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4, 2024

“하나님께 감사하기” (Giving Thanks To God)

Preacher:
Series:
Passage: 에베소서 (Ephesians) 5:20
Service Type:

“하나님께 감사하기”

(Giving Thanks To God)

11-24-24

본문말씀: 에베소서 (Ephesians) 5:20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Always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for everything,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설교 요약]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맞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는 무엇인지를 묵상하길 원합니다.

먼저 기독교에서 볼 때, <감사> (gratitude)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장 고귀하신 은혜로써 예수 그리스도라는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심에 대한 반응이다> (by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라고 정의합니다.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3가지 타입의 감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 대다수의 시편과 신구약말씀에서 ‘감사’가 여기에 해당.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시.34편)
  • <약속을 신뢰함>으로 드리는 감사: “미래에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드리는 감사 (빌.4:6)
  • <고난 가운데> 드리는 감사: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듯이, “고난 가운데”드리는 감사 (행.16:25) 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을 결정하는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 절 <18절>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8)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될 때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왜 성도는 ‘항상’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하심’때문: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79장)“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천지만물을 감탄하고 감사로 찬양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심’때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처럼, 그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영의 눈을 열어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자녀의 영광이 심히 크기’때문: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진정한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핵심의 하나는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성령충만’을 통해 ‘자녀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영광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롬. 8장).

추수감사절 예배를 맞아, 지금까지 베풀어 주심 뿐 아니라, 미래에 베푸실 약속을 신뢰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시. 50:23)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혹시 성도 여러분 중에 ‘나는 언제나 감사가 넘쳐납니다’ 혹은 ‘나는 매일 매일 노력하지 않아도 감사의 제목이, 그리고 감사의 이유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은 없습니까? 솔직히 저에게 묻어 보신다면, 부끄럽지만 저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 아쉬운 것, 불만스러운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어찌 그리 눈에 잘 띄고, 머리에서 쏫아져 나오는데, 거기에 반해 감사하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것은 그 몇 배의 노력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겨우 한두가지 떠오르는 것이 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맞아 말씀의 은혜를 나누며, 우리에게는 감사가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드리는 감사인가? 우리는 감사를 배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을 질문하며, ‘진정한 감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 감사를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약속하신 놀라운 은혜를 누려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과연 누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일까?’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은 첫째, <인생의 큰 고난과 고비를 겪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암에 걸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회복되고 살아남게 되었다든가, 사람과의 불화로 인해 깊은 상처로 입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자 하는 위기를 벗어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주위를 다시 돌아봤을 때, 이 세상은 그 전에 자신이 보았던 세상이 전혀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거창하고 굉장히 큰 발견이라기 보다도, 조그마한 종달새의 맑고 깨끗한 울음소리가 주는 생명감, 비 온 뒤의 나뭇잎사귀에 영롱하게 달린 물방울의 아름다움과 새벽 미명에 서서히 밝아오는 한줄기 찬란한 빛과 저녁 무렵 붉게 물든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며 느끼게 되는 생명이 있음에 대한 감사일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겪었던 그 힘든 시간이 도리어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눈떠볼 수 있고 깨닫는 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감사하는 사람은 첫번째 경우처럼 큰 고난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진 않았다 할찌라도, <깊은 사색이나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감사를 보게 됩니다. 이 경우를 생각하자면,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나 빵의 주 재료가 되는 쌀이나 밀과 같은 곡물이 저절로 자라서 우리의 식탁위에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쌀과 밀은 농부들이 먼저 측박한 땅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줄 뿐 아니라, 태양과 바람과 적절한 온도와 습도와 이런 모든 자연조건이 하나가 되어 가을에 결실로 열매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이 내가 입고 먹고 잠자는 모든 것이 나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은 매번 식사할 때에도 농부의 흘린 땀과 더불어 태양과 비와 바람과 자연만물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큰 역정을 겪었든지, 혹은 깊은 사색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순간은 단 한가지도 ‘그저’는 없고, ‘당연한’ 것은 없음을 깨닫은 사람들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가운데 여기에 해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런 감사를 행하고 살아가는 분들은 소수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저의 말속에서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런 두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사실 종교여부에 관계없이, 다시 말해 기독교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경우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이지만 뭔가 늘 불만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정과 감사가 넘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감사는 무엇일까요? 우리 크리스챤들은 왜 감사하며, 누구에게 감사하는 것일까요?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서 보면, <감사> (gratitude)<The response to God and God’s blessings that is an expression of praise and devotion. In the Christian context, believers respond on gratitude for the “indescribable gift” (2 Cor.9:15) of Jesus Christ, who is the supreme expression of God’s grace.>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써 찬양과 헌신으로 표현되는 것. 크리스챤의 맥락 (개념)에서 볼 때, 감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장 고귀하신 은혜로써 예수 그리스도라는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심에 대한 반응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은 우리 크리스챤의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시고, 그 감사하는 핵심적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 극진한 은혜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이제 마무리해 나가면서 ‘에베소서’의 주제가 되는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변화된 성도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를 매우 영적으로 그리고 실제적 (실천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15절>을 시작하며 이렇게 성도를 권면합니다.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5~16)라고.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혜로운 삶’이요? 또한 ‘세월을 아끼는 실제적인 삶’일까요? 그것이 이어지는 그 유명한 <18절>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8)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우리 성도가 지혜롭고도 세월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열쇠는 그 어떤 우리 자신의 노력과 결심 이전에 지혜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being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을 받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의 변화된 복된 삶의 모습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19~21절>말씀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v.19~21)라고.

