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더하소서” (Increase Our Faith)
“믿음을 더하소서”
(Increase Our Faith)
9-28-25
본문말씀: 누가복음 (Luke) 17:5,6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설교 요약]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믿음’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아마도 ‘무엇이 그분을 믿고 따르는 넉넉한 믿음인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갈망으로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께 구한 ‘믿음을 더하게 되는 상태’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런 믿음의 성장은 가능한 것일까요?
먼저 오늘 말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만약 형제가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범하고, 돌아와서 회개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v.4). 그 말씀을 듣고서 그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v. 5)라고 주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제를 그처럼 용서할 넉넉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의 간구에 대해 ‘겨자씨 한 알의 믿음’ 곧 ‘작을찌라도 살아있는 믿음’이 있는지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구했던 것처럼, “어떻게 우리는 믿음을 더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믿음이 부족함을 인정함으로써”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아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라고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둘째, “예수님께 구함으로써”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믿음의 본질’을 <히. 11장> (=믿음장)에서 설명하고 나서, <히. 12장>을 시작하며 “이러므로 ~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주인’ (the author of our faith)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함으로써 믿음을 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과 기도에 힘씀으로써”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도전하신 것처럼, 만약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제 ‘비옥한 땅’인 <말씀>과 ‘영적 단비’인 <기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 9:29).
만약 성도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야 함을 인식했다면, 주님께 나아가 ‘나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은혜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복된 삶 사시길 축복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믿음’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아마도 ‘무엇이 그분을 믿고 따르는 믿음인지? 무엇이 주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궁금함이 여러분 안에 큰 갈망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오늘 말씀에서 사도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구하는 그 모습을 통해 ‘믿음이 더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가능한지를 함께 살펴보고, 삶에서 각자 적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7장>이 시작되면서, 먼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작은 자’ 곧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지 말 것을 경고하시고, 또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v. 3)라고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만약 ‘그가 하루 일곱번이라도 너에게 죄를 범하고, 또 일곱번 네게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지난 시간 요셉의 삶을 통해서도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내가 누군가로부터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도전하시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형제를 향한 용서’를 강조하시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주께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v.5)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일부 성경학자들은 그 반응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해서 <누가복음 17장>의 앞 절 <1-4절>과 이어지는 오늘 본문을 포함한 <5절>이후의 내용은 서로 다른 시기에 발생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라고 주님을 향해 간구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도전과 명령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형제를 용서하라’ 그것도 ‘형제가 하루에 일곱번 죄를 범하고, 돌아와 일곱번 자기 잘못을 회개한다면 그를 용서하라’는 것이 내가 당사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쉽지 않을까를 짐작케 되는 것입니다. 남의 말하기는 쉽지만, 정작 자신이 그런 부당한 대우를 하루에도 일곱번씩 당하고, 되돌아서서 다시 용사한다는 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제가 이런 당사자가 되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잘못된 취급을 당하고, 그가 와서 또 다시 용서를 구한다면 아마도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그에게 쏘아붙이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지금 나를 놀리는거냐! 잘못하고 되돌아서서 금방 사과할꺼면 뭣 때문에 처음부터 잘하지! 도대체 지금 뭐하자는 거냐!?”라고 역정을 내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했다면,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 주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주께서 명하시는 그와 같은 용서의 넉넉한 마음이 너무도 부족함을 고백함과 동시에, 주께서 명하신 그런 ‘용서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변화시켜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근거는 오직 <성숙되고 자라가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제자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명하신 것처럼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제자들은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믿음의 간구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v.6)고 말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그들에게 있는지를 묻으십니다. 이런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 있다면, 놀라운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그런데 주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겨자씨’는 우리가 대부분 직접 본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주로 ‘핫도그’나 ‘햄버거’를 먹을 때 쳐서 먹는 ‘머스타드’ (mustard)라고 하는 노란 소스의 원료가 되는 것이 이 ‘겨자씨’(mustard seed)인데 이 겨자씨는 ‘1-2mm의 아주 작은 씨앗’으로서 육안으로는 식별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심기어지고 싹이 나면, 점점 더 성장하여 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겨자씨’를 통해 강조하시는 것은 <생명력>입니다. 