v.13)고 그는 담대히 대답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이 일행과 함께 ‘두로’와 ‘가이사랴’교회 성도를 방문하고 성령의 예언을 받는 가운데 사도 바울과 성도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차이를 보임을 보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성도들은 성령의 예언하심을 통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선 안된다’고 결론 짓고서 그를 강하게 말렸지만, 바울은 성령의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예루살렘 입성을 굳세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동일한 성령님이 어떻게 상반된 뜻을 밝히실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을 우리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중요한 영적 교훈은 <성령을 통해 ‘예언을 받는 것’ (=미래를 아는 것)>과 <성령의 뜻을 깨닫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그들의 영적 리더인 사도 바울의 미래에 일어날 일을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이런 미래에 되어질 일이 ‘성령의 뜻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경고로서 피해야 하는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사도 바울은 비록 예루살렘의 입성이 손발이 묶여서 이방인의 손에 넘기어지는 비록 인간적으론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분명히 확인했을찌라도, 도리어 이것이 성령의 뜻임을 확인했기에 가는 걸음을 돌이키지 않고 성령께 순종함으로 나아가고자 굳게 마음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한가지 중요한 질문을 성도 여러분과 나눠보기 원하는데, 그것은 ‘만약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통해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알려주시기 원할 때, 그 뜻을 깨닫아 순종함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성령의 경고임으로 그 길에서 돌아설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뜻을 분별하고 있으며, 또한 그 뜻을 따라 순종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왜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은 초대교회성도들처럼 용감하게 살지 못할까?’라고 저는 자문해 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믿음의 샘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는 ‘복음의 아비와 어미’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에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5)고. 오늘날 수많은 성경교사는 있지만, 영적 아비는 희귀한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날 ‘이 세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아니 현재 21세기 뿐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상관없이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이후 인류의 삶을 관통하는 강력한 <3가지 유혹>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권력’ (power), ‘성’ (sex) 그리고 ‘돈’ (money)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고 세상의 배후에 있는 공중권세 잡은 자 사단 마귀는 더욱 강력하게 그리고 더욱 깊고 교묘하게 이 세가지 그의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의 불신자들 뿐 아니라, 성도들까지도 이런 죄의 유혹에 사로잡혀 머리깍인 삼손마냥 무기력하게 세상사람의 조롱을 받으며 죄악의 맷돌질을 무한반복하는 것은 아닙니까?

앞서 살펴본데로, 사도 바울이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예루살렘 입성을 분명히 했을 때, 그제서야 성도들과 동역자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v.14)라고 하며 더 이상 그를 만류하기를 그쳤고,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축원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를 떠나보내는 인간적 안따까움과 슬픔이 있다할찌라도, 성도들은 이제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복음의 역사에 사도가 축복되게 쓰임 받기를 진실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이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 초대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순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의 인생길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제가 어릴 때는 60혹은 70세를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했지만, 요즘은 의학적 발전으로 과연 100세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과거에 비해 20~30년을 더 산다는 것이 반드시 반갑고 좋은 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20~30년’이라는 시간도 사실 지나고 나면, 정말이지 눈 깜짝 할 만큼 순식간에 스쳐 지나는 시간임을 저는 절감합니다. 중요한 것은 덧없이 화살같이 지나는 이 땅에서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충성된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가 먼저 간 사도 바울과 수많은 주님의 증인들을 영광 가운데 만나러 가는 천국입성의 순간일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사. 40:8)고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바라기는 마지막 주님을 다시 만나는 날 부끄러움과 후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하신 은혜를 덧입어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충성되게 다 달려간 후에 주님 앞에 기쁨과 감격 가운데 설 수 있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