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온전케” (Fulfilling The Law)
“율법을 온전케”
(Fulfilling The Law)
3-9-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17~18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For truly I tell you, until heaven and earth disappear,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oke of a pen, will by any means disappear from the Law 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의 새로운 국면에 왔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팔복>의 말씀을 통해 ‘천국시민’의 ‘복된 특성은 어떤 것인지?’ 하는 것과, 지난 시간에 이런 <팔복의 특성을 품고 살아가는 천국시민의 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영향력’은 무엇인지?’를 ‘빛과 소금’이라는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오늘 <17절>에서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이 전개됩니다. 이제 주님은 이어지는 ‘산상수훈’ (5~7장)의 주제를 오늘 말씀에서 <요약>해서 선언하십니다. 그것은 ‘의로운 삶’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을 온전케 한다는 주님의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모든 율법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율법’ 곧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말씀’이 ‘완전함’을 주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v. 18)고 선언하십니다.
둘째, “율법준수는 내면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종교지도자)의 위선을 고발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 23:23) 주님은 참된 율법준수는 외적준수가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마음으로 먼저 내면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도전하십니다 (마. 5:10~20).
셋째,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v. 17)라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우리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우리 각자도 그의 영 성령으로 죄와 싸워 이기고, ‘주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 (롬. 13:10)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푸르른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복된 삶 사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의 새로운 국면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의 <팔복>의 말씀을 통해 ‘천국시민’의 ‘인격적이요 영적인 복된 특성은 어떤 것인지?’ 하는 것과, 지난 시간에 이런 <팔복의 특성을 품고 살아가는 천국시민의 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자세/영향력’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그 이유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17절>에서부터 하나로 연결된 말씀이 <2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하는 ‘팔복’의 말씀을 마무리하시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 곧 ‘천국시민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양한 주제와 예시로 가르쳐 주시는데, 이것을 요약한다면, ‘성도의 의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로운 삶>이라는 주제의 긴 산상수훈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먼저 ‘서곡’과 같이 ‘의로운 삶’의 핵심 (근거)을 밝히신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은 자’의 의로움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 주께서 주제로 삼으시는 것이 ‘율법’ 곧 ‘구약성경’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제가 성도 여러분과 먼저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왜 주님은 <17절>의 말씀을 하셨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v. 17)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마치 ‘사람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 자신을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폐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자신은 결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님을 강하게 부인하며, 오히려 온전케 하러 왔음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 특히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와 같이 <율법을 폐하고자 하는 자>처럼 인식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충돌한 대부분의 사건들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 (마. 12장; 막. 3장; 요. 5장)이나 유대인들이 죄인들(부정한 자들)로 취급했던 ‘세리와 창녀’들과 친구가 되시며 (마. 11장), 씻지 않는 손으로 음식을 먹었던 주의 제자들을 ‘장로의 유전’을 범했다고 책망했는데 (마. 15장) 이런 사례들을 통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자’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공언하십니다. 결코 ‘율법이나 선지자의 예언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온전케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유대인(지도자)들, 너희가 말하는 율법의 실천과 내가 말하는 율법의 실천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을 온전케 한다는 주님의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모든 율법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고 밝힌 바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볼 때 기독교신앙을 흔들고 위협하는 여러 이단 기독교사상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했지만, 그 중에서도 최근 1~2백년 동안의 소위 ‘자유주의신학’이라 불리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신학과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번져 나간 이단사상들이 가장 심각하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논점과 목표는 제각기 다를 수 있지만, 이들 대부분에게서 볼 수 있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완전성> (=성경무오성)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내세우는 ‘이성과 논리(와 철학)’를 통해 그들은 ‘다시 성경을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인간이 쓴 성경이 완전할 수 있느냐 (오류가 없을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기적적 병고침과 심지어 ‘죽었던 자가 살아난 부활을 믿을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 자유신학의 거두라고 일컬어지는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예수가 십자가 죽음에서 실제로 부활했느냐는 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그 의미이다’라고 묘하게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할 때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만큼 중요하고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신앙전체의 핵심인지를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 불리는 <고린도후서 15장>에서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 15:16~18)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고, 우리는 헛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볼 때, 기독교역사에서 악한 영들은 성도의 참된 신앙을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공격해왔지만, 그 핵심은 ‘성경의 권위’, 곧 ‘성경의 완전성/무오성’을 공격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일단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권위가 무너지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사실 시간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그 집의 기초가 흔들리면, 그 집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v. 18) 주님의 이 말씀에서 ‘율법’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당시에서 볼 때 ‘구약성경’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구약의 모든 말씀은, 심지어 히브리어 단어로 ‘일점’ ‘일획’조차도 잘못되지 않았으며, 완전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인용하신 그 많은 구약의 말씀 중에서 단 한가지도 ‘이것은 잘못 기록된 말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율법은 단 일점 일획도 잘못되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온전히 되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저는 <존 맥아더>목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맥아더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성경은 완전하다’고 인정하고 평가하셨다면, 나도 율법이 완전함을 믿는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경은 ‘일점 일획도 폐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신다면, 저 또한 이 말씀이 완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둘째, “율법준수는 내면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복음서 여러 곳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셨는데, 그중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일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2~7)라고. 