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 (One Who Are The Meek)
“온유한 자”
(One Who Are The Meek)
1-19-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설교 요약]
오늘은 ‘팔복’의 말씀 중,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온유’는 헬라어 원어에서는 ‘프라우스’ (πραϋς)인데,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가 있지만, <성경적인 개념>의 ‘온유’는 <‘거친 야생마를 길들인 상태의 온유’>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 (민. 12:3)이라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온유한 자는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주님의 말씀은 <시편 37편>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시. 37:11)라는 다윗의 글을 인용한 말씀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온유한 자’는 삶의 근거인 땅을 차지함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땅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주어질 새 땅’ (계. 21:1)이지만, 또한 성도가 현재로써 누릴 ‘모든 풍요로운 은혜’입니다.
한편, ‘온유’는 성경에서 위대한 ‘사랑’의 본질 (고전. 13:4)이며, 성령의 ‘9가지 열매’중 하나 (갈. 5:23)요, 신.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대표적인 성품의 하나로써 언급합니다 (시. 25:9; 76:9; 갈. 6:1; 엡. 4:2; 골. 3:12; 딤전. 6:11; 딛. 3:2; 약. 3:13; 벧전. 3:4).
이제 “어떻게 우리는 온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결론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께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마. 11:28,29)라고 삶의 무거운 짐으로 지친 우리를 안식으로 초청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초청>의 2가지 핵심은 “내게로 오라”와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실되게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께 배우기 원한다면, 주님은 여러분을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빗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나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 배우기 원한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반드시 자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신의 ‘죄성’과 ‘선을 행할 수 없는 한계’를 철저히 인식하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 배우려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롬. 7:19-24).
셋째,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라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좇아 행할 때, 비로소 ‘온유’를 포함한 성령의 그 아름다운 9가지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갈. 5:22-23).
바라기는 나의 타고난 성품이나 노력 이전에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배워 나감으로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어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주님의 ‘팔복’에 대해 계속 살펴 나가고 있습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 중에서 시편과 주님의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연계성을 이해하십니까? 구약에서 총 ‘150편’에 다다르는 가장 긴 본문의 <시편말씀>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시편 1편>말씀은 바로 ‘복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라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긴 오페라의 ‘서곡’처럼 “이런 이런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여덟가지 복’을 선언하심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열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통해 이해하겠지만, 성경은 이 ‘복’을 매우 인간 삶의 핵심으로, 그리고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이 팔복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에 이어,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은 무엇인지를 이 시간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도 여러분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우리 대부분은 이 ‘온유하다’는 개념을 ‘부드럽다’ ‘너그럽다’ 혹은 ‘매우 유하고 심지어 남에게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숫기 없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로써 흔히 ‘온유하다’는 말을 쓰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온유’의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온유’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원어에서는 ‘프라우스’ (πραϋς)이고,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는 ‘아나우’인데, 물론 사전적 의미는 ‘그 성격과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인 개념의 온유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의 온유>는 한마디로 ‘집에서 길들인 온순한 양과 같은 온유’가 아니라, <‘거친 야생마를 길들인 상태의 온유’>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원래부터 순한 양같은 성격이었기에 <타고나면서부터 온순하고 부드러운 온유>가 아니라, 원래 기질은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처럼 거칠고, 표범처럼 사나운 성격의 소유자지만 통제되고 길들여 짐을 통해 <절제된 온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온유’의 핵심적 의미인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를 살펴보면, 좀더 명확히 온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 12:3)라고.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한 것으로 인해 모세의 형과 누나였던 아론과 미디암이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런 그들의 태도에 대해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충분히 그 이유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결국 이 일로 해서 하나님은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하시고, 모세는 그녀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구함으로서 그녀가 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태도를 ‘온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세는 타고난 기질이 원래부터가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매우 다혈질적이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써 그가 바로 궁에서 공주의 아들로서 살아가고 있을 때, 자기 동족 이스라엘백성이 애굽 관리에 의해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관리를 쳐 죽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탄로가 나는 바람에 바로 왕의 노여움을 피하고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고, 그는 4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소망 없는 목자로서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되돌아 볼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충성된 지도자로 훈련시킨 훈련의 기간이긴 했습니다만, 어찌되었건 그처럼 모세는 그것이 의협심이던, 불 같은 성격이든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통제되지 않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던 모세가 이제는 형 아론과 누나 미디암의 심한 비난에 대해 아무런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참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생마 같은 자신의 기질과 성품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고 길들여짐으로 절제되고 통제된 온유함으로서 변화된 자가 모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온유한 자’라고, 곧 ‘자신을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고, 다스려진 바 된 아름다운 성품의 소유자’라고 선언하셨고, 이스라엘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대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주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유한’ (meek)이라는 단어를 정의해 본다면, 어느 설교자의 말처럼 “통제된 힘” (the power under control)이라고 저는 정의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온유’는 이미 앞서도 살펴봤듯이 ‘마냥 사람 좋고, 나약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반대로 ‘생명력이 넘치나 절대된 힘의 상태’가 온유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의 말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v.5) 라는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다윗의 <시편 37편>말씀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추측합니다. 