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이 많도다” (You Are Very Religious)
“종교심이 많도다”
(You Are Very Religious)
6-9-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7:22-23 (24-31)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Paul then stood up in the meeting of the Areopagus and said: “Men of Athens! I see that in every way you are very religious.)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 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For as I walked around and looked carefully at your objects of worship, I even found an altar with this inscription: TO AN UNKNOWN GOD. Now what you worship as something unknown I am going to proclaim to you.)
[설교 요약]
이제 바울은 이어지는 <사도행전 17장>말씀에서 고대 유럽의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인 그리스의 수도 ‘아덴’ 곧 ‘아테네’에 가서 복음을 힘있게 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테네의 많은 사람들 (‘에피쿠르스’와 ‘스토아’학자등)과 변론하며, “에덴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v.22)라고 복음의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먼저 그들을 향해 ‘종교심이 많도다’고 말한 이유는 ‘이미 아테네사람들은 수 없이 많은 신들을 믿었음에도, 여전히 그들이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신’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v.23).
이와 같이 바울은 어느 신전 입구에 돌판에 새겨진 문구, 곧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귀를 인용함을 통해, ‘여러분이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추구하는 그 신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그것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겠습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시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며, 인류를 한 혈통으로 정하시고, 역사와 나라의 경계도 정해 주셨는데,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v.27)고 하나님의 뜻을 밝힙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메시지는 그가 말한데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이 전하는 기쁜 소식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테네시민들이 ‘종교심이 많다’고 할찌라도,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깨닫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더욱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된다’ (v.29)
-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v.24)
-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 (v.25)
셋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를 믿어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가족과 이웃에게 구원의 복음을 힘있게 전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시간에 베뢰아 성도의 뜨거운 영성과 냉철한 지성을 겸비한 성숙된 믿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베뢰아 성도의 균형 잡힌 믿음의 자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도전하신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이어지는 <사도행전 17장>말씀에서 고대 유럽의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인 그리스의 수도 ‘아덴’ 곧 ‘아테네’에 가서 복음을 힘있게 전합니다. 이와 같이 이방민족에 나아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력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대화법을 통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탁월한 복음전파의 능력과 유연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이 아테네시민들에게 주의 복음을 힘있게 전했던 것처럼,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그들의 관심과 필요를 따라서 상황에 맞춰 지혜롭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대구에서 <대건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이 학교는 ‘카톨릭 재단’에서 ‘김대건’신부의 순교를 기념하여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닐 당시 <종교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한가지 말씀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을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만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해 나가는데, 그러다 보면 두가지 마지막 선택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것은 ‘죽음이냐?’ 아니면 ‘종교냐?’라는 것입니다”라고요. 그때 선생님은 자신이 말한 ‘죽음과 종교’라는 두 단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제가 선생님의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두가지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 인간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어떤 의미도 목적도, 계획도 없고 단지 우연으로 이루어진 산물이기에, 또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핵심이겠죠! 그런가 하면 다다를 수 있는 또 한가지의 결론은 ‘인간이 인간의 한계상황을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 곧 신에게 귀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종교’인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단지 기독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를 뜻합니다>. 이렇게 그 말의 의미를 추측해봅니다.
이렇듯 제가 고등학교때 종교선생님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지가 이제는 까마득한 옛 기억이 되었지만, ‘철학의 결론은 죽음과 종교’라는 말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게 저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종교’ (혹은 ‘구원’)라는 궁극적인 관심은 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먼저 <종교>의 사전적의미를 찾아보았는데, 한자의 뜻이 ‘종’은 <으뜸 종>이고 ‘교’는 <가르칠 교>로써 <으뜸되는 가르침> (영어는 ‘religion’: ‘신과 인간을 잇는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종교’를 찾아보면,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 그 대상, 교리, 행사의 차이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는데, 애니미즘, 토테미즘, 물신숭배 따위의 초기적 신앙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따위의 세계종교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종교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시간 사도 바울 일행이 베뢰아지역에 가서 복음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고, 또한 그 가르침이 성경의 말씀과 모순됨이 없이 서로 잘 연결되는지를 날마다 상고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베뢰아 성도에 관한 것이 지난 주일 말씀의 내용인데,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던 극단적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줄 알고, 이곳에서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 형제들이 신속히 바울을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 보내었고, 이때 디모데와 실라는 그 지역에 좀더 머물러 있었습니다 (행. 17:13-14).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일행과 떨어져서 고대 유럽의 학문과 철학의 중심지 (메카)인 <아덴>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곳 에덴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끼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한 내용이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사도행전 17장 16~34절>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철학과 학문의 도시라고 하는 ‘아테네’에 와서 받은 첫인상은 너무도 답답하고 의분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v.16). 왜냐하면, 스스로의 지성과 학문을 자랑한다는 아테네도성은 온통 거짓 우상들을 만들어 숭배하는 신전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회당’에서 유대인과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이방인을 만났고, 또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 어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복음의 진리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는 ‘에피쿠르스’ (쾌락주의) 와 ‘스토아’ (금욕주의) 철학자도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생소하고 신기해서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가 외국의 다른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v.16~18).
