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굴로 광풍” (A Hurricane, Called Euroclydon)
“유라굴로 광풍”
(A Hurricane, Called Euroclydon)
9-15-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7:14,21~22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Before very long, a wind of hurricane force, called the Euroclydon, swept down from the island.)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After they had gone a long time without food, Paul stood up before them and said: “Men, you should have taken my advice not to sail from Crete; then you would have spared yourselves this damage and loss.)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But now l urge you to keep up your courage, because not one of you will be lost; only the ship will be destroyed.)
[설교 요약]
지난 주에 <26장>에서 살펴본데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재판문제를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소송하기를 베스도 총독에게 요청했고, 베스도가 그렇게 할 것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 (행.27:1)라고 <사도행전 27장>은 시작되는데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떠나는 것입니다 (행.27:1).
오늘 본문을 포함한 총 <44절>로 구성된 사도행전 27장에서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을 포함하여 276명을 태운 배가 로마를 향해 항해하는 가운데 광풍 ‘유라굴로’ 인해 지중해를 표류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던 극심한 고난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라굴로 광풍을 통하여 배울 영적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인간의 욕심”입니다: 바울은 지금 시기가 지중해의 강한 ‘태풍’을 동반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면서 출항을 만류했지만 (행.27:10), 이 배의 선장과 선주는 강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리하더라도 ‘뵈닉스’항구까지 가서 곡물을 팔아 큰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바울의 리더쉽”입니다: 이런 선장과 선주의 잘못된 리더쉽에도 불구하고,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바울’은 이 조난당한 배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감’ (strong credibility)를 얻고, ‘올바른 판단’ (Sound judgment)을 행하고, ’깊은 영성’ (Deep spirituality)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v.25) 말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하심”입니다: 제가 깨닫게 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은 진정한 구원은 단순한 ‘육신적 구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말입니다.
어리석은 선주와 선장처럼 욕심에 사로잡혀 자신과 사회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육신의 소욕을 벗어버리고, 인생의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빛된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난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살 소망조차 끊어질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힘든 고난은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때론 우리가 바라지도 예상치도 못한 시련의 순간은 찾아오기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27장>에서 로마로 가는 배에 탑승한 바울을 포함한 ‘276명의 사람들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7장>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는 평화롭고 태평한 시기에 찾아오기 보다, 오히려 오늘 말씀처럼 광풍이 불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 더욱 강력하게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사회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행해야 할 ‘빛과 소금’의 삶이 무엇인지를 바울의 모습을 통해 배워가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동안 몇 주에 걸쳐 살펴본대로 유대인들에 의해 고소당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재판이 처음 시작될 때는 벨릭스가 총독이었을 당시였는데, 그는 바울의 ‘무죄함’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언도했을 시에 유대지도자들의 반발과 마찰을 우려하여 2년간 재판을 연기하다가 결국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고, 그가 오자마자 바울의 재판은 속개되었지만, 먼저와 같이 여러 유대인들이 여러가지 중대한 혐의로 그를 고소했으나 그 어느 것도 증명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베스도에게 자신의 소송문제를 로마황제에게 의뢰할 것을 청원했고, 그는 그렇게 할 것을 언도했습니다.
또한 지난시간 <2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유대 분봉왕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자신의 신앙은 유대 율법에서 변질된 이단신앙이 아니라, 조상들이 믿고 간절히 바라던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야를 믿는 유대 전통신앙임을 강조하며, 그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자신이 주님을 만난 ‘다메섹 사건’을 통해 강력히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께 받은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들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함으로 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돌아오게 하는 죄사함과 구원받아 자녀의 거룩한 권세를 얻게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그가 밝혔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26:29)라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27장>이 시작되는데 그 전체 주제는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한 바울의 로마 압송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27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를 황제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행.27:1)라고.
