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의미” (The Meaning of New Covenant)
“새 언약의 의미”
(The Meaning of New Covenant)
10-19-25
본문말씀: 히브리서 (Hebrews) 9:14~15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요약]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중요한 ‘성경적 개념’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언약’입니다.
먼저, ‘언약’ (Covenant)의 사전적 뜻은 ‘약속’ (promise)이지만, <일반적인 약속보다 더 무겁고 신성한 의미를 지닌 ‘합의’ (agreement)나, ‘계약’ (contract)>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종교적으로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특별한 약속>을 뜻합니다.
한편 성경에서는 두가지 언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하나님이 구약에서 ‘이스라엘민족을 자기민족으로 삼으신 언약’인 ‘옛 언약’ (Old Covenant)과,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인 ‘새 언약’ (New Covenant)이 있습니다.
이렇게 첫번째 언약인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염소의 피 뿌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셨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고 맹세하였습니다.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1,400여년이 흘렀는데, 첫 언약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단 한 명도 그 언약을 지킨 자가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23)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죄의 유전으로 인간들이 선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이미 아셨지만, 이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도록’ 첫 언약 곧 ‘옛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겔. 11:19~20; 렘. 31:32~33).
그리고 때가 되어 새 언약의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보배로운 피를 ‘새 언약의 피’로써 흘리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새 언약에 속한 자녀 삼으시고, 약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새 언약이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력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택한 자를 구원’합니다: “그 (예수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니 ~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v. 15)는 오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되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구원의 기업을 얻게 됩니다.
둘째, “죄와 싸워 승리”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뜻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 죄와 싸워 승리하는’ (롬. 8:13)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몸을 이루게”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언약의 피’ (마. 26:28)를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겨 주시며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 (요. 13:14)고 당부하셨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주의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넷째,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누리게”합니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 (렘. 31:33)라고 하나님은 장차 새 언약을 그의 자녀들의 마음판에 새길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바로 주의 영,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써 입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우리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복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죄와 싸워 이겨나감으로 기쁨과 소망의 삶을 함께 누려가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올바른 영적 성장과 주님의 약속하신 은혜를 누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영적 성장과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가 잘 이해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성도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로마서 8장>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매여 사망에서 해방되고 죄와 싸워 승리하는 구원받은 성도의 복된 기쁨과 만족의 삶에 대해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는 성경 중에서도 ‘성도의 영광스러운 신분’은 무엇인지를 매우 탁월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영적 개념 가운데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언약’ (Covenant)이 있는데, 이것을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비하신 진정한 자녀의 권세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가 진술하는 ‘새 언약’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은 진리를 각자의 삶에 바르게 적용함으로 새언약의 축복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나누어 주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성경 66권의 첫 책인 <창세기>를 읽다 보면, 여러 인물들이 거론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은 실로 핵심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사람을 택하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간구원의 역사 (=구속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성경학자들 중에서 ‘만약 창세기를 두부분’으로 나누라면, 아브라함 전후로 나누겠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구체적으로 베푸신 <구속역사> (History of redemption)를 통해 성도 여러분 각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면, 이제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를 우리는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먼저 깨닫아야 할 중요한 성경의 요소가 ‘언약’ (Covenant)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약’일까요?
먼저, ‘언약’의 사전적 의미는 ‘약속’ (promise)이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일반적인 약속보다 더 무겁고 신성한 의미를 지닌 ‘합의’ (agreement)나, ‘계약’ (contract)를 의미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종교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특별한 약속’을 뜻하고, 영어로는 ‘covenant’ 그리고 구약성경,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베리트’ (בְּרִית)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옛 언약’ (Old Covenant)이고 둘째는 ‘새 언약’ (New Covenant)입니다. 먼저 <옛 언약>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심을 계약/언약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새 언약>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새로운 계약/언약>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간략하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런 언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신 중요한 사건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백성들을 시내산에 모으시고 그들과 ‘언약식’을 맺는 장면이 <출. 24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언약서’를 백성 앞에서 낭독하고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라고 맹세했으며, 그때 모세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려 언약의 피로 삼아 언약식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과 언약식을 맺은 것이 <옛언약>인데, 그 ‘언약’ (계약)의 핵심을 <신명기서>에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구원을 얻겠지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자주를 받을 것이라” (신. 27:26)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나서, 1,400여년이 지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이스라엘민족의 영적 상태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이 구약성경의 두번째 책인 <출애굽기>에서 마지막 책 <말라기서>까지의 모든 구약성경의 기록인 것입니다. 이들의 상태는 한마디로 ‘처참합니다!’. 이들을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의롭다’고 불러줄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행위로서 구원받을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단 한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그들과 계약하신 ‘율법의 기준’에서 볼 때 모두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로마서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23)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두번째 언약, 곧 ‘새 언약’을 맺으셔야만 했는지 하는 정확한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선한 율법을 주셔서 그것을 지키면 살게 되는 구원’을 약속하셨지만, 안타깝게도 단 한사람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새 언약’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단 한사람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우리의 첫 조상, 아담으로부터 <원죄>라는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인류는 마음은 원이로되 선을 행할 능력이 없고 실제로는 죄의 막강한 힘 아래 종이 되어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성도 여러분 중에서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셨나요?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신 것인가요?’ 라고 질문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휼륭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 볼 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은 옳은 것인가?’ 곧 ‘하나님의 율법은 정의롭고 합당하고 선한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고 선하며, 그 어떤 결함이나 잘못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완전하심과 순결하심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또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시. 19:7)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고 그 말씀데로 행하기만 하면 생명을 얻게 되지만, 문제는 우리 인간은 그 율법을 따라 온전히 행할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셨을까요?”