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One Who Are Hunger & Thirst for Righteousness)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One Who Are Hunger & Thirst for Righteousness)
1-26-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설교 요약]
이번주는 예수님의 <팔복>의 네번째 말씀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헬라어 원어는 단순히 ‘배고프고 목마른’ 정도의 상태가 아닌 ‘극심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처럼 간절하게 ‘의’에 대해 목말라하고 추구하는 지를 우리들에게 도전하십니다.
먼저 무엇이 ‘의’ (righteousness)일까요?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의’에 대해 <매튜 헨리>는 “새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 그리고 <옥한흠>목사는 “의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지?’는 하는 이유는 <로이드 존스>의 비유처럼 ‘본질적으로 인간이 죄라는 질병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행복이 상실되고 고통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죄라는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선 오직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How do we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그것은
첫째, “구원을 목말라 함으로써” (By thirsting for our salvation)입니다: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고 모든 인생의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목말라 합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영생의 물을 마시셨습니까?
둘째, “성화를 추구함으로써” (By pursuing for our sanctification)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또한 성도의 ‘성화’를 뜻합니다. 이 ‘성화’는 <신자의 삶의 푯대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날마다 본받는 것>이요, 이 성화를 통해 성도는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함으로써” (By seeking first God’s Kingdom)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 것’ (마. 6:25~32)을 가르쳐 주시고 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릴 영의 만족과 배부름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번주는 예수님의 <팔복>의 네번째 말씀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반어법>적으로 ‘기쁘고, 즐겁고, 넉넉한 자’가 아니라, 반대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 이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도리어 복된 자라고 오늘 말씀에서 선언하십니다.
저는 먼저 무엇이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의 의미인지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한 여름날에 오랫동안 뜨거운 태양 빛 아래 땀을 흘리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심한 갈증을 뜻하는데, 성도 여러분은 이런 갈증을 기억하십니까? 또한 배고파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굶주림을 여러분은 경험해 보았습니까? 사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자라난 청년들 중에서 죽을 것 같은 굶주림의 고통을 경헌한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단지 본인 스스로 마음먹고 철저하게 ‘다이어트’를 한다든지, 혹은 어떤 조난 사고와 같은 경험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주리다”라는 헬라어 원어는 <페이논테스>로서 “배고프다, 궁핍하다, 열열히 갈망하다”는 뜻이고, “목마르다”는 헬라어 단어는 <딥소테스>인데 그 뜻은 “목마르다, 갈급하다”입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단순히 몇시간 물 마시지 못해 느끼는 갈증이나, 몇 끼 식사하지 못함으로 느끼는 배고픔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 빈사상태의 배고픔과 갈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매일 물을 마시고, 음식 먹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렇게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주리고 목마름을 강하게 느끼듯이, 그렇게 간절히 ‘의’에 대해 갈급히 추구하고 있는지를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질문하고 도전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께서 산상수훈의 <팔복>을 어떻게 밝혀 나가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주님은 ‘누가 복된 자인지’를 선언하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그리고 온유한 자’가 복된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복된 자의 공통점은 ‘심령이 가난한 자’ 뿐 아니라,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 모두 ‘천국을 소유한 자’임을 우리는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복 있는 자의 특성을 언급하실 때 그 연속성과 발전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앞의 3가지 복 있는 자, 곧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는 그 특징인 ‘자신의 죄성을 가슴 아파하고,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겸손하고 애통하게 성찰하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할 때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복’을 누리게 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 말씀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역시 ‘하나님의 구원받은 천국 시민’이라는 공통점에 기반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 그 관심을 <자신의 성찰>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께로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 발전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특성이 구체적으로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의 특성’임을 주님의 말씀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중심 단어인 ‘의’ (righteousness)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새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한편, <존 맥아더>목사는 이 ‘의’는 “‘구원’ (salvation)과 ‘성화’ (sanctification)을 의미한다”라고 그의 팔복 강해설교에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여 “본질적으로 인간의 참된 행복은 거룩해지는 것에 달렸습니다”라고 의의 필요성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옥한흠>목사는 “의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처럼 ‘무엇이 주께서 말씀하신 ‘의’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인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서, 자신이 ‘외과 의사’였던 경력에 걸맞게 <인간과 질병이라는 관계>의 훌륭한 비유를 통해 ‘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의’ 대신 취할 때는 행복은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의를 구하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고통스런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이 사람의 고통을 제거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매우 서투른 의사입니다. 그 고통을 일시 멈추게 하고자 진통제만을 사용한다면 결코 그 병을 치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의 기본의무는 그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인 질병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골자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이 행복을 추구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라는 질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그 죄로 인한 고통 가운데 원초적으로 그 상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의사’로부터 진통제만을 처방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행복을 줄 것 같은 ‘많은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명예’를 통해, ‘육체적 쾌락’과 ‘지식’과 ‘건강’과 ‘자식의 성공’등 다양한 처방으로 행복을 쟁취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물론 ‘물질과 건강과 우리가 살아가면서 요구되는 다양한 일용한 양식’이 필요함을 우리 모두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 다닌다는 성도들 조차도, 이 집회 저 집회 쫓아다니고, 뜨겁고 흥분된 영적 황홀감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본질적인 것으로 결코 우리의 주리고 목마른 영혼은 배부름과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이 참된 행복은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으로 비로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은 오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욕구’요, ‘죄를 제거하려는 욕구’요, ‘죄를 지으려는 욕망에서 해방되려는 욕구’>라고 로이드 존스는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요, 만족하게 될 것이요,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성도 여러분과 마지막 질문을 해 봄으로써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 수 있을까?” (How do we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주께서 도전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을 실천하며 살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구원을 목말라 함으로써” (By thirsting for our salvation)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서 중의 복음서라고 하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왜 자신이 그토록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지?’를 이렇게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그리고 나서,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복음’의 본질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고 말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인 것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기 때문’이요, 복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우리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허락하신 그분의 <의>를 목말라 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목말라 하는가?’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간절히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받으면 받고, 안 받으면 말고’ 라는 식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으셨습니까?
