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같은 자” (A Person Like A Pestilent)
“전염병 같은 자”
(A Person Like A Pestilent)
8-18-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4:4~5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But in order not to weary you further, I would request that you be kind enough to hear us briefly.)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For we have found this man a pestilent fellow, and a mover of sedition among all the Jews throughout the world, and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
[설교 요약]
먼저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24장>에서 사도가 유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 그를 고소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더불어 변론함을 보게 됩니다.
<24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행. 24:1)라고.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몇 장로들과 함께 더둘로라는 변사, 곧 ‘변호사’를 대동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하러 온 것입니다.
저는 변사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 내용에 담긴 ‘거짓과 진실’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먼저, 그의 주장이 거짓인 것은
- 벨릭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벨릭스가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동안 ‘(유대인들이) 태평을 누리고, 개량된 것’ (v.3)이 아니라, 민란과 잔인한 탄압이 있었음을 역사가는 기록합니다.
-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모함합니다: 더불로는 바울을 마치 유대 이단종파의 두목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로마정부에 반란을 일으킬 것처럼 모함하는 것입니다 (v.5)
- 바울이 ‘성전을 더렵혔다’고 잘못된 주장을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 ‘드로비모’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21:27-29), 그는 거짓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v.6).
한편, 더둘로는 그의 주장 가운데 역설적인 진실을 내비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은 바로,
- 바울을 ‘전염병과 같은 자’ 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악성 전염병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바울은 사람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강력한 전염병처럼’ 복음을 전파시킨 것입니다 (v.5a).
- 바울을 ‘나사렛 예수의 우두머리’로 인정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단종파의 두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 이방의 사도로써 어떤 사도들보다 헌신하고 섬기는 리더인 것입니다 (고전. 15:10).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사도 바울과 우리를 앞서간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과 같이 생명의 복음을 강력하고 편만하게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참된 기독교인에 대한 정의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우리 각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점을 <C.S 루이스>는 그의 대표적인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은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조에)를 소유함으로 살게 된 ‘새 사람’ (=the new man)>이라고 정의한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생명없이 살아가는 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의 말과 바울 자신의 진술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사도 바울과 그리고 우리를 앞서간 수많은 성도들의 삶을 이해하고,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복된 믿음의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24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 말씀을 포함해서 끝장 <28장>까지 다섯장이 남았다는 뜻이요, 큰 그림에서 볼 때 <사도행전>은 마지막 종반부로 접어 들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사도 바울에 관련한 행적은 <9장>에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회심하는 내용이 기록된 이후에 본격적인 바울의 사역이 <13장> 이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눠 볼수 있는데, 전반부는 <13~20장>으로서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1~3차 전도여행’을 통해 행한 ‘전도/선교’ 사역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21~28>으로서 바울이 죄수의 몸이 되어 유대공회원들과 세상 왕과 위정자들 앞에서 ‘재판받는 과정’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볼 때, 전반부의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선교사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도행전의 핵심적 내용이요, 우리 성도가 배워 나가야 할 복음사역의 본질임을 우리 모두는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후반부의 ‘총 8장’에 걸친 사도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소송과 바울 자신의 변론’으로 이어지는 <재판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저자 누가가 사도행전을 마무리해 가는 마지막 8장을 할애해서 사도 바울 한 사람의 재판과정을 소상히 다룬데는 그만큼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결코 후반부에는 <소송사건>의 배후에 담긴 매우 영적이고,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누가는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기록하였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제 남은 <사도행전>강해설교를 통해 이와 같이 바울의 소송사건 이면에 담긴 하나님의 뜻 (이끄심)이 무엇이며, 이것을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보를 강력하게 가져오는 것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 본문이 속한 <24장>에서 사도가 유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 그를 고소한 유대종교지도자, 곧 대제사장과 여러 장로들과 더불어 변론함을 보게 됩니다. <24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행. 24:1)라고. 바울은 헤롯궁에 구류된 지 5일 후에 그를 고소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몇몇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변사, 곧 ‘변호사’를 대동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에게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돈을 주고 더둘로라는 변사를 고용하여 그를 통해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둘로는 말합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 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v.3)라고. 더둘로는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거짓말로 총독 벨릭스의 귀를 즐겁게 할 아첨의 말을 쏫아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v.4-5)라고. 더두로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도 바울을 모함하고 헐뜯는 주장을 시작하며, 사도 바울을 한마디로 “이 사람은 염병이라” (v.5a)라고 정의합니다. 이 말을 <우리말성경>에서는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염병 같은’은 영어로는 ‘pestilent’인데, 그 의미는 <성가신, 위험한, 치명적인, 전염성이 강한~>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pestilent’라는 단어는 ‘흑사병’이라 불리는 ‘페스트’ (pest)와 같은 개념의 단어입니다. 이 ‘흑사병’ (Black plague)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서 14세기의 중세시대에 유럽을 휩쓸고 간 이 페스트병은 그 당시 총 유럽인구의 절반 가량인 약 1억여명에 해당하는 목숨을 앗아간 가공할만한 전염병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수백년 전의 전염병 뿐 아니라, 현재 우리 모두가 충격과 고통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코비드’는 오늘날의 치명적인 전염병인데 이 바이러스가 발병한지 수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위험성을 함께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둘로는 바울을 이와 같은 ‘전염병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변사 더둘로의 말을 중심으로 그의 말 속에 남긴 ‘진실과 거짓’이 무엇인지를 분별해 보면서 우리 각자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먼저, 그 말의 <거짓>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면,
