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신 메시아” (Messiah Who Already Came)
“오신 메시아”
(Messiah Who Already Came)
12-22-24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2:4~7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So Joseph also went up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Bethlehem the town of David, because he belonged to the house and line of David.)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He went there to register with Mary, who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him and was expecting a child.)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the baby to be born,)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a Son. She wrapped Him in clothe and place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ㅣ
[설교 요약]
우리는 계속해서 “오신 메시아”란 제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되새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이사 아구스도>황제가 백성들에게 호적을 신고하게 영을 내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도 고향 ‘베들레헴’에 갔고, 이미 성령에 의해 주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여관에 빈방이 없었던 고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의 스토리입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여관의 ‘빈방 없음’ (no vacancy)의 싸인은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고 주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장차 주님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잘 암시해 줍니다.
먼저,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반란군 (사단이 우두머리)이 점령한 영토 (=이 세상) 심장부에 침투한 하나님의 ‘전능한 사령관’으로서 묘사합니다.
이 치열한 전쟁은 아군의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3:15)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은 승리하셨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써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셨고, 사단의 머리를 부수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고전. 1:18).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신 ‘하나님의 뜻’ (아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심)을 C.S 루이스는 <새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여기서 <새사람>은 누구일까요?
- <새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영원한 생명’ (조에)으로 살게 된 존재>를 의미합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만든 목각인형이 어느 날 살아있는 ‘피노키오’가 된 것과 같음!)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새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인가?” 그것은
첫째)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새사람 된 우리는 언제나 정직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함으로 죄 씻음 받고, 불의에서 깨끗케 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요일. 1:8,9).
둘째) “옛사람을 벗는 것”입니다: 영적인 원리에서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옛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엡. 4:22~24). ‘육신의 거하는 죄의 본성’인 <옛사람>과 맞서 날마다 싸워 나가는 것이 새 사람에 걸 맞는 성도의 중심적인 미션인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는데,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 (=죄 죽이는 것) (롬. 8:13)과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심을 깨닫을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결단과 능력 이전에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고전. 2:10).
이것이 성탄절의 정신이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믿습니다! 이미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승리하심을 통해 성도 여러분이 새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성탄절 메시지’ 첫번째 시간으로 “오실 메시아”에 이어 오늘 두번째 시간으로 “오신 메시아”란 제목으로 성탄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고 그 의미를 되새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나 시간에 ‘오실 메시아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오실 것인지?’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된 말씀을 근거로 살펴보았고, 또한 이런 수많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해 오해했는지?’ 다시 말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거부했는지?에 대해 설펴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어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은 무엇인지를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 주께서 이미 성취하신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혜와 승리를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주님 다시 만나는 날까지 넉넉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해에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황제가 로마에 속한 백성들의 인구조사를 실시하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호적을 신고하라고 영을 내렸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출신지역, 고향에 가서 호적 신고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신고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기억하듯이 이때는 이미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하여 그의 크신 능력으로 천사가 예언한 아기를 가지게 되었고, 곧 출산이 임박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젊은 정혼한 부부,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들러 호적신고를 할 기간동안 체류할 여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빈방 하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대대적인 ‘인구조사’로 인해 고향을 떠나 있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향으로 몰려듦으로 모든 여관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요셉과 마리아는 그 어느곳에서도 빈방 하나를 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마리아는 여관의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고 강보에 싸서 말구유에 누였던 것입니다.
미국 베들레헴 교회의 ‘존 파이퍼’목사는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밝히며 이렇게 말구유에 누운 아기를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로마황제를 통해 인구 센서스를 행하여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오게 하신 하나님은 아기가 태어날 빈방을 충분히 마련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능의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왜냐하면, ‘갈보리’로 향하는 아기 예수님의 삶은 바로 오늘 베들레헴 여관의 ‘No Vacancy’ (빈방 없음)사인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에서의 침 뱉음과 비웃음의 십자가로 끝이 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내어날 자신의 독생한 아들을 위해 화려한 왕궁의 빈방을 충분히 마련하실 수 있으셨으며, 또한 주님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사단이 유혹한 것처럼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 있으셨고, ‘겟세마네’동산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명의 천사들로써 방어하게 하실 수 있었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걸어내려 오심으로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을 자리가 없어 막 구유에서 누워 이 땅의 첫 밤을 보내신 주님은 평생을 누울 자리 없는 정처없는 삶을 사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서기관이 와서 주님을 좇고자 했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의 삶을 큰 그림에서 살펴보면서, 그분의 탄생에서 십자가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깨닫고 이해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해 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먼저 저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미션을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시각으로 영적으로 잘 그려낸 대표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 C.S 루이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합니다. 거기에서 루이스가 묘사한 예수님은 마치 적진 깊숙히 침투한 우리 아군의 ‘사령관’과 같습니다. 치열한 전투 가운데 상대방 적진의 심장부에 침투한 존재는 여러 명의 특공대원들이 아니라, ‘사령관’ 자신인 것입니다.