<이사야 55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인생의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고. 이 물은 세상 그 누구도 돈을 주고, 값을 치르고 살 수 없는 값진 물이기에 거져 주시는 물입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돈 없이, 값없이 목말라 하는 자에게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물입니다. 이 물은 마시고 되돌아서면 또 다시 목마른 세상의 물이 아니라, 한번 마시면 두 번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영원히 그 속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물입니다. 그리고 이 물은 주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셨듯이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요. 4:14)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거져 주신 영원한 샘물’이요, 곧 ‘구원받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샘물은 영원히 솟아 나옴으로서 마르지 않는 성령을 통해 허락하신 영생의 기쁨이요,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첫 시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 축복의 핵심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축복 되고, 그 영혼이 참된 배부름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죄 씻음 바 되어 영생의 구원받아 천국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구원을 목말라 합니까? 그리하여 구원을 선물로 받으셨습니까?
둘째, “성화를 추구함으로써” (By pursuing for our sanctification)입니다: 오늘 주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특성을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분별해야 하는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 ‘구원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받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거듭난 성도의 ‘영적 삶’의 축복된 출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듯이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지금부터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신 수없이 많은 은혜의 복들을 누리는 것은 결코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어떤 행위로 얻을 수 없기에 값없이 돈없이 거져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그 자녀의 놀라운 신분으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가르치심으로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저절로 그 약속의 은혜가 넘쳐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요? 거듭난 성도는 이제 ‘성화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선언한 ‘복음 안에서 드러난 의’는 우리 성도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이제 성도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장성한 분량’을 향해 자라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를 이루어 갈 것인가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 안에 그 핵심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날마다 성화를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를 간절히 추구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시편 42편>기자를 저는 꼽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시. 42:1)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날마다 자라나고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 갈까요? 그것은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온 힘을 다해 나의 육신의 정욕을 죽여 나가고, 온갖 노력으로 선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사랑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대상 ‘하나님 아버지와 더 가까이하고, 함께 연합하고자 하는 열망을 통해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추구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적 원리임을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화의 출발과 끝은 그 어떤 나의 노력 이전에 먼저 내속에 그분의 영원한 생명으로서 거하시고, 그의 영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과 연합하기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성화를 통해 주께서 약속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함으로써” (By seeking first God’s Kingdom)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크리스챤들이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어떻게 올바로 행해 나갈 것인가를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 내용 중에는 ‘이웃에 대한 구제’, ‘기도와 금식’ 그리고 ‘소유’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을 주시는 가운데 주님은 ‘결코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1-32)라고. 선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 것이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너무도 잘 아실 뿐 아니라, 신실하게 공급해 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마. 6:33)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을 마무리하시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결론 (골자)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 선하신 하늘 아버지는 너희의 모든 필요를 따라 신실하게 채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한가지 진정으로 추구하고 소망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이다. 다른 모든 것은 전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너희가 할 (힘쓸)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이것이 명확한 주님의 결론이라면, 무엇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오늘 지금까지 함께 나눈 ‘의’가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별도의 개념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의’는 동일한 개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음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통해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는 구원을 소망하고, 더 나아가 구원받은 그의 복된 자녀되어 주님 만나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나기를 추구하는 성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전에 예정 (작정)하신 ‘완전한 구원’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이라고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가지 우리 모두가 놓치지 않기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인가?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전도’하는 것, ‘예배하고 신앙적인 것’이 전부일까요? 우리는 혹시 신앙과 세상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시간만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그 밖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결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순간 하루 24시간 그리고 일주일 7일을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께 아름답게 드려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추구하는 삶’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그러므로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는 삶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십니까?’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축복을 누려 가십니까? 바라기는 날마다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깨닫아 감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된 삶의 열매임을 믿습니다. 이런 영의 배부름과 만족의 은혜를 날마다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