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30, 2024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Separated The Disciples)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9:8~10
Service Type: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Separated The Disciples)

6-30-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9:8~10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동안을 담대히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Paul entered the synagogue and spoke boldly there for three months, arguing persuasively about the kingdom of God.)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But some of them became obstinate; they refused to believe and publicly maligned the Way. So Paul left them. He took the disciples with him and had discussions daily in the lecture hall of Tyrannus.)

10 이 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This went on for two years, so that all the Jews and Greeks who lived in the province of Asia heard the Word of the Lord.)

[설교 요약]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의 에베소사역에서 사역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사도는 에베소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도 석달동안이나 온 힘들 다해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어떤 자들은 마음이 굳어지고 도리어 바울이 전하는 도를 비방하게 되었을때, 그는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두란노 서원에 따로 세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두란노사역을 귀하게 쓰임받게 한 것일까요?그것은

첫째, ‘제자들을 따로 세움’으로써 입니다: 사도는 결심함으로, 유대인들의 핍박과 방해를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v.9a) 이제 바울은 주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을 두란노서원에 따로 모으고 말씀으로 그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둘째, ‘날마다 가르침’으로써 입니다: “바울이 ~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 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v.9b~10a) 여기서 바울의‘말씀사역’의 핵심은 <집중성>과 <지속성>입니다. 그는 에베소 한교회에 대해, 2년동안 날마다 말씀으로 섬긴 것입니다.

셋째,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두란노서원>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가리지 않고, 방문한 모든 자들에게 2년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v.10). 유대인 회당에서는 꿈꿀수 없는 만민을 향한 복음전파의 강력한 기회가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아포슬공동체가 함께 말씀으로 훈련받고, 수많은 청년과 한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리는 말씀의 ‘두란노’가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12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안수하셨을때, 성령께서 임하시는 사건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의 탁월한 <말씀훈련>의 사역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사역의 특성과 강점이 무엇이며, 우리가 사도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말씀으로 서로를 섬기고, 주님의 양들을 그 필요를 따라 채워주고 성장시켜 줄수 있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 되시길 기대합니다.

먼저 사도바울이 그의 <3차 전도여행>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하는 ‘에베소’지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주의 수도이자 항구도시로서, 당시 로마의 최대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역 중의 하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문화와 철학과 예술의 도시로서 특히 ‘달의 여신’으로 불리는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럼으로 이와같은 ‘아데미 여신’에 대한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이곳 에베소였기에, ‘아데미신전’에 필요한 조각우상을 다듬고 제작하는 <금은세공업자들>이 이것을 통해 그동안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지역에서 ‘손으로 만든 것들은 헛된 우상’임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 자신들의 생업이 크게 위협 받는 것에 분노하며 그들이 사도바울을 잡아 크게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내용이 <19장> 후반부 <20~4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곳 에베소지역은 영적으로 볼때 우상숭배와 악한 영들이 장악한 도시임을 잘 이해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건, 이제 바울이 에베소에 다시 방문하여 12명의 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주고 안수했을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그들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에베소 성도들에게 사도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안수함으로 그들이 성령받게 된 사건을 성경학자들은 특별히 주께서 사도들에게 허락하신 <사도권>의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을 통해 사도 베드로가 행했던 여러 표적과 기사를 살펴보았듯이 그를 이어 사도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고,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게 하고자’ 주께서 이런 놀라운 권능을 그에게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 구체적인 바울의 영적 능력이 오늘 본문 다음절인 <11절>에서부터 <20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v.11-12)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의 ‘이방의 사도’로 세우신 바울을 통해  놀라운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사도의 놀라운 초자연적 능력보다도 더욱 성도들을 주님의 몸된 교회공동체 가운데 하나되게 하고, 주의 생명의 말씀이 흥왕 (부흥)할 수 있도록 사도가 쓰임받을수 있었던 핵심은 바로 오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곧 ‘두란노서원’의 <말씀사역>인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늘상 그러해 왔드시, 방문하는 그 지역에 유대인회당이 있을시는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곳 에베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말씀, <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동안을 담대히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v.8)라고. 사도는 석달가량을 회당에 가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사도행전에서 보면, 사도가 회당에서 ‘복음’ 혹은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기록했지만, 오늘 본문 <8절>말씀에서 저자 누가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라고 설명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통해 제가 이해할수 있는 것은 사도가 ‘에베소교회’에서 전한 내용(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라, 누가가 표현한데로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또 다른 이름(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고 다스리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 회당에서 석달동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시고, 통치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담대하고도 구체적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어떤자는 그 생명의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가하면, 어떤 자들은 도리어 마음이 더욱 굳어지고 완악해져서 말씀에 순종치 않고 도리어 복음을 비방하고 바울을 대적했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중요한 결심을 합니다. 그것이 <두란노서원>을 세우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사도 바울의 여러가지 충성되고 담대한 그의 복음사역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의 ‘에베소지역’에서 행한 <두란노서원>의 말씀사역이 왜 그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사역에 그토록 복되게 쓰임받게 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바울의 두란노사역을 귀하게 쓰임받게 한 것일까요?그것은

