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2, 2025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Inseparable Love of Christ)

Preacher:
Passage: 로마서 (Romans) 8:35~37
Service Type: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Inseparable Love of Christ)

10-12-25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8:35~37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설교 요약]

          구원받은 성도의 축복과 권세를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의 하나가 <로마서 8장>의 말씀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8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라고 힘차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 영 성령을 통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승리하게 된 성도가 누리게 될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은혜가 <8장>후반에 기록된 오늘 말씀입니다. 그 은혜는 한마디로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성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구원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 18:9)라고. 이처럼 주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둘째, “절망에서 건져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자신과 성도들이 ‘도살할 양’과 같은 심한 핍박을 받지만 (35-36),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v. 37)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절망에서 건져주시는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라고 자신을 못박고 저주하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용서의 사랑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사도는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v. 39)고 <8장>을 마무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주와 함께 승리하는 주의 참된 제자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믿는 성도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사랑’은 그처럼 강력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아. 8:6)라는 성경의 선언처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아니 ‘죽음보다 강’합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과 저를 붙드시고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 내시고, 자유케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권세와 영광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십니까? 이 끊을 수 없는 강권하시는 주의 사랑, 그 폭포수같이 넘쳐 흐르는 주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대부분 잘 아시듯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의 본질’을 탁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과 구원의 놀라운 관계’를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라고 말입니다.