이 말씀에서 우리 성도가 분명히 한가지 이해해야 할 점이 있다고 저는 믿는데, 그것은 여기 언급된 이런 아름다운 삶의 모습, 즉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피차 사랑으로 복종하는 삶의 모습’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도전하고 권면하는 ‘의무사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삶의 모습은 결과 (=열매)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결과입니까? 만약 성도 여러분들이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될 때, 이런 복된 열매를 결과적으로 맺게 됩니다”라고 사도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될 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추수감사절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경에는 3가지 타입의 감사를 보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시편이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대부분의 감사유형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시편34편>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34:1~17)라고 하나님의 베푸신 크신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은 그분이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한 기쁘고 감격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드리는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감사에 대한 놀라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빌.4:6)라고. 제가 바울의 이 권고를 도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너희가 필요로 하는 그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그가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에 주실 은혜를 믿음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이것을 ‘도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감사하며 드리는 자녀의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 받아 주실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고난 가운데 드리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사도행전 설교 때 살펴보았지만, <행. 16장>에서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겪은 사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5) 바울과 실라 두사람이 감옥에서 갇혀 한밤중에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16:19~26). 이들은 무슨 기쁜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감옥 속에서 한밤중에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사실 그들이 그날 낮에 경험한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옷이 찢기고 매를 심히 많이 맞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된 것’이 전부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심하게 맞은 육신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어두운 감옥에서 기쁨과 감사 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주께서 약속하신 복음의 열매와 승리를 성령충만을 통해 확신했기에 드리어 기쁨이 충만하여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은혜요, 능력일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에서 사도가 왜 성도들에게 감사함에 있어서 ‘언제나’(항상) 그리고 ‘모든 것을’(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하는지?’를 살펴보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왜 성도는 ‘항상’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하심’때문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찬송곡의 하나인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79장)은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라고 말입니다. 제가 말씀을 처음 시작하면서 잠깐 언급했지만, 아직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창조자가 바로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인생의 큰 시련과 생사의 고비를 넘은 사람들 중에서는 이 세상 천지만물이 얼마나 소중하고 신비로운 것인지, 그리고 그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은 없음’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빗으신 이 창조의 아름다우심을 날마다 발견하고, 또한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심’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표현처럼, 모든 성경의 말씀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요한복음 3장16절>이 될 것이라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everlasting life)라고 말입니다. 앞서 ‘웨스트민스터 사전’에서 크리스챤의 감사의 핵심에서 확인한데로, 우리 성도의 감사는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측량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우리를 살리시고자 내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반응’인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는 고백처럼, 그 독생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더 깊이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 가운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자녀의 영광이 심히 크기’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영,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우리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이렇게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5) 또한 <17~18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그리고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v.35~39)라고.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누리게 되는 진정한 평화와 감사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이 값비싼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감사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것이 단순히 크리스챤의 성격과 기질적인 차이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자녀에게 주신 자녀의 권세와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자녀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성령충만을 통해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가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녀에게 주신 특권과 은혜를 깨닫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결코 냉냉한 가슴과 인생의 무의미함으로 인생을 낭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함께 드리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중심엔 ‘감사’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라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감사하는 자의 놀라운 축복을 영적으로 밝혀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 속에 있는 이 놀라운 영적 축복을 성도 여러분은 이해하시는지요?!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평생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와, 그리고 앞으로 주실 그 놀라운 약속을 신뢰하며 성령충만을 받아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가 흘러 넘치는 축복된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