첫째, ‘제자들을 따로 세움으로써 입니다: 그동안 사도바울의 사역을 우리가 계속 살펴보면서 제가 한가지 놀랐던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의 자기 민족, 유대인을 향한 포기할줄 모르는 복음의 열정과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는 그의 첫 ‘1차전도여행’을 시작할 당시 ‘이고니온’에서 복음전도 하던 중 시기와 분노에 가득찬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반 죽게 될만큼 심한 핍박을 당했던 사건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가 얼마나 심하게 맞았으면 유대인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고가 내버려두고 왔을 정도였습니다 (행.14:19). 더욱이 이런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은 처음 1차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부터 오늘 3차여행의 사역이 에베소에서 진행되기까지 단한번도 예외없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사도가 유대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했을때,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의 제자가 되는 복된 역사가 벌어지는가 하면, 또한 더욱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성령을 대적함으로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복음사역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떄가 되었을때 사도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집요하게 복음을 방해하는 에베소 유대인 회당에서 당했던 육체적 그리고 영적 핍박과 갈등을 겪지 않고, <두란노>라는 서원에서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마음이 열린 제자들을 복음으로 넉넉히 섬기고자 따로 세웠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v.9a) 그렇다면, 여기서 ‘두란노서원’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신학자들은 그 당시 ‘서원’은 <스콜레/scole>라고 불렸는데, 이는 헬라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마련한 오늘날 ‘학교’(school)에 해당하는 ‘강론의 장소’ 곧 ‘개인 학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란노’라는 이름의 헬라식 원어의 이름은 ‘티란누스’인데, 이 사람은 에베소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사학자로써 그 당시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지도하에 이곳 ‘티란누스서원’에서 배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헌에 의하면 이곳 서원들은 이 지역의 특성상 ‘한 낮의 태양볕’이 작렬하는 시간인 ‘오전11에서 오후4시’까지를 피해서 서원문을 닫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했는데, 사도바울과 에베소성도들은 바로 이 시간을 이용해서 모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여유있는 헬라철학자들과 그들의 제자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마음껏 낮잠자거나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즐겼지만, 바울과 제자들은 육적인 그리고 영적인 잠에서 깨어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 더운 낮에 함께 모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주님의 제자들은 분명히 세상의 것들과 분리되어 따로 세워져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함을 믿습니다. 남들 잘때 다 자고, 남들 쉴때 다 쉬고서는 주님의 제자로 세움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받을수도 없고 줄수도 없는 진정한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수 있고, 생명의 복음으로 훈련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때, 진리와 삶의 의미에 목말라 하는 수없이 많은 청년과 한인들은 21세기의 <두란노서원>으로 몰려올 것을 믿습니다. 저희 아포슬교회는 이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게 하는 작지만 신실한 미드타운의 ‘두란노 서원’으로 준비되고 있습니까?

         둘째, ‘날마다 가르침으로써 입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한가지 진실을 말씀드려 볼까요!? 여러분은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모임’ (meeting)이 동일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습니까? 이들테면, 한달이나 일년이라는 일정기간동안 성도 여러분의 친한 친구를 만나는 횟수나 학교나 회사에서 팀 프로젝트를 위해 만나는 횟수, 혹은 막연히 아는 지인을 만나는 횟수가 모두 동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아닐것입니다. 아주 친한 친구나 필요상 당장 급한 만남은 한주에 몇번을 만나더라도 부족할 수 있고, 반대로 별로 가깝지 않은 지인이나 급하지 않은 공적 미팅은 한달에 한번도 많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에게 있어서 ‘우리 아포슬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만나는 횟수’는 어느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까? 1주에 한번 주일에 만나서 ‘예배’보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십니까? 이것도 부담됩니까? 아니면, 가능한 더 보고싶고 더 만나고 싶습니까? 솔직히 우리 스스로가 서로의 만남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그 횟수만큼이 우리 공동체의 ‘영적 친밀성’을 측정하는 하나의 진실 (기준)은 아닐까요?