다윗은 영에 충만한 가운데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 37:11)라고. ‘오직 온유한 자만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바로 앞절에서 “잠시 후에 악인은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10)라고 다가올 미래를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확인할 사실은, <시편> 아니 <성경 전체>에서 대조되는 큰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의인>이고, 다른 하나는 <악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10절>에서 ‘악인은 잠시 후에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악인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눈을 씻고 찾아볼지라도 도무지 악인을 땅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악인은 그 행한 악과 교만한 행위로 인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땅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악인과 상반되게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온유한 자>를 <의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특별히 <온유한 자>를 <의인>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의인’이 누리게 될 ‘하늘의 유업과 구원받은 자의 은총과 평화’를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으로 묘사하는 것이요, 이것이 예수님의 오늘 말씀의 ‘영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사랑’의 놀라운 능력과 위대함을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고전. 13:4-7)라고 노래하며, 사랑의 위대한 본질에서 ‘온유함’이 있음을 밝힙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사도는 드러내면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온유’는 사랑의 본질이요, 오직 성령으로써 아름답게 열매 맺는 하늘에 속한 성품인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열거한 그 순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지막 두가지 ‘온유’ (meekness)와 ‘절제’ (self-control)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이 언제나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온유하다’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결론적으로 ‘이런 온유한 자가 복된 이유는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 대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땅은 미래에 주어질 땅’을 의미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땅은 구약의 ‘이사야’가, 그리고 신약의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미래에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질 ‘새 땅’이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하늘에 속한 모든 풍성한 유업’일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1~2)라고.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온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마지막 질문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첫째, “예수님께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11장>에서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평화’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는 주님만이 주시는 진정한 쉼과 안식으로 초청하시는 감동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루 하루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를 다 주님 앞에 나아가 내려 놓고 약속하신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쉼을 누리는 핵심은 주님의 마지막 말씀에 열쇠가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9,30)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또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령의 안식’을 누리는 핵심은 ‘예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처럼, 나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께 나아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성품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멍에는 율법의 그 수많은 계율과 같이 무겁고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께 배우기 원한다면 ‘쉽게 가볍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십니까? 주님 자신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말씀하시고,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격려하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만약 믿으신다면,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이 두번째 조건입니다.
둘째, “나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말은 ‘주님께 가서 배우겠다’고 하지만, 아직 전혀 배울 준비가 안된 주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아직 배울 준비가 안된 사람일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자신의 한계와 죄성이 무엇인지를 단 한번도 절실히 절망적으로 자각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6장>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분의 피로 죄 씻음 바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생명에 대해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왕노릇 영역 (다스리는 나라)로 옮겨 졌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자기 속에 있는 엄청난 고통과 한계를 토로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롬. 7:19)라고. 여러분은 이런 자신 안에 있는 선을 행할 수 없는 한계와 무능을 절감해 보셨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내가 아직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여러분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대면해 보지 못한 사람임을 깨닫으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여러분 안에 거하는 ‘죄를 사랑하고, 죄에 대해 끌려 다닐수 밖에 없는 육신에 속한 자신의 실존’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씩 속으로 되뇌어 보는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의 가사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한 곳 없네/ (중략)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 입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는 ‘가시나무 새’처럼 내속에 언젠가부터 자라난 날카롭게 돋힌 가시로 인해 내 자신이 찔리고, 또 그 가시로 서로를 찌르고, 그 누구도 당신에게 편히 날아와 앉아 쉴 수 없는 가시나무 같은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요? 나는 결코 원치 않았는데, 어느 순간 버럭 버럭 소리치고 흥분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지는 않습니까? 더욱 나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주님 안에서 맺어준 믿음의 공동체 한명 한명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섬기기를 원하는데, 행동은 그 반대로 그 형제의 작은 허물에 불쾌해하고, 저 자매의 철없음으로 인한 행동에 분노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목까지 차오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한계와 사랑 없음으로 인해 절망하신 적은 없습니까? 만약 있으셨다면 기뻐 하십시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제 왜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절실히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속에는, 그리고 제 속에는 그 누구도 스스로 겸손과 온유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기를 기뻐하는 본성이 없고,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마지막 ‘온유의 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그것은,
셋째,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영적 혼란에 빠져 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해 가면서 성도들이 ‘어떻게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굳세게 지킬 것이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온전히 율법을 이루는 성도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결론적인 가르침을 이렇게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주는 결론으로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성삼위일체 되신 거룩하시고 선하신 성령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성품 (인격)을 더욱 깨닫아 감으로써 성령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와 자발적인 심령으로 그분의 뜻을 온 힘을 다해 순종으로 행해 나가는 삶’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만약 내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정직하게 직시했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만 싸워 승리할 수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도전하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선언하셨듯이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땅은 단지 ‘미래에 주어질 천국’이 전부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시간에 주실 진정한 복을 간절히 구했던 야베스가 구했던 기도를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대상. 4:10)라고 야베스는 구했고,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야베스가 구한 ‘지경’은 단순한 ‘부동산’ 즉 ‘평당 시세가 높은 땅덩어리’를 구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한 영향력이요, 사랑의 섬김으로 연결되는 생명의 관계성’일 것입니다.
이처럼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땅 위에서 온유함으로 가장 승했던 모세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진실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배우는 복인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가볍고 쉬운 멍에를 메고 주님께 나아가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복입니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영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더욱 더 내 안에 거하는 죄와 정욕을 죽여 나가고 영의 아름답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이 ‘온유한 자’가 이 땅에서 누리는 복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온유하십니까? 여러분은 날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성품을 닮아가고자, 그분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분께 나아가 그의 발 아래 나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대신 그분의 가볍고 쉬운 멍에를 지고 배워 나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모나고, 상처받고, 일그러진 성품들이 주의 영, 성령을 통해 치유되고 새롭게 재창조됨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으로,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성령충만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