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실 메시아” (The Coming of The Messiah)
“오실 메시아”
(The Coming of The Messiah)
12-15-24
본문말씀: 이사야 (Isaiah) 53:3~4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by mankind, a man of suffering, and familiar with pain. Like one from whom people hide their faces He was despised, and we held Hi in low esteem.)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Surely He took up our pain and bore suffering, yet we considered Him punished by God, stricken by Him, and afflicted.)
[설교 요약]
저는 이번주와 다음 주, 두 번에 걸쳐 ‘성탄절’메시지를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고, 말씀으로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고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첫번째 주제>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곧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첫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창세기 3장15절>입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유혹한 뱀을 저주하시면서 ‘여자의 후손’ (her seed)을 보낼 것을 언급하는데, 그 (He)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한편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합니다.
- 신분 (사역): ‘왕’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역할 (=‘기름부음 받은 자’) (단. 9:24-25)
- 혈통: ‘다윗의 후손’ (렘. 23:5)
- 탄생장소: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 (미. 5:2)
- 특성: ‘겸손한 왕’ (슥. 9:9), ‘영원한 제사장’ (시. 110:4),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사. 7:14), ‘선한 목자’ (겔. 34:11-31), ‘의로운 가지’ (렘. 23:5), ‘고난의 종’ (사.53:2), ‘전능하신 하나님’ (사. 9:6)
이제 <두번째 주제>로, “유대인들은 왜 메시아에 대한 오해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첫째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민의식이 지나침으로 스스로 의로와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용서함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현실적인 메시아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통해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려왔지만, 정작 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들이 요구한 것은 오직 육신의 ‘병고침’과 ‘빵문제’와 ‘정치적 필요’를 해결해줄 현실적 메시아였습니다 (마. 16:4).
셋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깨닫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멸시를 받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 53:3~5).
바라기는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고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언제나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이번주와 다음 주, 두 번에 걸쳐 ‘성탄절’메시지를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고, 말씀으로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고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이번 시간에는 <오실 메시야>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오신 메시아>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 ‘오실 메시야’라는 설교말씀에서는 크게 볼 때 두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오실 메시아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오해는 무엇인가?>라는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실 뿐 아니라, ‘내 삶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점점 자라감으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첫번째 주제>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곧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메시아에 대한 예언된 말씀은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 나타납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모압 평지의 느보산에 올라가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는 가운데 이런 의미심장한 예언의 말을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신. 18:15)라고 말입니다. 이 말에는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사도 베드로가 유대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이 <신명기 18장15절>의 모세의 이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라고 영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살펴보았을 때, 많은 성경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첫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모세의 신명기서를 훨씬 거슬러 올라감을 봅니다. 그 말씀은 <창세기 3장>에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과 뱀에게 벌을 내리시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구원자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3장15절>에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는 가운데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후손은 사실 우리 모든 셀 수 없이 많은 인류가 되겠지만,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영어성경인 <KJV>에서는 ‘her seed’라고 ‘3인칭 단수’인 ‘그’ (he)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성경에서 최초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여 ‘원시복음’ (protevangelism)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 지칭하는 한 명 ‘그’ (He)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성경학자들은 주장합니다. 비록 사단에 의해 뒷발꿈치가 상하게 되었지만,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부수고 승리하시고, 죽은지 3일만에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살리심으로 온 세상에 그가 진정한 오실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적으로 가장 궁극적이고 최초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성경에서 최초로 예언된 오실 메시아는 과연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존재로 오실 것인지를 성경에서는 예언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구약에서 예언한 오실 구원자는 과연 어떤 존재라고 생각합니까? 먼저, 오실 메시아는 <신분적>으로 볼 때 <왕,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를 아우르는 신분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 (the Anointed One)로서, 구약 시대에는 이런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여기에 속했습니다. 그럼으로 오실 메시아는 왕과 같은 권세 (통치력)을 가지고,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제사 드리며, 예언자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함을 받음으로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메시아에 대해 <형통적>으로 본다면,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태어날 것임을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예레미야는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렘. 23:5)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심지어 그 구원자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까지도 정확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오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그 장소는 ‘다윗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미가는 인류를 구원할 자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지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에 감동된 택한 종들을 통해 그가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형통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고 그 태어날 장소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라고 오실 메시아를 ‘겸손한 왕’으로, 다윗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 (시. 110:4)으로, 이사야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사. 7:14)로, 그리고 ‘선한 목자’로 (겔. 34:11-31), ‘의로운 가지’로 (렘. 23:5), ‘고난의 종’ (사.53:2)으로 오실 메시아가 묘사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비롭게도 그분은 인간이상의 신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아로 태어날 아기를 예언하면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라고 선포했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메시아의 태어날 장소를 예언한 미가가 예언한 말씀에서도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라고 메시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실 그 구원자는 놀랍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하신 아버지’며, 그분의 존재의 시작은 ‘끝이 없는 영원전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며,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한 방식과 기본적으로 일치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라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메시아의 존재는 놀랍게도 ‘임마누엘’하나님, 곧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라고 구약성경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큰 <두번째 주제>로, “유대인들은 왜 메시아에 대한 오해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첫째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데로, 유대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을 직접 받은 민족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대단한 특권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 중에서 구별하여 택하셔서 ‘내 백성이라’ 선언하신 민족이 유대민족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부르심을 받고, 율법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요 감사의 제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스스로 높아져서 선민의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기들만 택함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리고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확정 지어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긴 역사를 이어오면서부터 언제부턴가 <선민의식>이라는 깊은 영적 병에 걸렸다고 저는 이해하게 됩니다.
