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두고를 살리다” (Paul Raised Eutychus)
“유두고를 살리다”
(Paul Raised Eutychus)
7-14-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0:9-11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리라
[설교 요약]
우리가 지난시간 에베소에서 발생한 은장색업자들이 주동이 된 소요사태에 대해 <사도행전 19장>에서 살펴보았는데, 그 사태가 진정되자 사도는 예정했던 <3차선교여행>의 남은 일정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마게도니아’지방을 두루 다니며 제자들을 격려하고 나서, ‘헬라’지방 곧 <고린도지역>에서 석달가량 머물며 성도의 교제와 더불어 ‘로마서’를 집필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행. 20:1-2).
한편, 사도는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원했고, 돌아가는 길에 ‘드로아’교회에 들러서 여러 동역자들과 일주일가량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머무른 마지막날인 ‘안식후 첫날’ 곧 ‘주일’에 모여 함께 떡을 떼는 성찬식과 설교말씀을 통하여 예배 드렸던 것입니다 (v.7-8).
이들은 밤중까지 말씀을 나누며 예배를 열정적으로 드렸는데, 그만 청년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로 사도의 손을 통해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모인 성도들이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v.12).
이제 저는 “유두고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첫째, “유두고가 깊이 졸았다”는 것입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v.9a) 신학자들은 유두고가 노예신분이라 추측합니다. 그럼으로 그는 낮동안의 심한 육체노동으로 피곤과 졸음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두고를 통해 우리가 깨우칠 교훈은 성경에서는 ‘육체적 잠’만이 아니라,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지지 않기를 도전한다는 점입니다 (롬.13:11).
둘째, “죽은 유두고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두고를 살린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빌어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가 그를 다시 살렸을 때, 성도들은 살아난 유두고로 인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v.12)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많은 위로와 기쁨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유두고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뿐 아니라, 유두고처럼 마지막 날 주를 믿는 자신들도 다시 살 것을 이 사건을 통해 확신하고 소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영으로 날마다 깨어서 복음과 함께 싸워 열매 맺고, 유두고가 살아나듯 마지막날 다시 살아나 주와 함께 영광스럽게 왕 노릇하는 주의 제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에베소시에서 발생한 심각한 소요사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발단은 에베소에서 대표적으로 우상숭배하는 ‘아데미여신’의 신전에서 여러가지 ‘은장색’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던 ‘데메드리오’라는 자가 같은 동업자들을 선동하고, 나중엔 무엇 때문에 소요사태가 발생을 했는지 조차 모르는 우매한 군종들을 합세시켜서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처단코자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특수한 이익집단의 거친 소요사태는 그 지방 서기관의 침착한 조치로 진정되었지만, 우리는 이런 소요사태의 이면에 있는 영적 진실을 보아야함을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 ‘생명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영에 속한 거짓된 사회질서와 생명없는 이 세상의 허무한 가치관은 <생명의 복음>과 부딪힐 때 반드시 파괴되고, 갈아 엎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복음의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우리는 먼저 복음으로 인해 나의 내면의 헛된 정욕이 파괴되고, 진정한 재창조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지?’를 각자 돌아보아야 함을 저는 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먼저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함께 나눈 영적 교훈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유두고’라는 한 청년이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삼층 창가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게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만, 사도 바울이 주의 능력으로 그를 다시 살리는 놀라운 권능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청년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지난 <사도행전 1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도바울은 <3차선교여행>을 시작하며, 먼저 그동안 <1~2차선교여행>에서 복음으로 씨를 뿌렸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땅을 두루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사랑으로 격려하고, 믿음으로 굳게 세우고나서 (행. 18:23), 에베소시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허락하신 사도권의 능력과 2년동안 매일 집중적인 <두란노 말씀사역>을 통해 풍성한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행. 19:1~20). 물론 앞서 살펴본데로 <복음의 열매>와 함께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영적 대립>에 따른 소요사태와 같은 핍박과 고난도 함께 겪게 되지만, 이것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현상일 것입니다. 어쨌건 사도는 이 소요사태가 진정되자, 원래 예정했던 <3차선교여행>의 남은 일정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제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을 거쳐서 오순절이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방문코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 20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소동이 끝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격려한 뒤 작별하고 마게도니아지방으로 가니라” (행. 20:1)라고. 그리고 <2절>에는 바울이 ‘마게도니아’지방을 두루 다니며 제자들을 격려하고 나서, ‘헬라’에 이르렀음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헬라’는 ‘아가야’지방으로써 곧 <고린도지역>을 뜻합니다. 사도는 이곳 고린도에 대략 석달가량 거했는데, 성경학자들은 이 기간동안 그가 ‘복음서 중의 복음서로 일컬어지는 로마서’를 썼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 바쁜 복음사역 중간에서도 무엇이 진정한 복음의 핵심인지를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구원의 은혜’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복된 편지로써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원래 고린도에서 배타고 모교회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고자 원했으나, 그 가는 경로에 유대인들이 잠복해 있다가 그를 해치고자 한다는 음모를 누군가를 통해서 듣고서, 그 경로대신 ‘마게도니아’를 돌아서 안디옥을 거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우회경로를 택하게 됩니다 (v.3).