비록 ‘겨자씨’가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을지라도 그 씨가 살아있기에, 땅에 심기었을 때 그것은 싹이 나고 가지를 뻗어 점점 더 자라 어느 순간 놀랍게 성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무리 작을지라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 믿음은 자라나서 성장하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임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제자들의 간구와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어떻게 우리는 믿음을 더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믿음이 부족함을 인정함으로써”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유사한 복음서 중의 하나가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치며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라고 간구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언급했지만, 우리 각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끊임없이 내면의 갈증 (허기)를 느끼는 중심에는 <부족한 믿음>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면의 영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생수’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내면적 목마름’을 느끼는 자체가 곧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기를 원한다’는 강력한 영적 신호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한편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제자들’의 부족한 (연약한) 믿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배에 타 피곤하셔서 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때 마침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 파도가 배를 삼킬 만큼 되었을 때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주님을 깨우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5,26)이라고. 여기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코미디 촌극’같이 웃으꽝스럽기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목격했던 사람들인데, 막상 어두운 바다에서 배를 삼킬듯한 성난 파도에 마음이 빼앗겼을 때, 예수님이 그들 옆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할 전능한 메시야시라고 그들이 믿으면서도, 그 성난 파도는 다스릴 수 없고 그럼으로 잘못하면 자신들처럼 이 성난 파도에 휩쓸려 함께 주님도 죽을 수 있다고 어떻게 그들은 생각할 수 있는지 심히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아마도 그 풍랑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제자들은 아예 예수님에 대한 정상적인 믿음이 얼어붙은 것처럼 작동하지 못하고 됨으로 결론으로 매우 코미디 같다 상황을 연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그들의 믿음을 일깨우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번째 사건’이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초대교회가 시작되어 놀랍게 부흥할 무렵 유대 헤롯 왕이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고 죽이고자 시도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감옥에서 사도 베드로는 군사 몇 명씩에 의해 그의 오른손과 왼손에 쇠사슬로 서로 연결되어 2중 3중으로 삼엄한 경비아래 감옥에 갇혀서, 이제 날이 밝으면 헤롯의 명령에 따라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놓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밤 주의 천사가 나타나 경비하던 경비병들과 베드로와 함께 쇠사슬로 연결하여 그를 감시하던 여러명의 군인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그를 묶었던 쇠사슬을 풀뿐 아니라, 갇혔던 감옥의 모든 문들을 열어 통과시켜 그를 구출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구사일생의 기적 같은 천사의 권능의 능력으로 살아 돌아온 베드로가 그의 구원을 위해 성도들이 밤을 새며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에 조심스럽게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먼저 그의 문 두드리는 소리와 목소리를 어린 소녀가 알아보고, 반가운 나머지 먼저 뛰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왔다고 말합니다. 그때 성도들의 반응 또한 가관입니다. 그들은 소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 12:15)고 말입니다. 그렇치만 계속해서 베드로가 문을 두드렸음으로 그제서야 그들이 상황을 깨닫고 가까스로 그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도들이 밤새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놓고는 정작 그가 살아 돌아왔을 때는, ‘네가 미쳤도다 ~ 그가 아니라 그의 천사라’는 말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이렇게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으로 밤새 기도한 성도의 모습으로는 ‘부족한 믿음’의 단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주의 말씀과 약속하심을 더욱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깊은 믿음의 성장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믿음의 부족’을 알려주는 영적 ‘바이오메타’와 같은 ‘내면의 목마름’을 느꼈다면, 그 목마름을 외면하지 않고, 나의 믿음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의 영 성령의 충만을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더하는 두번째 단계로 연결되는데, 만약 우리 각자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분명히 인식했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둘째, “예수님께 구함으로써”입니다: 먼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가복음 9장>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분명히 취했던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 구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 아버지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자기의 믿음 없음을 분명히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예 없다면, 자신이 믿음 없음 조차도 깨닫지 못함!!) 