첫째로,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보듯이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v.3)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거짓말인 것입니다. 사실 총독 벨릭스 (Felix)는 글라우디오 황제 어머니 안토니아 집안의 노예 출신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그가 유대총독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표적 인물’이 벨릭스였기에,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휘둘렀다’고 묘사했습니다. 물론 그는 유대총독시절에서도 악명이 높았는데, ‘피의 대학살’로 불리어지는 유대인 폭동을 진압하는 사건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탐욕과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의 진정서로 인해 로마 황제에 의해 총독에서 해임되고 폼페이로 유배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민족을 포악하게 다스리고, 끊임없이 폭정을 일삼았던 자에게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 여러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 감사 무지하옵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치졸한 아부성 발언이요, 재판을 잘봐 달라는 감언이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모함합니다. 이렇게 더둘로가 바울을 묘사하는 데는 정치적인 계략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민족을 포함한 로마제국이 식민통치 하여 다스렸던 여러 나라들이 있었는데, 유대민족들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로마통치에 순종적이라기 보다는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고 민족으로 유명했고, 그 반란의 대표적인 원인의 하나가 ‘거짓 메시야’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심심찮게 어떤 자들이 일어나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야를 자칭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제국의 통치를 거부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러 식민지역을 다스려야 했던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유대지역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꾸러기처럼 늘 골치 아픈 대표적인 민족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유대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렸던 로마의 유대총독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반란이나 민중동기>를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다루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더둘로는 교활하게 총독이 매우 우려하고 민감해 하는 ‘민란’을 바울이 선동하여 일으킬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내 뱉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v.24:5)라고. 이 말 속에서 “이 바울이라는 자는 나사렛의 이단종파의 두목이 되어 백성들에게 거짓된 가르침으로 그동안 로마제국을 성가시게 했던 여러 반란의 무리들처럼 틀림없이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로마제국과 맞써 싸우고자 할 것입니다”라는 식의 정치적인 선동과 자극적인 모함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전혀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거짓된 주장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셋째로, 더둘로는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더둘로는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v.6)라고 거짓주장을 합니다. 이런 그의 주장에 대해서 바울의 변론을 들어보면, 그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안 되었고,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v.11~13)라고. 한편, 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사건은 우리가 <21장>에서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절기를 보내며 성내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는 것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 고소했던 사건 (21:27~29)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더둘로는 이런 잘못된 주장을 근거로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 감으로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성전 뜰 안’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죄명을 씌워 바울을 고발한 것입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한번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단지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의 말만 믿고 이렇게 고소하는 대제사장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그 말을 근거로 허황된 고소를 하는 더둘로의 행위가 얼마나 근거가 미약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더둘로가 비록 바울을 죄인으로 엮어 매고자 거짓되게 주장한 것이지만, 가만히 보면 그 속에 진리가 있는 몇 가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바울을 ‘전염병과 같은 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v.5a)라고 더둘로는 주장합니다. 먼저 우리가 앞서서 ‘전염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잠시 살펴보았는데, 마치 중세시대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매우 치사률이 높았던 ‘페스트’와 오늘날 현재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코로나’와 같은 ‘매우 전염성이 강하고 전세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균에 의한 병’이 이와 같은 전염병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매우 공포스럽고 사람들을 무서운 속도로 위험에 빠트리는 이 병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긍정적으로 볼 때,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비유적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매우 강한 영향력을 받게 되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거짓 이단종파의 사상은 마치 ‘악성 전염병처럼 교회 안에 삽시간에 퍼져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단과 사이비종파들의 공격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있는지를 지금 이 시간에서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생각해볼 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는 사도 바울과 충성된 성도들은 긍정적 의미에서 마치 전염병과 같은 자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게 될 때, 한번 주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게 될 때 진리와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강력한 전염 바이러스가 옮겨가듯, 주의 복음의 능력과 은혜가 삽시간에 옮겨가고 그 사람과 주위의 이웃들에게 복음의 흥왕한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점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단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이단들이 많아서라기 보다도, 이런 이단을 물리치고 세상을 향해 ‘전염병처럼 강력한 복음의 영향력을 미칠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 <바울을 ‘나사렛 예수의 우두머리’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더둘로는 “이 사람은 ~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5b)고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물론 그는 바울을 모함에 빠트리고자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사렛 이단’이라는 말 자체가 ‘나사렛에서 시작된 예수라는 사이비 교주를 추종하는 이단집단과 그 사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더둘로는 바울을 ‘나사렛에서 발생한 이단종파의 우두머리 되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거짓된 것임을 이미 앞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편 여기서 유대인들이 갔다 붙인 ‘이단’이라는 모함만 뺀다면 상당한 진실이 이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더둘로의 주장에 대해 바울 자신이 이렇게 분명히 그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v.14-15)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가 된 이후에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정말 온 힘을 다해 그 어떤 주의 사도들보다도 더욱 주님을 증거하는 것에 힘써 살아왔고 온 삶을 바쳤던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라고 바울은 거짓없이 그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죄인 중의 우두머리’(딤전. 1:15)였음을 숨김없이 고백할 뿐 아니라, 현재 자신은 자격없는 자를 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주신 ‘우리 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복음의 빚진 자로서 가장 앞장서고 열심된 사도’임을 그는 숨김없이 밝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섬김으로서 우두머리’된 바울의 영적 모습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복음의 사도로서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더욱 열심히 주의 증인과 제자로서 살아온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영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을 모함하는 변사 더둘로를 통해 이해하게 되는 거짓주장과 또한 역설적인 진실은 무엇일까요?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의 복음과 그 생명을 ‘치명적 전염 바이러스’를 보균한 자처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증거하는 이런 영적인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전염병 같은 사람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우두머리’라는 비난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처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합니까? 바라기는 그 어떤 세상의 핍박과 악한 영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주의 생명으로 새사람 되었다면, 이제 주께서 주신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축복된 주의 증인들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