그때, 그와 함께 여러 동역자들이 함께 소아시아까지 동행했는데, 이들은 디모데를 비롯하여 대부분 바울이 전도여행하는 동안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녀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v.4). 이들은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를 대표하는 동역자의 자격으로, 사도 바울보다 먼저 ‘드로아’에 가서 그를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누가’를 동행하고서/ 5절) 만나 교제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함께 드로아에 가서 일주일가량 머문 내용이 오늘 말씀을 포함한 <행. 20장6~12절>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절인 <7-8절>은 이렇게 그들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v.7~8)라고.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이방지역으로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이 처음 상황 속에서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인 날이 ‘안식후 첫날’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안식후 첫날’이란 오늘날 ‘주일’ (the Lord’s Day)로서 ‘일요일’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이미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그 시작점에서부터 ‘안식후 첫날’을 예비드리는 날로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후 첫날’이 갖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날’이요, 성도는 이날을 기념해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주일’에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게 된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그것은 기억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사도행전 2장>에서 주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할때, 성령이 불의 혀같이 권능으로 임하게 되는 <성령강림>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오순절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째>되는 날이요, 다시 말해서 ‘주께서 주일 곧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후 정확히 7주째가 되는 주일’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로 매 주일 모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함께 예배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초대교회성도들은 ‘안식후 첫날’인 ‘주일’에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함께 모여 떡을 뗴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성령강림의 역사’에 의해 처음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교회가 한결같이 행했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2장>에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함께 떡을 뗀다’는 것은 특별히 주일에 함께 모여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성만찬’ (the Holy Communion)을 따르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찬식을 행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그의 12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곧 ‘유월절 성만찬’을 베푸시면서 이렇게 그들에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9)라고. 그럼으로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아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함께 모여 ‘성만찬’의 떡을 떼며 예배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과 더불어 예배드릴 때 반드시 행했던 것이 ‘설교말씀’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저희에게 강론” 곧 ‘주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엘레그마이’로서 <의견을 교환하다/ 대화에 참여하다/ 토론하다/ 가르치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강론은 사도 바울의 일방적인 설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복음의 말씀과 믿음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하고 함께 바울과 토론한 것 까지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여기까지는 여러분 모두 초대교회가 주일날에 성만찬을 나누고, 설교말씀을 듣고 신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하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v.7-8)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배가 밤중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뜻인데, 궁금한 것은 ‘주일예배가 밤중까지 계속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밤 늦게까지 예배가 하루 온종일 계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임의 성격상 ‘드로아교회에서 드린 예배는 밤 늦게 드려진 예배였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늦은 밤에 예배를 드렸던 것일까요? 이점에 대해서 여러 신학자들은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냐’와 관계가 깊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의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행운” 혹은 “행운을 지닌 자”라는 뜻으로써, 그 당시 ‘노예들에게 흔히 사용되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여러지역의 초대교회 멤버들 중에는 귀족출신의 귀부인이나 고위관직의 관리도 있었지만, 종과 노예와 같은 하층민도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 앞의 <사도행전 13장>에서 사도 바울을 파송한 모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리더중에서 ‘니게르라고 불리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가 있었는데, 이들 두 사람 모두 흑인들로서 노예 혹은 노예출신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리고 <행. 20:4>에서 바울을 만나고자 드로아로 함께 모였던 동역자들 중에 바울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비롯하여 7명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중에 ‘세군도’라는 성도가 있는데, ‘세군도’라는 뜻은 ‘두번째/ 2번’이란 의미로 그 당시 주로 불렸던 노예의 이름으로써 이후에 교회의 리더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종 (노예)들은 별도의 휴가나 정해진 휴일이 없기에 이런 사회적으로 주인들에게 매인 성도들까지도 함께 참석 가능할 수 있도록 드로아교회는 늦은 밤에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초대교회는 장소와 시간을 정해 놓고 참석 가능한 사람들만 와서 예배 드리는 유대인의 <회당예배>가 아니라,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마음을 열고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을 찾아서 함께 드리는 <열린예배>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배경으로 해서, ‘드로아교회’의 주일예배는 밤 늦게 행해졌던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열정적인 말씀을 밤이 맞도록 선포했는데, 이는 <7절>에서 보듯이 바울이 ‘이튿날 떠나기 위해서’ 늦은 밤까지 말씀을 선포하고, 서로 말씀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했던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곳에 모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v.16). 