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9, 2024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28:30~31
Service Type: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9-29-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28: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For two whole years Paul stayed there in his own rented house and welcomed all who came to see him.)

31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He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and taught about the Lord Jesus Christ—with all boldness and without hindrance!)

[설교 요약]

오늘은 사도행전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사도행전28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바울이 ~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v.30~31)라고.

마치 또 다른 복음증거의 사건이 계속 이어지듯 사도행전은 끝이 납니다. 그 이유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행전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임을 우리에게 도전해 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28장>을 시작하면서, 지중해를 강풍으로 말미암아 표류하며 죽음의 위기를 겪던 사도 바울과 모든 사람들이 ‘멜리데’라는 작은 섬에 안전하게 내려 목숨을 건졌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나서, 마침내 바울은 로마에 당도하게 되었음을 나누었습니다 (행.28:1~16).

그리고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셋집 형태의 감옥에 병사 한명과 지내게 되었고, 며칠 후에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말씀으로써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면서 “왜 저자 누가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을 분명히 밝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입니다: 그들은 참된 구원자보다는 (정치적인/ 군사적인/ 빵을 주고 병 고쳐줄) ‘현실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의 마음이 완악해짐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게 되었습니다 (행.28:27)
  • 유대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만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행.22:22-23)

이런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불행한 영적 상태를 통해 누가는 최종적으로 밝힘으로써

  •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복음이 주어졌지만 그들이 거부했다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롬.10장)
  • 유대인의 거부함으로 이제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흘러 넘쳐 풍요로움을 이룬다는 것 (행.28:28/ 롬.11:12)
  • 이와 같은 이방인에게서 성취된 구원의 역사는 장차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게 될 것’ (롬.11:11~26)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의 셋집에서 2년동안 자기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v.30~31)

저는 오늘 말씀에서 <복음전파의 3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무차별성’ (indiscrimination) 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다 영접(하는)”것입니다

둘째, ‘무제한성’ (unlimitedness) 입니다: 바울이 “담대히 하나님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복음은 결코 사람과 환경과 악한 영의 방해와 탄압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셋째, ‘영속성’ (permanence) 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나지만, 성령을 통한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역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아포슬 믿음의 공동체가 <사도행전 29장>을 쓸 차례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축복된 역사에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을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인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v.30~31)라고. 이 말씀에서 보듯이 마치 또 다른 복음증거의 사건이 계속 이어지듯 사도행전은 끝이 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복음의 주인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를 통해 이 ‘성령의 행전’이요, ‘구원의 행전’인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임을 우리에게 암시하시고 도전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