그뿐 아니라, 주님은 이들 종교지도자들의 문제점을 후반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고발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그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고 또한 고발하고자 하는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 핵심은 유대지도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나무랄 때 없이 완벽한 듯 보이는 <외적인 율법준수>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 비유로 어떤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그의 내면을 고발하셨는데, 그는 <성전에서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자기만족에 가득차서 ‘나는 토색, 불의, 간음도 아니하고,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을 감사 하나이다’ (눅. 18장)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기도’가 아닌 ‘자기자랑’인데, 이처럼 많은 유대인들이 외적인 율법준수를 통해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며, 내면적인 교만에 사로잡혀 자화 자찬하고, 자기 도취에 빠진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단지 외면적으로만 본다면 ‘전혀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하고 신령한 믿음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내면은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도전인 것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그들의 영적 상태가 ‘마치 회칠한 무덤 같아서, 겉은 아름답게 회칠했지만 그 속에는 죽은 자의 시체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음’을 날카롭게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마. 23:27). 이런 주님의 강력한 도전은 결국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율법의 정신>을 어기고 (오해하고) 있는지?’를 밝히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율법의 정신입니까?’ <율법의 정신>은 앞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주께서 선언하신 것처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율법의 정신은 ‘우리를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로우심과 긍휼하신 성품을 좇아 믿음으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외적으로는 흠잡을 것 없는 듯 종교행위를 하지만, 내적으로는 썩어 냄새 나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외식 (위선)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오늘날도 교회 안에 외식하는 자들을 향해 꾸짖지 않으실까요?! 이것이 정확히 주께서 오늘 말씀의 이어지는 <19-20절>에서 도전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v. 19~20)라고. 이 주님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영적 상태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다시 말해 ‘천국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고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온전케 하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율법주의’ (legalism)에 빠지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이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추구함으로 <겉과 속이 서로 연결되는 ‘통합적인 삶’>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내면적 삶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 점점 더 율법주의의 위선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아름답고 진리에 충만한 생명으로 겉과 속이 서로 연결되고 통합된 삶을 살아가십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이것이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또한 자신이 ‘왜 이 땅에 온 것인지?’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v. 17)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율법을 완전케 하시겠다는 주님의 뜻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구약성경>의 <신명기>말씀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명기서>에서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율법준수를 당부하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신. 4:4)라고. 또한 모세는 <신명기서>를 마무리해 나가면서 <27장>에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 (신. 27:26)고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선언은 ‘모든 율법의 말씀은 행해야 한다’는 것이요, ‘만약 행치 않는다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 당시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신실한 유대인들은 ‘모든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 곧 ‘구약성경의 말씀’을 행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결과는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의 한계와 곤고함을 토로했던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4,19)라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로마서7장>에서 고백하는 핵심은 ‘자신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기 간절히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처절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내 속에 있는 죄의 힘이 자신을 사로잡아서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나’라는 <1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이런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는 영적 능력의 한계>를 자신에게 국한했지만, <로마서 7장>에서의 ‘죄 아래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은 “모든 인간존재의 모습”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런 죄에 대한 절규와 탄식을 통해 바울이 결론적으로 던진 질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롬. 7:24)는 것입니다. 누가 건져낸다고요? 그 대답이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몸에서 그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롬. 8:1-2).
저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것’이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이렇게 주께서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이 영적으로 볼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율법은 비록 선하고 완벽하지만 율법자체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이 선한 율법의 요구를 자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만족시키심으로 우리가 행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값을 대신 지불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죄 없다’ 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셔서, 주님 자신의 의로움으로 우리 성도가 이제는 율법을 넉넉히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죄와 싸워 이길 권세를 통하여, 그리고 내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율법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밝힌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롬. 13:10). 그럼으로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오늘 선포하신 ‘율법을 온전케 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 때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쩍어 하기도 하고, 불만스러워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그분의 율법의 말씀만이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고,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율법의 말씀을 묵상해 나감으로 물가에 심은 의로운 나무처럼 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시절을 좇아 푸르른 잎사귀와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시민 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