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31, 2026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 (Also, He Justifies Us)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4:23~25
Service Type: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

(Also, He Justifies Us)

5-31-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4:23~25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설교 요약]

         사도는 그동안 <4장>에서 그 주제가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밝혀 나갔고, 이제 마지막 결론부분인 ‘23~25절’을 통해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으로 삼아 우리 또한 의롭다 하시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v. 23~24a)라고.

사도는 주장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중심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 (v.24b)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우리 그리스도인들 과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지만, 차이점은 우리 성도의 믿음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장된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는 것 (롬. 3:22)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은 바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v. 24)을 믿는 그 믿음 안에,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죽으셨음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v.25a)
  •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되심과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v.25b)

을 우리 성도는 신앙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v.20)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 그리고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견고하여지는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하나님을 불신하고 약속을 의심’하는 믿음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아브라함같이 순전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약속하신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4장> 마지막의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코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데로, 사도는 그동안 <4장>에서 그 주제가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밝혀 나갔고, 이제 마지막 결론부분인 오늘 말씀 ‘23~25절’을 통해 4장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가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믿음의 본으로 든 아브라함의 삶과 믿음을 그렇게 소상히 설명한 이유도 오늘 본문의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바로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v. 23~24)라고 말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6절>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이유’는 단순히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와 같이 그의 순전한 믿음을 본받아 장차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많은 그의 영적 후손된 우리 성도들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정확히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입니다. 저는 특별히, 사도가 4장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결론적으로 우리 성도 각자의 믿음으로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서술방법을 통해 우리 각자의 믿음을 겸손히 돌아보고, 삶 속에 적용시켜 나가는 의미 있는 시간되기 기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지금까지의 4장에서 사도가 밝힌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인지를 집어보겠습니다. 먼저 사도는 4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의 조상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이유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2가지로 지적합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오해한 두가지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v. 1~8), 둘째는 ‘할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v. 9~12). 이처럼 그가 의롭게 된 것은 행위도 아니요 할례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심을 받게 되었다’ (창. 15:6; 롬. 4:3)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롭다고 여기시는가?’에 대해 <4장 후반부>인 ‘13절에서 끝 절 25절’까지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주 본문 말씀이었던 <19~22절>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의 핵심은 무엇인가를 살펴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첫째,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 곧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이심>을 그가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요, 셋째는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을 그가 가졌다 라고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던 것’ (4:22)입니다. 이것까지가 지난 시간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사도가 우리 성도의 본보기를 삼고자 하는 중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4장의 마지막 남은 몇 절인 ‘23~25절’인 오늘 본문말씀에서 결론적으로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사도는 말합니다. “제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v. 23,24)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이유는 그의 믿음을 본받는 우리 또한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게 하시고다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을 본받고자 하는 자들,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사’된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시고, 죄없다 하심으로 구원하시고자, 아브라함을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의 핵심을 사도는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그것은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 (v.24b)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누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까?’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의 하나님’이라고 나누었듯이, 오직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만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믿음의 핵심은 ‘예수 우리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 곧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그 핵심임을 사도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고린도교회>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밝혔듯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이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권능의 손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잠자는 모든 자들의 첫열매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만약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된다’라고 사도는 <부활장>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포함한 모든 신약성경에서 주장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양’되어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셨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인데, 만약 예수님이 살아나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가 아니요,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는 소망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가운데서도 그 핵심은 ‘십자가의 죽으심’이요, 그 ‘대속죽음’이 성취되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그 권능의 손으로 다시 살리신 <부활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 곧 ‘하나님을 순전히 믿는 믿음’임과 동일한 것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더 구체적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더 분명히 성취된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복의 근원의 주인공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구원을 믿는 믿음인데, 우리 성도의 믿음은 <그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최종적으로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임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v.24)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그 믿음의 핵심이라고 사도는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저는 사도가 4장을 마무리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격려하고 도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하는 가운데, 이 믿음을 어떻게 각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믿음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믿음의 출발이요, 근거가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제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한가지 비근한 예를 들자면, ‘만약 오늘날 어떤 정통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 있는데, 그가 아브라함과 같은 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롬. 3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구원의 길>을 그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로 갈 자, 곧 구원을 얻을 자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피로 속죄함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의 가정은 ‘만약 아브라함이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떤 결정을 행할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를 읽어 나가다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던 것을 여러분 중에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라고. 여기서 주님은 마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고 기뻐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말씀의 뜻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신학자들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셔서 100세되어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고, 그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잡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고 말씀하시고, 이삭 대신에 수양을 번제로 드리게 하시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 22:18)라고 약속하셨는데, 이를 통해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 가운데 오실 메시야 예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즐거워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지만, 차이점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그의 후손 가운데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의 믿음’이라면,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은 그 약속의 성취로써 이 땅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구원자임을 믿고, 영접하는 믿음이요, 이 믿음은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이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과 동일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돌아가서, 우리 각자에 믿음에 적용해 보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 두번에 걸쳐 살펴본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저는 ‘믿음이 없어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라고 정의할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인데,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일까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 믿음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유일하신 권능의 창조주’시요,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되심을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시지만, 조금도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그는 믿었습니다. 바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불위’(無所不爲)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한가지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믿음>과 <맹목적인 믿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매우 흡사하고 식별하기 힘든 것 같지만, 내면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맹목적인 믿음’은 우리의 올바른 비판을 죄악시하고, 반드시 행해야 할 영적 분별력을 마비시킵니다. 어떤 사상과 가르침이 과연 성경적이며, 올바른 영성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점검 없이, 무턱대고 그 가르침과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은 그 “가르침이 성경적인지? 그리고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논리성과 계연성이 있는지를 따져 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사도는 그의 믿음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19~21)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정확히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자기 몸이 99세 되어 100세가 다 되었고, 아내 사라는 89세로 90세가 다 된 몸일 뿐 아니라, 그녀는 젊어서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의 몸이었는데, 이렇듯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하신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만약 그분이 약속하셨다면, 그분은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실 하나님임을 그는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브라함과 같은 ‘순전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맹목적인 믿음’입니까? 그렇습니다. 맹목적인 믿음, 곧 덮어놓고 믿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듯이, 또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은 더더욱 믿음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코자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그분의 약속을 불신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진노케 하는 것이 더 있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어떤 인간적이고 상황적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도리어 믿음에 견고하여 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전한 믿음’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순전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점점 더 깨닫아 나감으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영광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을 가장 영적으로 잘 정의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번째 문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대답)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우리를 앞서갔던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이 아브라함의 믿음,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실한 믿음’을 묘사한 <로마서 4장>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인간의 제일목적’을 정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참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신실한 믿음, 곧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순전한 믿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축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단순한 맹목적인 믿음도 아니요,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분의 약속을 의심하는 믿음도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땅에 두발을 분명히 디디면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의 충만한 열매를 여러분이 살아 있을때 뿐 아니라, 이 땅을 떠난 후에도 풍성히 거두어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