오늘 말씀에서 저를 놀라게 하고 강하게 도전하는 것은 사도바울은 이제 유대인 회당에서 따로 나와 <두란노서원>이란 장소를 이용해서 제자들을 만났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 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v.9b~10a)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날마다 제자들을 만나서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주일날 한번 만나 예배드리고 친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데로 날마다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다섯시간 동안 바울은 말씀을 전하고, 제자들은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강둑에 서서 말씀이라는 강물을 팔을 길게 뻣쳐 손으로 물 한모큼을 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수 강에 풍덩 뛰어들어 그 말씀에 온 몸을 담그고 그 강물에 몸을 맡겨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즐기고 마음껏 말씀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날마다 몇 시간씩 깊은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또한 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자 두란노사원에 모여든 구도자의 모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안식일 뿐 아니라, 매일 두란노서원에 모여 2년간을  매일 말씀으로 제자들을 깊고 신실하게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사실 수없이 많은 이방만족의 사도로 세움을 입은 바울로서는 한 지역에 집중하여 오랜기간 머물면서 강도높은 말씀의 사역을 행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새로운 교회가 형성되고, 어느 정도 교회를 섬길 리더들이 세워지면, ‘이제 새로운 미개척지역으로 가야하지 않을까?!’라고 대다수의 복음전도자들은 조급함이 들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은 복음을 듣지못한 이방민족에 대한 빚진 마음과 열정의 반로이기에 충분히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로부터 배우게 되는 <충성되고 열매맺는 사역>의 핵심은 ‘다양한 미전도지역’에 대한 그의 왕성한 전도여행의 발자취 뿐 아니라, <한 선교지역에 대한 강도 높고 집중적인 말씀의 훈련>을 그가 행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매일 5시간씩 2년동안 지속적으로 행해졌던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의 강도 높은 말씀훈련 (제자훈련)이었습니다. (* 실제로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행.20:31) 그리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사도바울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열심과 성령을 통해 깊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풀어 해석하고 탁월하게 가르치는 바울의 영적 은사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에베소성도들의 복음에 열린마음과 적극적인 동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2차전도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로 에베소를 잠시 방문했을 때, 여러 성도들이 바울이 더 오래 있기를 강청했던 사실 (행.18:19-20)에서도 잘 알수 있듯이,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그처럼 강렬했기에 이런 두란노에서 벌어진 깊고 풍성한 말씀훈련에 기초한 영적 부흥의 역사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셋째,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바울이 두란노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확장에 귀하게 쓰임받을수 있었던 이유는 사도가 <두란노서원>을 통해 복음증거를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해할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는 새로운 사역의 중심지인 <두란노서원>에 있어서, 그동안 그가 복음을 변론했던 유대인 <회당>과의 차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던 것입니다. “이 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v.10)라고.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수 있듯이,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그곳에 들어가서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이요,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소위 유대인들이 ‘신성히 여기는 회당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른말로 하면, 구원의 복음을 듣는 사람이 그만큼 제한적일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유대 회당안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두란노서원>은 전혀 그렇치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이곳은 사도가 두란노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강론하는 2년동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지식인이나 무식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가리지 않고 이곳을 방문하고 말씀에 관심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듣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선포했듯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는 것과 같이 누구든지 두란노서원에 와서 복음의 말씀을 마음컷 듣고 질문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 회당에서는 결코 꿈꿀수 없는 이방인과 불신자들을 향한 복음전파의 강력한 기회가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두해동안 소아시아에 있는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과연 ‘우리 아포슬교회가 진정 학생청년교회라고 말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수없이 많은 청년들을 만날수 있는 ‘두란노서원’은 과연 어디인가?’라고 진지하게 저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저의 어두운 눈을, 그리고 우리 청년들의 눈을 열어 ‘우리 아포슬공동체가 함께 모이고, 또 수없이 많은 청년들이 말씀으로 모여들게 할 두란노는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신구약 성경전체에서 가장 긴 <176절>을 가진 <시편 119편>에서 저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119:9-10)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청년이 그 행실을 깨끗케 할수 있는 길은, 그 삶이 진리와 생명으로 열매맺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하며, 그분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이렇게 간절히 구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시간 이렇게 간구합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의 어두운 눈을 열어 아버지의 아름다운 법의 놀라우신 진리를 보게 하소서. 그리고 아버지의 새벽이슬같은 복된 청년들에게 은혜내려 주셔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처럼 아버지를 아는 지식과 임재를 간절히 추구하게 하시고, 꿀송이보다 말씀을 더 사랑함으로 아버지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함받고 사랑받는 청년들 모두 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함께 모인 그 두란노로 인하여 이곳 아틀란타의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은혜의 역사가 우리 아포슬 공동체를 통하여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