그 적진은 공중권세 잡은 통치자, 사단 마귀의 압제 아래 있는 이 ‘세상’이고, 그 원수에게 점령된 세상을 탈환하기 위해 침투한 존재는 여러 명의 특수요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그의 독생하신 아들이요, <하나님의 전능한 사령과>이신 ‘나사렛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치열한 전투 (싸움)가 우리 아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나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우주적인 전쟁을 대비하시고 작전을 설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그의 독생하신 아들인 ‘총사령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지난 시간, <창세기 3장>의 메시아에 대한 첫번째 예언으로서 살펴보았듯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단에 대한 승리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 승리는 성취된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대표적으로 주님을 미워하고 증오했던 그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우매한 군중들을 앞세워 로마 빌라도 총독을 압박함으로 눈에 가시 같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자신들의 책략이 멋지게 성공했다고 자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심지어 공생애 3년반동안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분이 누구신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분의 12제자들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단지 그들을 깊은 절망에 빠트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막. 8:31) 그들은 여전히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음은 단지 끝으로 믿었고, 그 죽음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놀라운 것은 우리의 원수요, 적국의 통치자인 사단 마귀조차도 이 십자가가 승리의 열쇠임을 전혀 낌새조차 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온 힘을 다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적진 깊숙히 침투한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승리한 그리이스 군대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우리의 전능한 사령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승리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는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비밀>, 곧 <십자가의 비밀>임을 이해해야 할 것 입니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전. 1:18)라고 말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친히 나무에 달리사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단번에 대신지시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죽이신 것이고, 그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요, 그의 피를 흘리셔서 단번에 우리를 값 주고 사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핵심이요, 사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완벽한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신 ‘총사령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큰 그림에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요, C.S 루이스의 개념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한 사령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분의 미션 (목적)이라면, 이 못지 않게 중요한 마지막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인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승리를 누려 나가고, 열매 맺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다시 한번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핵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새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우리가 흔히 ‘세상적으로 방탕하게 살던 자가 어느 날 지난 날을 반성하고 마음잡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식의 의미일까요? 이것은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된 삶을 깊이 반성하고, 소위 ‘개과천선’하여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여러분과 제가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루이스는 ‘새 사람’이라는 마지막 소항목의 제목에서 <깡통병정이 사람이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할아버지가 만든 <목각인형>이, 어느 날 갑자기 살아있는 소년 <피노티오>가 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런 새사람의 변화는 ‘진화론적 변화’라든가 ‘자연적인 변화’와 본질적으로 다른 변화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자연 밖에서 자연 속으로 들어온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는 결론적으로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변화’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은, 이제 죄사함을 받고 과거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와 같은 <죄 없는 인간의 상태>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죄 없고 완전했던 첫 인간부부’조차도 지음 받은 피조물의 수준이었다면,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 (조이)으로 인해 새사람이 된 여러분과 저는 이제 ‘하나님의 훌륭한 걸작품’이라는 피조물로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사도 바울과 여러 신약의 저자들이 왜 그토록 우리 성도의 신분이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지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목사님은 “우리는 예수님짜리”라고 짧고 핵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 사람된 여러분과 저는 이제 하나님의 눈에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해 우리를 그분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었고, 우리를 심히 기뻐하시고 영광스럽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와 방법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한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전. 2:20)라고.
그렇다면, 이제 제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 새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인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그 잘못을 뉘우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죄로 향했던 길에서 돌아서서, 이제 죄를 미워하고 더 이상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고자 결단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침례자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도전했듯이, 가까이 임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첫번째 관문입니다. 그럼으로 진정한 회개 없이는 그 누구도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천국가기 위해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를 했을 때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 ‘회개’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회개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 받을 때 한번 하고 끝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성도가 살아 숨쉬는 날 동안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성도가 완벽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수하고 죄가 거하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꺠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8,9)라고 요한은 날마다 주께 죄를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기를 권고합니다. 이처럼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는 것이 바로 ‘새 사람의 시작’인 것입니다.
둘째, “옛사람을 벗는 것”입니다: 영적 원리에서 볼 때, ‘새사람’의 삶을 실제적으로 행하기 위해선 ‘옛사람을 벗어버려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엡. 4:22~24)라고 영적으로 가르치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새 사람’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언급하는 ‘옛사람’은 어떤 존재일까요? 이런 ‘옛사람’은 ‘육에 속한 우리의 본성’입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려버린 아담으로 물려 받은 <원죄> (the Original Sin)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씻음 받음으로 없어졌지만, 우리 육체 가운데 있는 ‘죄를 사랑하는 기질’ (=육의 본성/육신의 소욕)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앞서도 설명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실수하고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자들이 저지르는 죄와는 비교가 안되겠지만?!) 이처럼 신학자들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저지르는 죄를 ‘원죄’와 구분하기 위해서 ‘자범죄’ (Actual sin)라고 부릅니다.
이런 죄가 바로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죄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16)고. 요한은 지금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옛사람’이며, 또한 ‘옛사람’에 대한 경고라고 믿습니다. 내 존재는 이미 예수님의 새생명으로 ‘새사람’이 되었는데, 육신에 속한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과거에 행했던 옛사람의 죽고 병들고 썩어 냄새나는 더러운 옷을 다시 주워 입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한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죽은 ‘옛사람’의 행실과 죄의 유혹을 좇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얼마전에 ‘독서토론’을 통해 살펴보았던, ‘존 오웬’의 <죄 죽이기>는 그 어떤 책보다도 이점을 영적으로 잘 가르쳐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평생을 통해 죄를 죽여 나가야 하며, 이 죄를 죽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 성령께서 하시는 일’임을 존 오웬은 핵심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마지막 3번째로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셋째,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이제 마무리하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그분의 이 땅에서 이루신 구원과 승리의 비밀인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를 깨닫는 것은 오직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영이요, 삼위일체 하나님 되신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 없이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과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것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이렇게 밝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라고.
그럼으로 여러분과 저는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죄와 피 흘리기까지 온 힘을 다해 싸워 나가고, 날마다 성령을 좇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아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 우리 각자의 삶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산제사’로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사람’이 된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릴 영광스럽고 풍성한 삶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송도 있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있고, 성탄예배도 있지만,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찾을 수 없는 속 빈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바라기는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의 참된 구주시요 주인이심을 더욱 깊게 깨닫고 고백하는 복된 크리스마스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절기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하여, 그의 영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나 안에 사심’으로 주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날마다 누려 나가고,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