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8, 2024

“만남과 헤어짐” (Meeting And Separation)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5:36~41
Service Type:

“만남과 헤어짐”

(Meeting And Separation)

4-28-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5:36~41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Some time later Paul said to Barnabas, “Let us go back and visit the believers in all the towns where we preached the word of the Lord and see how they are doing.”)

37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Barnabas wanted to take John, also called Mark, with them,)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but Paul did not think it wise to take him, because he had deserted them in Pamphylia and had not continued with them in the work.)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They had such a sharp disagreement that they parted company. Barnabas took Mark and sailed for Cyprus,)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but Paul chose Silas and left, commended by the believers to the grace of the Lord.)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He went through Syria and Cilicia, strengthening the churches.)

[설교 요약]

            오늘 말씀은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함께 데려갈 것인가에 대한 의견충돌로 인해 서로 심하게 다투고, 결국 갈라서게 되는 안타까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사람들을 품어주는 위로의 사람’ 바나바와 참된 주님의 제자로 삶을 실천했던 사도 바울이 왜 서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안타깝게 갈라지게 된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바울과 바나바의 헤어짐에 담긴 영적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는 성정을 가진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마가가 <1차전도 여행>당시 팀을 이탈해 돌아가버린 (v.38/행.13:13) 사실로 인해 그의 합류를 반대했고, 바나바는 그의 ‘사람을 품어주는’ 인품처럼 그를 데려 가기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서로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결국 다툼과 갈라짐으로 이어짐은 두 사람이 ‘루스드라’원주민에게 고백했듯이 자신들도 ‘성정을 가진’ 연약한 존재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행. 14:15).

둘째, “다툼의 결과보다 원인을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원인?’은 단순한 자신의 고집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의 동기라고 저는 믿습니다. 차이점은 사도 바울이 ‘사역중심’의 인물이라면, 바나바는 ‘인간중심’의 인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 것은 두 사람 모두 그 중심이 믿음에 있다는 사실 (롬. 14:6)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사람은 각각 바울은 실라를,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따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지만, 그 이후 주께서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은혜로 함께 하심을 봅니다. 그리고 훗날 바울도 마가를 받아들인 아름다운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딤후. 4:11).

바라기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도 합력하여 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충성되게 복음의 증거자로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종류의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합니다. 어떤 만남은 불행한 만남도 있고, 헤어짐이 도리어 다행이라고 할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그와 반면에, 그 만남이 복된 만남이라면 헤어짐이 몹시 서운하고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 당사자들 뿐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 조차도 그 헤어짐이 못내 아쉬운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의 헤어짐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의 헤어짐의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고,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로 인하여 아름다운 만남과 복된 헤어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대부분은 기억하시겠지만, 사도 바울과 바나바 두사람의 관계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있던 ‘바나바’가 그리스도교회를 핍박하던 자, 곧 청년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변화된 그의 간증과 진정성을 믿고, 열린 마음으로 그와 친교를 나눔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를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가교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사도행전 9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행. 9:26~27)라고 말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주의 제자들이 얼마 전까지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교 열혈당원 청년 사울의 회심을 못 미더워하고, 그와 교제하기를 두려워하던 상황에서,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회심의 진정성과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했던 사실을 알렸고, 이를 통해 사도들과 믿음의 교제를 가지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도들과 여러 주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 인격과 신앙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사람의 한명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나바의 이런 사람됨의 특성을 말씀 여러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4장>에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의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4:36~37)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주의 사도들이 ‘바나바’, 곧 ‘권위자’ 혹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주의 사도들이 인정할 만큼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성품의 사람이었기에 열린 마음으로 청년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을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지 않았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행전 11장>에서는 그의 신앙상태가 어떠 한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1:24) 한마디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25~26절>인데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바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5~26)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을 의심치 않고 믿고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고, 초대교회 리더였던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눌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고향 다소에 내려가 칩거하고 있던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를 격려하여 첫 이방인 교회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지도록 안디옥 교회를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는 이 시간에 새삼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이 불필요할 만큼 우리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빌립보서에서 소개하기를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핍박했던’ (빌. 3:5~6) 자기 자신이 다메섹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나서, 그의 삶은 극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그는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진실로 말로 만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했던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소유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보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그는 이제 모두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바울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주님의 참된 제자였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와 같이 흠잡을 것 없어 보이는 두 사람,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서로 의견 불일치로 심하게 다툰 끝에 결국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가 믿음 가운데,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복음을 위해 맺어진 관계라 할찌라도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서로 의견충돌과 다툼이 있을 수 있고, 또 서로 헤어질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 성경에서 오늘 사건 가운데 주시는 영적 의미를 우리가 겸손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과 바나바의 헤어짐에 담긴 영적 교훈일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는 성정을 가진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 때문에 이 신실한 두사람이 이토록 심하게 다투고 갈라지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가’를 새로 시작될 <2차 선교여행>에 함께 합류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의견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누구이고, 또 그를 선교여행에 동참케 하는 것이 왜 이토록 심각한 이슈가 된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먼저 그는 ‘요한’이라고 하는 <마가>로 불리었고, 그는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된 사건은 <1차 선교여행>에서 일행들이 첫 선교지 <구브로 섬>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 지역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팀을 이탈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행.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 13:13)라고. 쉽게 말하면, 마가는 <1차선교여행> 도중에 ‘중도하차’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 누가는 구체적으로 ‘왜 마가가 선교팀을 이탈하여 중도에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2차 선교여행>에 팀원으로 함께 데려 갈 것인가 라는 이슈로 심각하게 다투고 갈라지게 된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볼 때, 그 원인은 ‘마가’자신에게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서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마가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볼 때, 이 당시 마가는 아마도 ‘신앙의 가정에서 잘 자라긴 했지만, 적어도 선교라는 결코 쉽지 않은 불모지에서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감당하기에는 아직까지 많이 미성숙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책임하게 선교여행의 중도에 팀에서 이탈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그에 대한 깊은 실망과 불신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서 이와 같이 무책임한 행동을 했던 마가의 선교팀 합류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마가가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도 크게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앞서도 함께 나누었듯이, 사람을 품어주고 위로하는 바나바의 성품과 영적 자질로 보았을 때 ‘마가’가 굳이 조카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마가를 용납하고 그에게 ‘또 한번의 기회’ (a second chance)를 주자고 주장했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양쪽 모두 충분히 이해함직한 이유와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를 안타깝게 (아쉽게) 하는 것은 각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복음사역을 위해 타협할 수는 없었나 하는 점입니다.