이런 가운데 이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법정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v.19)고 요청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이 믿는 종교를 기쁨으로 전하기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복음전파가 바울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궁금함과 지적 호기심 (늘 새로운 것이 아니면, 대화하지 않고자 함!?) 때문이었지만, 바울은 이렇게 주어진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렇게 그의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에덴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v.22)라고. 여기서 ‘종교심’이란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뢰의 마음”이라 말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이런 종교심이 많다고 먼저 인정하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을 보았으니” (v.23a)라고. 이 말은 아테네 사람들이 숭배하는 수없이 많은 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는 신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참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채울 수 없는 허전함 (공허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아테네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신들을 섬겼지만, 여전히 진리에 목말라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허해 하며 또 다른 “알지 못하는 신”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도는 본격적인 복음의 말씀, 즉 ‘유일하신 천지만물의 창조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참되신 우주 만물의 창조자되신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신전에 계시지 않고,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도움 (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요, 산과 바다와 세상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류를 한 혈통, 즉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정하시고, 인류의 역사와 나라의 경계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입니다 (v.24~2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v.27)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한 뜻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하시고자 (seek & reach out)’ 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 살고, 움직이고 살아 숨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같은 고향 사람인 길리기아 출신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 (Aratus)가 ‘쥬피터’를 최고의 신으로 묘사하면서 “우리 모두는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v.28)라고 표현한 것을 이제 인용하고 있습니다.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 즉 ~” (v.28-29)이라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하나님이 주신 본성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추구하며, 더듬어 찾고자 하는 그의 자녀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아주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아테네시민들을 메시지를 통해 그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록 지금까지는 참되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너희는 매우 종교심이 많음으로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평화하지 못하고 여전히 ‘진정한 신’ 곧 <알지 못하는 신>을 추구했는데, 그 이유는 너희 속에 그 참된 신에서부터 비롯된 성품으로 인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고백하듯이 참된 신을 추구하고 있음을 나는 본다. 그럼으로, 이제 나는 여러분들에게는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고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도 바울이 아테네시민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일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 (구약시대),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리는 세상의 헛된 우상을 섬기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소망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증거를 주셔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원하고, 그 구원을 줄 참된 신을 만나기 원한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오래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살펴본 것과 같이 아테네시민들이 비록 ‘종교심이 많고’, ‘영적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며’ ‘우리는 신의 자녀라’고 고백할찌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서 감겼던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깨닫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무궁하신 은혜로 참되신 하나님을 찾고 구원받기 원하는 모든 갈급한 심령을 찾아가셔서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아테네시민을 향한 첫번째 메시지인 것입니다. ‘너희가 만나기 원하는 <알지 못하는 신>, 바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더욱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대부분의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라 함은 종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몸이 강건하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평화와 기쁨 가운데 악에서 벗어나 죄짓지 않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무엇이 영생 (eternal life) 인지?’를 이렇게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라고.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영생’은 ‘하나의 끝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 지식’이 영생이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와,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올바른 지식이 있는가?’ 가 영생을 결정한다고 예수님은 지금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세가지로 아테네 시민들에게 밝히고 도전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의 <제 2계명>으로 명령하셨듯이,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출. 20:4-5)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v.29)라고. 둘째)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v.24) 아테네시를 온통 뒤덮고 있는 수많은 신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대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손으로 지은 곳에 전혀 거하시지도 않고, 도리어 영광의 하나님은 이런 거짓 우상숭배를 싫어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v.25) 중요한 것은 아테네 시민들이 우상숭배하는 신들에게 물질의 재물로 섬김 듯이, 참되신 하나님은 그런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에게 명하신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요, 그 믿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한 좋은 소식이 앞에서 말한 <첫번째>와 <두번째>로 그쳤다면, 바울은 유대인들과 전혀 갈등을 겪지도 않고 그 수많은 핍박을 그들에게서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유대인들로부터 핍박과 모함을 겪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그가 증언했기 때문이요,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더 이상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는다’고 그가 분명히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갈. 5:11)라고.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할례를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나사렛 예수를 전했기에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심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를 마치며 그가 고백하는 말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목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약에서 약속하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바뀌고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v.30~31)는 것입니다. 사도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를 믿고 회개함으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사도는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나사렛 예수를 믿어 영접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 역사상 가장 우수한 철학과 학문을 꽃 피웠다고 자부하던 아테네시민들도 자신들의 노력으로는 참되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아테네시민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이방민족도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 ‘알지 못하는 참된 신’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문을 하나님은 열어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성령의 충만하신 도우심으로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지혜롭고 능력있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