대체로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순교시기를 AD 67~68년 경으로 보는데, 이것은 바울이 <사도행전 28장>에서 보는 것처럼, 로마에 압송되어 와서 셋집에 유하게 된 시점을 AD 61년 (바울의 나이 63세경)으로 추정할 때 대략 6~7년 후인 것으로 보입니다. 순교 당시 로마 황제였던 폭군 ‘네로’에 의해서 순교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28장>을 시작하면서 살펴본 것처럼, 큰 광풍으로 인해 지중해를 표류하던 사도 바울과 수백명의 사람들이 주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어 모두 안전하게 작은 섬, ‘멜리데’라는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섬주민의 동정으로 모두 각별한 돌봄을 받고, 바울 또한 추장의 아버지와 많은 병든 섬주민들을 고쳐 주고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참으로 복된 시간을 이들 섬주민들과 보내었던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섬주민과 석 달 동안을 훈훈한 마음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나서, 이들 일행은 여러 항구를 지나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수도 로마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며칠이 안되어 가장 먼저 그곳에 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청하여 ‘자신이 왜 쇠사슬에 매인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사도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v.20)라고 그 핵심을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신실한 믿음의 조상들이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던 구원자 ‘메시야’는 이미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시요, 그분은 이미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그 피로 용서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의 손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마지막 날 다시 오셔서, 의인과 악인이 모두 다시 살아날 때 공의로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임을 사도는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소망되신 그리스도, 구원의 소망되신 그리스도가 ‘왜 나사렛 예수인지?’를 사도는 언제나 주장했기 때문에, 이처럼 쇠사슬에 묶인 죄인의 신분으로 자신이 이곳 로마까지 재판을 받으러 오게 되었다고 그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자기 집에 오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v.23). 그러나 지난 시간 말씀드렸듯이 그 결과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v.24~25a)라고 저자 누가는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사도 바울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여, 마치 의견이 반반 정도로 나뉘어지는 정도로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실제적으로 바울의 말을 ‘믿지 않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마치 바울의 유대인 복음전도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고 제가 지난 시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사도행전을 마지막 마무리해 나가면서 왜 누가는 마치 실패한 듯한 유대인 복음사역을 언급하고 있는가?하는 점을 성도 여러분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복음제시에 대한 유대인들의 심한 거부가 암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유대민족의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이점에 대해 제가 여러 차례 지적한바 있습니다만, 이는 유대인들은 참된 생명과 구원의 메시야 보다는 당장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 현실적인 메시야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강대국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 또한 배고픔을 해결해 줄 경제적인 빵의 메시야, 그리고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 줄 병고침의 메시야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이 넘는 군중들을 먹이시고, 수없이 많은 각색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그야말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 되심을 넉넉히 입증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께서 이런 표적을 행하실 때는 환호하며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가, 정작 주께서 ‘왜 자신이 메시야시요, ‘생명의 떡’이며, 장차 고난을 받게 될 메시야신가?’을 밝히 말씀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던 이들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주님을 저버리고 떠나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복음서에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능히 살리라” (요. 6:51)고 했을 때, 이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라고 주님의 말에 시비를 걸고, 결국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 6:60)라고 말하며 많은 자들이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주께서 그들의 주린 배를 빵으로 배불리 먹여주고, 그들의 병든 몸을 치유하실 때는 열광하며 메시야로 환영했지만, 정작 주께서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메시야임을 진리의 말씀으로 밝히실 때는 그분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부했을까요? 여기에 누가가 <28장>에서 유대인의 태도를 언급한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에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사도 바울과 변론 후에 서로 맞지 않아 흩어졌을 때, 바울이 그들을 향해 이렇게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선포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받아 주니까 화가 나서 그들을 향해 불평하거나, 악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외칩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v.27). 이 ‘이사야서’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수없이 많은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돌아오게 하고자 했지만, 이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말씀은 그들이 얼마나 목이 곧고 악한 마음으로 고집을 피워 끝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지 하는 이스라엘의 불행한 영적 상태를 ‘역설적 표현’으로 고발한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지금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얼마나 영적인 ‘맹인과 귀머거리’상태인지를 다시 한번 고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진리를 다 깨닫고 복음을 영접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을 순전한 마음과 열린 귀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마음이 마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처럼 혼미한 상태에 있고, 눈은 장님처럼 보지 못하고, 귀는 청각장애자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면, 이런 마음상태가 심히 우려스럽고 영적으로 저주스러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유대인의 마음상태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때나, 700여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오셔서 진리를 선포하신 때나, 그리고 ‘이스라엘의 소망’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도시대 때나, 아니 2천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마음상태 (영적 무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일부 복음을 영접한 유대인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이토록 비참한 마음상태 (영적 무지)에 빠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세번째) 이유가 되는 <그릇된 선민의식>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감사하고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인만 구원하시고 자신들만 편애하신다’고 믿는다면,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이미 너무도 자기 중심적이고 편향된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사도행전22장>을 살펴봤을 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군중들 앞에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멀리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행.22:21)고 명하셨음을 간증했을 때,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행.22:22)고 크게 흥분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건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그 이유도 결국 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의 결과임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결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또한 율법을 자신들처럼 철저하게 지키지 않는 민족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질 수 없다고 이들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대종교로 개종하지도 않고,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 자체를 유대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노는 그들의 비뚤어진 선민의식에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저자 누가가 사도 바울의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또 한번의 (마지막??) 복음제시를 통해 결론적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지만, 그들의 ‘잘못된 마음/영적 무지’로 인해 복음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2) 따라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로 그 촛대가 넘어가게 되었음>을 바울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영적 도전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흩어지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v.28)고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 곧 ‘로마서’를 쓰면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됨으로 이제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을 이렇게 예언한 말씀과 일치합니다. “저희 (유대인)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1~12)라고 말입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의 넘어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함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사건’이 도리어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의 촛대가 넘어오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는 역설을 바울은 정확히 로마서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런 이방인들의 구원의 풍성함을 통해 이것이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질투나게)함으로 그들이 결국 복음 안으로 돌아오게 되는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요, 깊고 놀라운 구원의 비밀임을 사도는 깨닫았음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짧게 나눈다 있습니다 (롬. 11:25~36). 저는 이것까지가 ‘왜 사도 바울의 그토록 열정적이고도 탁월한 복음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지도자들이 거부했는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고, 이것이 또한 누가가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면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최종평가라고 믿습니다.

그럼으로 이제 바울은 2년동안을 자기 셋집에 있으면서 그 문을 활짝 열어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하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v.30~31) 바울이 비록 셋집의 형태로 있었지만, 이곳은 로마군사가 항상 그를 지키고 있었고, 갇혀 있었던 감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렇게 주께서 주신 마지막 복음전도의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자기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고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영적 눈을 열어 깨닫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로마에서 감금된 죄수의 몸으로 지내는 2년동안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로 일컬어지는 4편의 ‘옥중서신’인데, 바울은 낮에는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아무리 힘들고 피곤하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영접하여 복음을 가르쳤고, 늦은 밤에는 어두운 촛불 밑에서 사랑하는 여러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사랑과 영적 가르침을 이렇게 편지로서 보냈던 것입니다.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 본문말씀을 주석하면서 “그가 (사도 바울이) 투옥된 감옥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성전이요, 교회요, 궁전이었다. 우리는 그의 입이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몸은 비록 갇혀 있었으나 주님의 말씀은 결코 갇히지 않고 날마다 선포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그리고, 이 기간동안 얼마나 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또한 열매들이 맺혔을 것인지를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이제 오늘 말씀을 아니 ‘사도행전’강해설교를 끝내며 오늘 분문말씀에 담긴 복음전파의 3가지 특징을 생각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복음전파의 무차별성>입니다. 2년동안 바울의 셋집을 찾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바울은 차별하지 않고, 복음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복음전파의 무제한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2년동안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복음증거를 그 누구도 금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때로 복음증거가 사회나 집단이나 국가로부터 탄압과 핍박을 받기도 하지만,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은 그 어떤 인간과 환경과 악한 영들의 방해에도 결코 막히지 않고 하나님의 그 선한 뜻을 따라 그 무제한적인 권능으로 마침내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복음전파의 영속성>입니다. 이제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복음전파 사역은 오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복음전파의 행진’은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리하여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경에 기록된 사도행전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과 저의 차례입니다. 우리 아포슬 믿음의 공동체가 아직 끝나지 않고 <사도행전 29장>을 쓸 차례입니다. 우리 함께 주님의 약속,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19)는 약속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주께서 맡기시고 명령하신 이 영광스럽고 축복된 복음증거에 충성스럽게 쓰임 받는 우리 개인과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사랑 많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