저의 결론은 이것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의 연약함입니다. 앞장,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 가서 원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오해하고 짐승을 잡아 제사하고자 했을 때, 그들이 옷을 찢으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행. 14:15a)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연약한 사람이요, 우리와 같이 성정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제 3자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서 본다면, 두사람 모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기 전에 먼저 이해할 것은 우리 모두는 이런 허물과 연약함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 “다툼의 결과보다 원인을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좀더 성도 여러분과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인가?’하는 점입니다. 제가 앞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제가 왜 “누가 이들을 향해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씀드린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바울과 바나바의 <주를 향한 열심과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저는 이해하게 됩니다. 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굳이 구분한다면 사도 바울은 <사역중심>의 사역자였고, 바나바는 <사람중심>의 사역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청년 마가는 아직 선교일선에 나가서 선교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많이 준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상태로 간다면 다른 동역자들에게 까지 나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선교팀을 책임진 사도 바울로서는 충분히 판단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바나바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역자였습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의 연약과 부족을 이해하고자 노력했기에, 좀더 관용하고 지체들의 실수와 부족을 포용하고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나바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직 미성숙함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렸던 조카 마가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선교팀에서 배제해버리는 바울의 결정에 매정함과 강한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사건을 묵상하는 가운데 <로마서14장>에서 ‘음식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이렇게 영적 가르침을 주고 있음을 봅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 하느니라” (롬. 14:6)고. 바울이 마가를 <2차 여행 선교팀>에 합류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리고 바나바의 마가의 합류를 주장하는 이유도 그 중심 되는 원인은 하나님을 사랑 함이요, 그분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믿음이 동기가 되기가 되었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사실, 정답은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여러 주석과 설교자들의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예상데로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사도권과 안디옥교회가 사도 바울과 실라의 선교팀을 공식적으로 기도로 후원한 점들을 들어 바울의 결정이 옳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의 그의 사람중심의 용납함과 격려하는 자세에 무게를 두는 분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경우라면, 누구의 입장을 더 지지하시겠습니까? 제가 일어본 설교자나 주석가의 견해 중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존 맥아더>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는 “나는 바나바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의 결정에 공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의 판단이 어느 한쪽에 더 가깝다면,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그 반대의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하여 온 삶을 헌신한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두 사람의 다툼과 헤어짐으로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실라를 데리고 <2차전도여행>을 떠나는 바울이 거둔 복음의 열매는 말할 것도 없고,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섬으로 전도여행을 갔던 바나바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의 중심을 기뻐 받으심으로 아름다운 영적 열매를 거두었음을 짐작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비록 마가가 첫번째 선교여행 가운데 행했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그 이후 마가는 신약성경이 시작되는 4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베드로 사도와 함께 깊은 신뢰와 사역의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었고 (벧전. 5:13), 신실한 주의 제자로 탈바꿈되어 충성된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도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 4:11)라고 당부함으로써 이미 마가와 화해하고 그를 포용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할찌라도, 한가지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는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말한 것처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5,18)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런 저런 잘못된 동기와 연약함과 부족함 가운데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분의 복음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연약한 증인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주석가 매튜헨리의 말과 같이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져 사역함을 통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장소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바나바는 그의 고향 ‘구브로’에 갔고, 바울 또한 고향인 ‘길리기아’로 가서 많은 사역의 열매를 거두었다”라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처음 만남과 함께 헤어짐도 아름답게 제가 이해하는 것도 이것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사람의 만남과 헤어짐까지도 단순한 감정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이들은 만났고, 또 때가 되어 흩어지게 되었다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때로 실수하고 후회스러운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을 사모하고 그분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런 각자의 약함과 부족함에 매몰되어 두려워하거나 뒤로 물러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친히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그의 선한 생명의 역사를 완성시키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에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 순종함으로 담대하고 충성되게 복음의 증거자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