마치 자기는 아직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비슷한 예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동안 선민의식이 견고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하시는데로 ‘진정한 구원을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야 됨’의 필요성을 그들은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 주의 길을 예비하러 먼저 온 침례자 요한이 이런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의식과 죄에 대한 무감각’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며 이렇게 도전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죄를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되었다는 자체가, 선한 율법을 맡았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서 제사 드린다는 자체가 이미 자신은 구원이 보장된 것 쯤으로 잘못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먼저 부르시고 율법을 맡기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와 구원의 축복이 흘러 넘치게 하시고자 함이었으나, 그들은 이 생명의 진리를 자신들만 향유하고 가두어 둠으로써 그들 가운데 빛으로 오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코자 오신 주님을 거부하기에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경홀히 여김으로 그분을 거부함으로 구원에서 제외된 이유인 것입니다.
둘째는 <현실적인 메시아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유대민족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을 당시였습니다. 오랜 기간 강대국의 지배로 있다 보니 로마로 부터 독립이 그 무엇보다도 그들 민족의 강렬한 열망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다윗왕과 같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외세의 침입과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서 그 대표적인 수난의 시기는 크게 두번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되는 사건이고, 두번째는 로마제국에 지배당하던 유다 왕국이 <AD70년>에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하기까지 2천년 가까이 유대민족은 나라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낸 고난의 사건입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은 이런 외압과 고난에서 당장 벗어나게 해줄 구원자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메시야’로서 인정한 몇몇의 이름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왕>입니다. 그는 구약성경 ‘다니엘서’와 ‘에스라서’ ‘예레미야서’등에도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한가지 신비로운 것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당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고레스가 그 지역에 패권을 차지하고 나서 별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유대민족에게 선을 베풀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민족을 70년만에 극적으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선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한편, 유대민족이 로마에 지배당할 시기에 여러 유대민족주의자들이 일어나 로마에 반기를 들고 대항했던 몇번의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이런 무력봉기는 결국 로마군대에 의해 모두 진압되고 현실적으로 좌절되지만, 유대인들은 끝까지 로마제국을 상대로 저항했음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가 ‘마사다 전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유대지도자들 중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예수님보다 1세기 후에 인물로서 ‘별의 아들’이라 불렸던 <쉬메온 벤 코시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로마군에 대항하여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했으나 얼마 후 로마군의 진압으로 붙잡혀 처형당하게 됩니다. 어떤 유대 랍비는 그를 메시아로 추정한다고 유대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후세의 사람들이 메시아로 대부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관점에서 ‘메시야’적이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 그리고 ‘벤코시바” 혹은 몇몇 사람들 정도임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 제가 이해하게 되는 것은 먼저, 이방 왕 고레스와 유대지도자 벤코시바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구약의 메시아의 조건에서 볼 때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나 출생, 그리고 메시아로 묘사된 존재가 그러합니다. 또한 이들은 단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은혜롭게 도와준 이방왕 일 수는 있고, 민족의 지도자일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구원과 영생과는 무관한 사람들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메시아관’이 매우 모호함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 문헌에 보면, 지금까지 ‘고레스’나 ‘벤코시바’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자신들이 기다린 메시아이다’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식의 상당히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정통 유대주의자들은 지금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메시아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고, 배고픔의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정치적으로 자기민족을 강대국의 압제로 부터 해방해 줄 현실적인 메시아를 그것은 요구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현실적인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 16: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이들은 진정한 영생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두워진 영안으로 안타깝게도 그분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알 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이 그들 가운데 오신 메시아를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앞서 살펴본데로 유대인들은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먼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분의 선하신 율법을 맡은 특권과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르심과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이 곧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인간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를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와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함으로 영생을 누리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듯이 이 땅에 오실 메시아는 멸시를 많이 받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3~4) 라고. 그는 실로 질고를 많이짐으로 심지어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도데체 그가 무슨 잘못을 범했을까요?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 그 이유를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 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라고. 그 고난의 메시아가 그토록 힘든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의 죄를 대신 지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 때문입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철저히 순종하신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심으로, 이제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사랑이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그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를 밝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주님은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도전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 6:29)고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는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다음 주일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을 기리는 성탄 주일입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오신 메시야”라는 제목으로 이미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취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임마누엘’되신 주님을 깨닫아가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번 성탄절 절기때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사랑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언제나 풍성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