이제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한 배를 타게 되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입니다. 그런데 그 배의 실제적 (법적) 책임자였던 ‘황제부대’소속의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의 동역자인 친구들이 와서 그를 보살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던 것입니다 (v.3). 이것은 사도 바울이 앞에서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을 변론했을 때 왕과 함께 가이사랴 성중에 높은 사람들이 함께 참석했다고 2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행.25:23), 이 율리오라는 백부장도 그들 중의 있었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주목할 것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당하고도 논리적으로 변론하는 것을 율리오가 보고서, 바울이 무죄함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에 대한 인격적 존중과 깊은 신뢰를 가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번 벨릭스 총독이 그러했듯이, 율리오 백부장도 바울에게 일반 죄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유와 인격적인 대우를 허용해 준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배를 타고 여러 날 항해하다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배를 갈아타게 됩니다 (v.6). 왜 갈아탔을까요? 왜냐하면, 이 당시는 유대지역에서 로마로 직행하는 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알렉산드리아 배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베이스캠프 (거점)으로 하여 <미항>이라는 항구로 와서 정박중이었던 배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제국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세계 최고의 곡창지대였던 애굽을 점령하여 애굽의 막대한 곡물을 ‘알렉산드리아’항에서 싣고 수도 로마로 운송해 갔는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루시아의 ‘무라성’이라는 항구도시에서 두번째로 갈아탄 배가 바로 그 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갈아타고 ‘그레데’섬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간신히 <살모네>항을 지나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항해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누가는 기록하면서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v.9a)라고. 여기서 ‘금식하는 절기’를 언급한 이유는 ‘유대인의 어떤 종교적 규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금식은 유대민족의 ‘속죄일’ (Day of Atonement)로서 유대력으로는 <7월10일>이고, 양력으로는 <9~10월경>임으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시점’이란 이미 11월에 접어든 기간이기 때문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늦가을의 계절풍, 곧 ‘강력한 태풍’이 발생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v.10)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경고를 무시함으로 항해를 강행합니다. 그리하여 이곳 <미항>을 떠나 <뵈닉스>항에 가서 겨울을 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부장의 결정은 비록 그가 바울을 인격적으로는 신뢰하고 존중했겠지만, 항해에 관한한 전문가들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항을 떠난 배는 처음엔 남쪽에서 부는 순풍을 따라 순항하여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문제의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유라굴로’라는 태풍은 그 이름이 <동풍>을 가르키는 ‘유로스’와 <북풍>을 가르키는 ‘아킬로’가 합쳐진 단어로써 <동북풍>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 ‘유라굴로’태풍이 휘몰아 침으로 바울을 포함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2주가 넘도록 (v.27) 지중해를 표류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오늘 사도와 배를 탄 많은 사람들이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 겪었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유라굴로 광풍을 통하여 배울 영적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인간의 욕심”입니다: 앞서 제가 잠깐 언급했지만, 사도 바울이 2번째로 갈아탔던 ‘알렉산드리아’의 배는 사실 출항하기에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기가 늦가을의 강력한 계절풍, 곧 ‘태풍’이 발생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살펴봤듯이 사도 바울은 세번에 걸친 선교여행을 거치면서 14년간의 기간동안 여러 번의 배로 이동한 경우를 포함해서 대략 15만km라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경험을 가진 역전의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선교여행 가운데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경험을 했는지는 여기서 다 언급하기도 힘든데, 그 중에서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의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나눈 자신이 겪은 고난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3)라고 말했고, 또한 “세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11:25)라고 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이 배로 이동하는 가운데 겪은 위기상황을 열거합니다. 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는 시간적 순서로 볼 때,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기 이전에 쓰여진 것임으로, 바울은 이미 배를 타고 가다가 3번씩 배가 부서지는 조난사고와 일주일을 깊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힘든 상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구보다도 이런 늦가을의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바울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v.10)고 바울은 자신의 경험치를 통해 충분히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위험한 항해시기인 것을 선장과 선주는 몰랐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항해의 전문가가 아닌 바울도 여러 번의 승선경험을 통해 그것을 절실히 깨닫았을찐대, 평생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과 선주가 그것을 모를리 만무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런 위험한 항해를 강행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과연 이번 항해가 상당한 위험요소가 따르는 시기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리한 결정을 한 것은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뵈니스>항구는 <미항>에 비해 훨씬 넓고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뵈니스’항까지 가게 되면 그곳에서 곡물을 겨울이 오기 전에 비싼 가격으로 팔아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때문에 이번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문제없다’고 백부장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는 무리한 항해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 해 전에 제가 미국에 와서 얼마가 되지 않았을 당시, 미조리주에서 사역하시던 ‘서정곤 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저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목사님은 서해안 어느 작은 어촌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수영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학생시절 친구와 몇 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갑자기 자신의 수영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멀리 보이는 작은 섬에 멋있게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섬 모래사장에 예쁜 조가비 몇 개를 잡아 손에 쥐고 여학생들에게 선물로 주고자 다시 헤엄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헤엄쳤을까 했을 때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몸이 갑자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마도 상당히 오랫동안 헤엄을 쳐 힘이 빠졌을 뿐 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손에 조가비를 쥐고 있었기에 제대로 헤엄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이러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손에 펼쳐 쥐고 있던 조가비를 내어 보어 보내고는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목사님은 이렇게 우리를 도전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때로 손에 쥔 조가비 하나를 놓지 못함으로 인생을 파괴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게도 되는 불행한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라고 말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일확천금’이라는 돈의 조가비를 그리고 명예와 쾌락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해 줄 것 같은 조가비 하나를 부여잡고 놓지 못함으로 깊은 물 속에 빠져 들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그 욕심의 조가비는 무엇입니까?