그리고 둘째는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킬 존재가 누군지를 인식’했고, 적극적으로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은 세상의 지식도 나의 노력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무엇이 성도들의 ‘믿음의 본질’인지를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탁월하게 설명하고 나서, <12장>을 시작하며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의 ‘믿음의 주인’ (the author/ pioneer of our faith)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나아가 “주님, 저의 연약한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평상시 자주 자주 우리 청년들에게 도전하고 격려하듯이, 우리 크리스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주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필요한 지식과 테크놀러지를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넘치게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주석가 ‘매튜헨리’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간구에 대해 이렇게 주석한 것을 곰곰히 묵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은 용서의 어려운 의무를 넉넉히 시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하심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 있어 대단히 어려운 것들을 이기게 해 줄 것입니다”라고. 그럼으로 믿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덧입게 될 때 여러분과 저는 비로소 그토록 힘든 형제와 자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과 기도에 힘씀으로써”입니다: 오늘 저는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무엇이 믿음인가?’보다는 ‘어떻게 그 믿음을 더 키워 나갈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약해서 ‘무엇이 믿음인지?’를 잠깐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믿음’은 ‘맹신’도 아니고, ‘자기 확신’이나 ‘자기설득’ (마인더컨츄럴)도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그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중에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우리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인간부부가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관계가 깨어지고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에 사로잡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그 피로 대신 그 죗값을 갚으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의 아들과 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믿음장>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렇게 한절로 선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 11:6)고 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첫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과 둘째 ‘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 주신다는 것이 바로 ‘성도의 구원과 풍성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을,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내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구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말씀을 마무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우리 각자가 믿음을 더하기 위해서 행해야 할 점’은 ‘첫째 나의 믿음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그럼으로 ‘둘째 믿음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이런 나의 부족한 믿음이 더 자랄 수 있도록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아가 ‘저의 부족한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구했다면, 이제 마지막 우리의 행할 바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마지막은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것임을 믿습니다.
먼저 <말씀>이 우리 성도의 믿음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영적 자양분이 되고, 힘과 능력이 되는지는 사실 길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우리 모두는 잘 알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시편기자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말씀의 중요성을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시. 119:105)라고. 만약 이 어둡고 황량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과 등불’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그 말씀으로 힘을 얻고 새로와지지 않으면서, ‘더 크고 성숙된 믿음’을 구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울창한 산천초목에 ‘비옥한 자양분’을 제공하는 ‘흙’과 같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된 믿음과 승리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떨까요? 우리가 살펴본데로,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주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구했을 때, 주님은 그의 자비하심과 선한 능력으로 그 아들을 압제했던 그 더러운 귀신을 말씀으로 좇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나서, 제자들은 이렇게 낙심된 마음으로 주께 조용히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8)라고 말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짧은 한마디 말씀속에 ‘기도’가 얼마나 믿는 자의 삶에서 진정한 능력과 응답 받는 삶으로 인도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영광스런 특권’이요, 그리스도의 영되신 성령을 통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진리와 자유의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게 하는 ‘영혼의 잠수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악한 귀신을 쫓아낼 뿐 아니라, 내게 상처준 지체를 진실로 용서하며,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이런 아름답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할 다른 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날마다 무릎 끓어 구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함으로 고하고, 그분께 신령과 경배로 기도를 올려 드리고 있습니까?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할 것이라)” (삼상. 12:23)고 이스라엘백성 앞에서 다짐을 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않는 신실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요즘 성도 여러분의 삶은 충만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십니까? 아니면 삶의 깊은 허기와 목마름으로 힘들어 하십니까? 만약 오늘 말씀 가운데 여러분 자신이 ‘더 믿음이 자라야 할 자’임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셨다면, 오늘 이 시간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의 신실한 응답 받고, 날마다 꿀송이보다 더 말씀을 사랑하고 더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와 생명의 바다를 헤엄치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복된 주의 자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