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된 삶” (The Blessed Life)
“축복된 삶”
(The Blessed Life)
10-6-24
본문말씀: 시편 (Psalms)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of sinners or sit in the seat of mockers.)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o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He is like a tree planted by str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season and whose leaf does not wither. Whatever he does prospers.)
[설교 요약]
시편 1편 말씀은 총 ‘150편’에 이르는 시편 전체말씀의 주제가 되는 ‘전주곡’이자, ‘신구약 성경말씀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은 간결한 가운데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깊은 영감을 묵상하는 자들에게 주는 대표적인 성경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1편말씀의 주제는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시인은 먼저 ‘누가 축복된 자가 아닌지?’를 밝힙니다. 그렇다면, ‘누가 축복된 사람이 아닐까요?’
- “<악인의 꾀를 좇는 자>는 복된 자가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v.1a) 악한 자들은 그들의 악한 꾀 (생각)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돈과 명예와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를 좇는 자는 복된 인생이 아닙니다
- “<죄인의 길에 서는 자>는 복된 자가 아닙니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v.5~6)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자’를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죄인의 살아가는 모습은 실로 다양하지만, 이 모든 길은 심판으로 끝납니다.
-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는 복된 자가 아닙니다”: 악인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가 아니라, 언제나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교만히 행합니다 (눅. 18:9-14)
그렇다면, 이제 ‘누가 ‘복된 인생을 사는 자일까요?’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을 ‘의인’ (godly/ righteous man)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누가 의인이고, 왜 의인은 행복한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 복이 있도다” (롬. 4:7,8)라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의인>은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함을 받아 자’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v.2)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 출생 (거듭남)을 했다고 해서 자녀의 축복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행복이 임함을 오늘 말씀은 도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날마다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날마다 깨닫고 누려 나가는 자는 실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신. 33:29).
바라기는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함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풍성한 열매와 푸르른 잎사귀를 맺는 복된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시편 1편 말씀은 총 ‘150편’에 이르는 시편말씀 전체의 주제가 되는 ‘전주곡’과 같은 말씀이자, 아니 ‘신구약 성경전체’ 말씀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지만, 그 쓰여진 문체에 따라서 크게 다섯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모세 5경과 같은 <율법서>, ‘열왕기서’나 ‘역대기서’와 같은 <역사서>, 시나 찬양 형태로 기록된 <시가서>, 예언의 말씀이 주로 언급된 <예언서> 그리고 신약에서 주를 이루는 편지형태의 <서신서>가 그것입니다. 이중에서 시편은 시 혹은 찬양의 형태이기에 <시가서>로 분류됩니다. 그럼으로 시편은 인간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감동된 순결한 믿음의 고백과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아름다우심을 그 어떤 다른 말씀보다도 탁월하게 표현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편말씀은 어떤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왜 살아가는가? 그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 삶은 가치로운 것인가? 를 매우 간결하면서도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통해 쓰여졌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의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푸르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형통한 인생’인지를 깨닫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먼저 제가 느끼게 되는 말씀의 구조는 시편 기자가 강조적 용법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자는 ‘누가 진정으로 축복된 자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먼저 ‘누가 축복된 자가 아닌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보는 것처럼 기자는 ‘무엇이 복된 인생이 아닌지?’를 3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악인이 꾀를 좇는 자>는 복된 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v.1a) 저는 과연 무엇이 ‘악인의 꾀를 좇는 자인가?’를 묵상해 봅니다. 이 악인이 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행할 때, 마치 성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지름길>이라고 속삭이는 유혹’이 악인의 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무엇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이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성령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된 자녀의 놀라운 권세와 영광스러움으로 설명하고 나서, “그러므로”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고 도전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일까요? 바울은 계속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Do not conform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 approve what God’s will is) (롬. 12:2) 이 세상의 부와 성공과 쾌락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속삭임, 곧 ‘나의 야망을 이룰수 있는 지금길이라고 유혹하는 악인의 꾀’를 본받지 말라고 사도 바울은 강하게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 ‘패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죄인의 길에 서는 자>는 복된 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죄인입니까?’ 성경에서 ‘죄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단어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살아가는 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것을 논하자면, 우리 인간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의 길’을 오늘 <시편 1편>에서 살펴본다면, 이 죄인의 길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바람에 나는 겨” (v.4)와 같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길이 ‘악인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을 유지할 뿌리를 땅에 내리지 못하고 뽑혀 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보면 성도들이 악한 자들이 마치 번창하고 성공하는 듯함을 보고 불평하고 낙심할 때, 이렇게 하나님은 악인의 운명을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9)라고. 악인이 어디로 갔습니까?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입니다. 그럼으로 죄인의 길은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럼으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v.5~6)라고 <시편 1편>말씀은 마무리됩니다. 우리 주께서 비유하신 말씀과 같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어서 그 시작은 화려하고 순조로우나 그 끝은 비참한 사망의 길인 것입니다. 그 길이 아무리 멋져보이고, 매끄럽게 잘 닦여져 있더라도 그리고 세상의 풍요와 쾌락을 주더라도, 이 죄인의 길은 결국 심판으로 인도하는 길인 것입니다.