둘째, “바울의 리더쉽”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 13장> 이후에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동역자들이 함께 이루어 낸 복음증거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27장>에서 언급된 주된 내용은 ‘로마로 가는 배를 탄 바울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심한 고생과 위기 그리고 모두 생명을 보존함’이지만, 그 실질적인 중심내용은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의 리더쉽이 배에 탔던 276명 전원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리더쉽을 결정하는 것일까요?
먼저 <강한 신뢰감> (Strong credibility)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2년전 총독 ‘벨릭스’가 바울의 재판을 지연하면서도 그에게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허용한 이유라든지, 오늘 백부장 ‘율리오’도 역시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고 친구들이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총독과 백부장이 특별히 바울을 편애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만나는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한결같이 신실하고 겸손하게 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배 안에서만 보더라도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백부장과 여러 군인들과 선원들과 승객들 그리고 죄수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신분과 신앙상태는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결한 인품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깊은 신뢰를 받는 것이 ‘리더’로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우선적인 덕목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의 <올바른 판단> (Sound judgment)이 리더쉽을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에서만 보더라도, 뵈닉스로 향하는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에 있어서 “이번 항해가 ~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v.10)고 그는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내용에 보면, 배가 표류하고 깨어진 상태에서 점점 더 육지에 가까이 나아갔을 때 사공들이 몰래 <그룻배>를 따고 자기들만 도망치고자 했을 때, 바울이 그것을 눈치채고 ‘만약 사공들이 없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림으로 이 일을 막습니다 (v.31). 만약 이런 민감하고도 신속한 바울의 판단이 없었다면, 사공들은 먼저 도망가고 그의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살 가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위기상황에서 바울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력은 많은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리고 그의 <깊은 영성> (Deep spirituality)이 리더쉽을 확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수 있듯이, 그는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여러 날 먹지 못하고 좌절해 있을 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바울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자신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타격과 손상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분명히 일깨움 (v.21)과 동시에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v.22)고 확정적으로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그가 이렇게 확신 가운데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지난 밤에 그의 곁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바울이 장차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배에 탄 모든 자들이 안전하게 될 것’이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v.25)고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순전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깊은 영성이 그의 리더쉽을 결정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하심”입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이 <27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묵상하고 읽어 나간다면 한가지 분명한 결론을 저와 같이 내리게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이 ‘유라굴로 광풍’의 위기를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종 바울을 통해 함께 배에 탄 사람 모두를 안전하게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사도 바울의 리더쉽을 살펴보았지만, 그가 이런 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절망과 자포자기했던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게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v.22)고 선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먼저 바울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고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증거할 비젼을 새롭게 해 주심으로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 위로와 구원과 비젼의 시작도 끝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그 은혜와 권능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울의 말은 단지 위로의 말로 그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사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v.23~25)고 말입니다. 이런 난파된 배에서 성난 파도와 사나운 태풍의 위기를 넘기게 한 것은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지혜요, 권능이요 은혜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사나운 풍랑 가운데 안심시키시고,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로마로 가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기에 바울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캄캄한 밤 바다에 그분만을 신뢰하는 그의 종, 바울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한줄기 등불같이 어둠을 비취게 하시고, 그 선한 뜻을 따라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은 진정한 구원은 이 땅에서 잠시 더 생명을 연장하는 ‘육신적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만물의 주관자 일 뿐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현재 어떤 인생의 힘든 풍랑과 거센 파도를 겪고 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끊임 없이 몰려오는 인생의 크고 작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안전하게 그분의 희망의 항구로 이끄시길 기뻐 하시는 선한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생명의 말씀 안에 거하는 복된 삶 사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의 어리석은 선주와 선장처럼 돈에 대한 욕심이나 혹은 명예와 지식과 향락과 수없이 많은 육신에 속한 욕심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가 되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된 주의 자녀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