이렇게 밤이 깊어 가는 가운데 사도의 강론은 계속되었고, 청년 ‘유두고’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그만 삼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특별한 권능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 그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급히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놀라서 아우성치는 성도들에게 조용하라고 외칩니다. 그리하여 유두고는 과연 살아났고, 이로 인해 성도들에게 많은 위로와 소망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두고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유두고가 깊이 졸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졸았을까요? 여기에서 ‘졸았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음에 대한 강한 경고임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들이 모인 예배장소는 높은 창문의 다락이 있는 3층건물이었습니다. 이런 건물이 오늘날과 같이 수백, 수천명을 수용할만한 대형교회건물이 아니였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몸을 밀착하여 한명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중의 한명인 ‘유두고’ 역시 낮 동안 노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말씀을 듣고자 온 것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기특한 일입니다. 그리고 왜 그가 ‘삼층 창문’에 걸터 앉아 있었느냐? 에 대해선, 아마도 앞서 말씀 드린데로 ‘많은 사람들이 1층에 운집해 매우 비좁았음으로 자신의 한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자 멀리 3층으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하룻동안 육체의 노동으로 인해 이미 지쳐 있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자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윗층 창문에 앉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는 좋았으나, <8절>에서 언급한데로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켜두었음’ (그 당시 크리스챤에 대한 악성 루머, 없애고자!!)으로 인해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가 유두고의 졸음은 더욱 가중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유두고가 윗층 창문에 앉은 것을 저는 좋게 설명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사도가 말씀 전하는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갔지 않았을까 하고 긍정적으로 추측했지만, 사실 설교 들을 때 설교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다 보면,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떨어지고 설교가 자장가처럼 들리기가 십상임을 여러분도 충분히 인정하실 겁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 큰 규모의 본당이 아니라 큰 차이가 없지만, 규모가 큰 교회 본당의 경우는 강대상에서 멀리 떨어진 끝자리나 기둥 뒷자리는 졸기에 딱 좋은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본인자신을 위해서라도 졸음을 떨쳐 보낼 뿐 아니라, 설교 말씀을 더욱 잘 집중하기 위해선 가급적 강단의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에게 이렇게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날 것을 도전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13:11)라고. 피곤한 육체의 컨디션으로 잠시 조는 것은 어쩔수 없다 할찌라도, 성경에서 우리에게 진징으로 도전하고 경고하는 것은 ‘영적 잠’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두고가 졸음으로 인해 땅에 떨어져 치명상을 입었듯이, 깊은 영적 잠에 빠지게 될 때 영적 침체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은 유두고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유두고가 살아난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이 권능의 사건은 사도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유두고의 살아난 사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역사였음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은 결국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 모두는 생명의 복음을 듣게 될 때 다시 살아나게 되고, 궁극적으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주 안에서 잠자던 모든 성도들은 주의 권능으로 다시 살게 됨’을 우리는 유두고의 오늘 이 부활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유두고’가 놀라운 주님의 권능으로 바울의 손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기적중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유두고’가 영원히 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유두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살리신 자들, 곧 ‘죽었던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죽어 냄새나는 친구 나사로’까지 살리셨지만, 이들 역시 살아난 이후 다른 사람들과 차이 없이 시간이 지나면 결국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울과 예수님의 죽은 자를 살리는 이런 놀라운 권능의 사건을 통해 이해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고로 죽었다가 비록 잠시라 할찌라도, 이런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은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기쁨이 됨’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장차 두번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주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주님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할 성도 모두의 부활의 영광을, 우리는 청년 유두고를 주께서 다시 살리신 사건을 통해 진실로 깨닫고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을 때, 성도들이 받게 된 위로와 기쁨에 대해서 <1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v.12)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드로아’성도들이 그토록 위로와 기쁨이 넘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지 죽었던 유두고가 살아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유두고의 살아남을 통해 성도들 자신들도 언젠가 마지막날 유도고와 같이 주께서 권능으로 다시 살려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는 하루 하루 늙어가고, 이제 주께서 허락하신 증인의 삶을 끝마쳐가면서, 장차 그의 앞에 주어질 주와 함께 누릴 영광의 삶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갑니다” (고후. 4:16)라고. 왜냐하면 사도는 잠시 받는 환난의 무게가 아무리 커 보일찌라도, 장차 주와 함께 누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을 바울은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모두 영으로 날마다 깨어서 복음과 함께 싸워 열매 맺고, 유두고가 살아나듯 마지막날 다시 살아나 주와 함께 영광스럽게 왕 노릇하는 주의 제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