먼저 <로마서>전체를 요약해볼 때, 사도는 우리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는 것이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롬. 3:23)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롬. 3:21).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의’를 복음 안에서 나타나게 하셨는데,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롬. 3:22)인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율법은 선한 것일지라도, 이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닫을 뿐이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만한 ‘한 의’를 복음 안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일까요? 그 ‘한 의’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복음에서 나타나는데, 이 의는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없이 나타나는 ‘의’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그를 믿는 우리를 죄용서하셔서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의요, 그럼으로 우리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살리는 ‘의’>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복음 안에 있는 그분의 의’를 통해 그의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방식 (방법)이요, 이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는 말씀의 궁극적인 뜻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러분과 저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의 관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롬. 5장). 그리고 이와 같은 상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는 상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신분이 된 영적 상태’인데, 이런 영적 상태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롬. 6:4~9)라고. 이것을 사도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에서 시작하여 <7장>까지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복음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성도의 영적 신분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나서, 이제 <8장>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게 될 특권과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로마서’ 전체에서 최고조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사도는 <8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분의 영, 성령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게 되고 승리하게 된 거듭난 성도의 존재를 사도는 이제 온 힘과 기쁨을 다해 선언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8장>을 진행해 나가면서 단순히 말로 만이 아니라, 성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죄와 사망의 막강한 힘으로부터 해방되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전능한 생명의 역사가 우리 거듭난 성도 안에서 벌어지는지를 탁월한 영적 논리로써 밝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 결론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 이상 무서워하거나 거리끼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점점 더 깨닫아 나가고, 말할 수 없는 친밀함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녀된 영광과 특권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라는 선언에서 최고의 확신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들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인지?’하는 이유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왜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끊을 수 없는 사랑’이 되어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뿐 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우리를 붙드시고 승리케 하시는 근거와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v. 35)라고. 그렇다면, 이제 저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구원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여러 해 전에 인상깊게 읽은 <존 스토트>의 책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청년시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토트’는 매우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으로 주님을 영접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저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표현데로 ‘상당히 맥 빠지고 싱겁게’ 주님을 영접했다고 진솔하게 그날을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영접하는 날, 주님을 드라마틱하게 환상 가운데 보았다던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분명한 진리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고, 그럼으로 주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19세기 크리스챤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천국의 사냥개” (The hound of heaven)라는 시를 인용하여 잘 설명했습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궁 같은 길로 ~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함으로/ 두드린다 – 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이렇게 시작하는 이 시 속에서 톰슨이라는 시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천국의 사냥개’처럼 집요하면서도 도망치는 자신을 끝끝내 당당히 추격해와서 마침내 찾아내어 붙드셨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영국과 세계 수많은 청년들과 지성인들에게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미쳤던 ‘존 스토트’ 목사는 이 시를 인용하며 다소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여기서 자신을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고 끝끝내 찾아내어 놓지 않으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국의 사냥개’로 묘사하며, 자신의 구원받은 순간을 진솔하게 나누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 주님은 그의 양들은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잘 기록되어 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 18:9)고 주님은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영혼을 ‘천국의 사냥개’되어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반드시 천국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복중의 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근거는 바로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일치함을 우리는 다윗의 시편말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그의 자녀를 택하실 뿐 아니라, 찾으시고 지키시는 그분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새벽 날깨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7~10)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둘째, “절망에서 건져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그 강력하신 사랑’을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시편 44편22절>말씀을 인용합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v.36)고 말입니다. 그런데 <시편 44편>은 성경학자들이 추측하건데, ‘히스기야’왕 때 ‘앗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유다왕국’이 공격당하고, 나라가 크나 큰 고난과 위기를 겪을 당시에, 찬양을 인도했던 ‘고라 자손’이 하나님께 호소로 올려드린 기도의 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눈 여겨 볼 점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과 권세를 놀랍게 선포하는 클라이막스에서 갑자기 과거 이스라엘민족이 참혹하게 외세에 의해 침공당하고 성도들이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당시의 시편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은 적어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본다면, 과거 앗시리아제국과 바벨론제국에 의해 혹독한 핍박을 받고, 말 그대로 ‘도살할 양’같이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 지금 성도들이 그런 엄청난 불의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로마교회를 위시한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실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로써 사랑과 양심과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그 어떤 로마시민이나 다른 백성들보다 타의 모범이 되는 탁월한 삶을 실천했지만, 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고 극심한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받았던 핍박과 고난이 얼마나 심했으면,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라고 토로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요, ‘시저는 신이다’고 말하며, 시저와 로마의 우상들 앞에서 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은 혹독한 핍박으로 성도들을 압박하고 핍박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v. 35~36)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런 불 같은 환난과 핍박이 아무리 크다 할찌라도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심히 사소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왜 여러분과 제가 이 모든 환난과 연단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사도는 이렇게 힘차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v. 37)라고. 그렇습니다. 그 어떤 환난과 불 같은 시련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하고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 곧 ‘그 강한 손과 펼 팔’로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주의 사랑이 반드시 우리를 넉넉히 승리케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셋째,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많은 영화 가운데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소위 ‘인생영화’를 뽑으라면, 저는 <벤허>를 주저하지 않고 그 중에 하나로 뽑을 것입니다. 물론 성도 여러분 중에 ‘벤허’영화 내용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주인공인 ‘벤허’가 유대인 명문가 청년에서 한순간에 노예로 전락하는 절망의 수렁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인생의 저 밑바닥 <노예선>에서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유는 ‘불타는 복수심’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오랜 어릴 적 친구, ‘메살라’ 그가 자기와 가족들을 배반하고 ‘로마 총독 암살 미수범’으로 몰아 하루 아침에 자기가족을 파괴시킨 ‘메살라’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이 그를 끝까지 살아 남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그가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용서하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그는 영혼 깊은 흔들림 속에 고민하게 되고, 결국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여러 번 ‘용서의 말씀’에 대해서 함께 그 의미를 나눈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팔복을 통해 최종적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4)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율법의 최종적인 완성인 사랑, 곧 ‘원수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 자신도 온전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의 삶에 있어서도 결국 형들에 대한 용서를 그가 실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 용서의 과정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 용서를 통하여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누리는 것’은 바로 당사자 본인임을 요셉이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 강력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나 스스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그 누군가에 대한 용서의 사랑을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 주고, 힘들게 했던 그 원수 같은 존재에 대한 주님의 용서의 능력이 결국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은혜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끊을 수 없는 용서의 사랑을 통해서 말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사도는 ‘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이 세상 뿐만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인지’를 오늘 본문 <35절>에서 시작하여 이제 마지막절 <39절>에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v. 39)고 말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하는 내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하지 않고,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v. 39)라고 사도가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반드시 밝히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시작된 사랑이요, 그의 독생한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준 하나님 아버지의 상상을 초월한 위대하신 사랑에서 흘러나온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한마디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선언한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 어찌 다 표현하고, 어찌 다 나눌 수 있을까요? 저는 단지 이 시간 <요한복음 3장16절>에 주께서 밝히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시고 깊으신 사랑을 여러분과 묵상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 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으십니까? 그분의 말씀에 날마다 거함으로써, 그의 영 성령을 신뢰하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되셨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v. 35,37) 바라기는 이런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혀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주와 함께 승리하는 충성스런 주의 제자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