셋째,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는 복된 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새가족반’에서 ‘행복의 초대’를 공부하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힘들지만 매우 중요한 열쇠는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과의 비교’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임을 나눈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부한 바리새인들은 이런 ‘남과의 비교하는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 남과 비교하게 될 때 결국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발견하는데 실패하게 됨을 날카롭게 도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눅. 18:10). 따라서 ‘비교의식’은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 크리스챤들의 내면에서도 교묘하게 찾아오는 ‘양날 선 칼’과 같은 자기모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교의식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 필연적으로 내가 남보다 잘 낫다고 느낄 때면 <교만감>에 우쭐데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게 될 때 <열등감>에 사로잡혀 좌절감으로 고통하게 됨으로 결국 양쪽 모두를 찌르는 양날의 칼처럼 위험한 <자기애착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시편 기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복된 인생을 사는 자일까요?’ 저는 이제 그것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v.1)고 기자는 선언하고 나서, 이어지는 <2절>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v.2)라고. 저는 먼저 “복 있는”이라고 제 성경책에서 번역된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복 있는’이라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는 <아쉬레이>로써 그 의미가 ‘올바르다’ ‘번영하다’이고, 이것은 우리말로 ‘행복’ (Happy)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행복한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1편>말씀은 우리 인간의 참된 행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를 지금 2가지로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첫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두번째는 “인간의 존재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첫번째와 두번째는 서로 따로 땔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궁극적인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은 <신명기 6장>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민족을 건져 내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이렇게 그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라고.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민족에게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관계>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의 구체적인 적용을 또한 이렇게 밝히십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6-9)라고.
결국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사랑의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사랑의 깊은 관계를 맺은 자에게 ‘진실로 행복한 자’라고 하나님이 확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리 인간의 존재상태>를 결정짓고, 또한 이 존재상태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깊어갈 때 그분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 말씀의 바다에 몸을 담글 때 우리 존재는 하나님을 진실로 더욱 더 즐거워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선순환의 삶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악인의 삶’을 거부하고, ‘의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누가 ‘행복한 자’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의인’ (godly/ righteous man)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의인’과 대조되는 자를 ‘악인’ (ungodly/wicked man)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 의인이고, 왜 의인은 행복한 것일까요?” (Who is righteous man, and why is he happy?)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윗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7,8)라고. 결국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실 때, 성경은 그를 ‘죄가 사하여졌다’ ‘죄가 깨끗이 씻음 받았다’고 설명하며,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이런 죄 씻음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우리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용서함 받고 거듭나게 된 신자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요, 시편에서 말하는 ‘행복한 자’인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여호와의 율법’입니까? 구약의 모세가 기록한 율법서만이 여호와의 율법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신.구약 말씀이 ‘여호와의 율법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신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자가 누릴 복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밝혀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v.2)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힘써 암송하고, 그 말씀의 뜻을 점점 더 깨닫게 되고 깨닫은 만큼 그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는 자가 축복된 자요, 행복한 자라고 시편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선언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찬수목사 간증/ 말씀읽기, 암송 & 말씀이 지켜주시는 삶!!)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축복된 삶을 살고, 행복한 자가 되는 지?’에 대한 말씀 한 구절을 나누기 원합니다. 제가 평소 좋아하는 잠언서 말씀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in all your ways submit to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잠언 3:5-6)라고 말입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적지 않은 성도들이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말씀을 묵상하고 사랑하지 않고, 설렁설렁 그냥 ‘시간 있으면’ ‘별 할 일 없으면 성경한번 읽을까?!’하고 말씀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결코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지켜 주실 수 없고,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지켜 주시며,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끝임없이 솟아나는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중의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모세는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민족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끌어내고, 광야에서 40년동안의 고난과 훈련의 기간을 지나서 이제 자신은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모압 평지에서 눈을 감으며 출애굽 2세대들을 향해 마지막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고별설교>인 ‘신명기서’에서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명기 33:29)라고. 모세는 그의 마지막 고별설교를 끝내며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왜 입니까?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과 함께 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살아가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은혜가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죽어서 천국가는 구원이 전부가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면서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주시고, 악한 원수들의 칼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방패시요, 허락하신 땅을 정복하고 적들의 높은 성을 밟고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자는 하나님의 죄 없다고 불러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그 분의 생명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 약속하신 승리와 풍성한 열매를 누리는 자인 것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v.3)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는 그 약속하신 그 은혜를 신실하게 부어 주심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 수없이 앞서간 사람들이 많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런 수 없는 세상의 가르침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고 생명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따르는 자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v.2-3) 이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축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