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못 지킬 율법을 주신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첫 언약’, 곧 <옛 언약>을 주신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임을 하님은 이 ‘첫째언약’에서 분명히 밝히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도 결코 율법의 기준에 미달하는 자, 곧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문제는 인간이 그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고, 단지 그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 율법을 통해 우리 인간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깨닫음과 같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롬. 3:20)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세번째), <하나님은 복음 안에 ‘한 의’를 예비하셔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그분의 보배로운 피, 곧 ‘새 언약의 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할 계획을 만세전에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마. 26:28/엡. 1:4~5). 이것이 하나님께서 먼저 ‘옛 언약’을 주신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구원의 방법을 행하셨는지?’는, 비유하자면 <지혜로운 부모>가 자녀들을 훈육하는 방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하고자 했을 때, 언제나 먼저 나서서 아이 앞을 가로막고 대신 일을 처리하는 그런 과보호형 부모가 아니라, 최대한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그것이 잘못된 결정이라면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어떤 대가지불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그 아이가 스스로 최대한 경험하고 분명히 깨닫도록 해 주는 것이 지혜로운 부모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없는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과 우리 인간 부모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과 맺으신 ‘첫 언약’의 동기도 <지혜로운 부모>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천여년이 넘는 긴 ‘고난과 아픔’이라는 대가를 지불했을지라도, 이스라엘민족 가운데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자신은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예정하신 두번째 언약, 곧 ‘새 언약’을 그의 택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에스겔서 11장>말씀인데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19~20)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장>말씀인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2~33)고 장차 새 언약을 그의 자녀와 맺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새마음을 주셔서 이제는 돌판에 새긴 말씀이 아니라, 우리 마음판에 직접 그의 영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선하신 말씀을 새겨 주심으로써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말할 필요조차도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렘. 31:34)고 말입니다. 더 이상 구약의 범죄한 이스라엘과 같이 ‘끝없이 하나님께 맹세하고, 끝임 없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악을 저지르는 불행한 삶’을 반복하여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새 마음>을 주심으로써 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며 참된 구원을 갈구했고, 하나님께서 그에 응답하시며, ‘구원자’를 보내셔서 이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메시아가 2천여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대민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지금도 하늘을 쳐다보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그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과 다시 세우신 두번째 언약, 곧 <새 언약>은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이런 중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죄 없으신 예수님의 보배롭고 피, 곧 그분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내어 놓으심으로 과거 옛 언약식 때 모세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뿌려 그 언약식을 체결한 것처럼, 예수님의 피를 뿌림으로 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 언약식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께서 한번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 9장> 후반절에 보면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고 구원 얻기 위해서는 오직 ‘피 흘림’ 곧 ‘그리스도의 생명 되는 피’를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드릴 때만 가능하다고 영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요, 새 언약을 우리와 맺으신 목적인 것입니다. 바로 새 언약의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속죄함 받고, 그분의 생명으로 여러분과 제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유업과 특권을 누리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하나님께서 왜 성도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이라면,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무엇이 새 언약이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력인지?”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택한 자를 구원’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셔서 <인류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4백여년이 지난 후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그의 후손 이스라엘민족과 짐승의 피 뿌림을 통해 언약식을 체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자기백성 삼으시는 ‘언약식’맺으셨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그들이 그 약속을 지킬 때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동안 살펴본 것처럼, 옛 언약을 통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이제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밝히듯이 ‘새 언약의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으로 주시는 ‘영원한 기업’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v. 15)라고.
둘째, “죄와 싸워 승리”케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접하여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구원의 특권과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오늘 말씀은 중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목적’은 ‘구원’이 전부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뜻은 ‘구원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녀의 신분에 합당한 성숙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을 좇아 주님 만나는 순간까지 날마다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성도가 죄와 싸워야 하는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정확한 이유인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라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에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간교한 유혹의 죄와 맞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 승리함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새 언약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몸을 이루게”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날 밤,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 성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셨습니다. 먼저 무교병 떡을 떼어 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 26:26)고 말씀하시고, 또 포도주 잔을 나눠 주시며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일때마다 이와 같이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3~26)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모일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살을 찢으시고 흘리신 ‘언약의 피’ (the blood of the covenant)로써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대속죽음>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하심 인 것입니다. 저는 이 명령의 핵심은 주의 몸된 교회, 곧 주님을 머리로 모인 성도들이 주의 대속죽음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자 함이라 믿습니다. 주께서 성만찬을 나누고,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겨 주신 것처럼 (요. 13장), 제자들이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섬김으로 종노릇하여 주님을 머리로 한 몸을 이루게 하심인 것입니다.
넷째,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누리게”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선지자 ‘예레미야”는 장차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택한 자녀와 세울 ‘새 언약’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3)고. 그리고 이 약속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성령충만’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여 주의 제자들에게 불의 혀같이 권능으로 임함으로 시작된 성령강림의 충만한 역사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스스로 확신하면서도, 왜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갈등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 중심에는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 저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써 새 언약의 중보자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새롭게 맺게된 ‘새 언약’을 통해 그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깨닫지 못하고 구하지 못할 때, 충만한 성령의 은혜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만족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을 통해 성령충만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짐으로 약속하신 은혜를 한량없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새 언약’에 속한 주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표는 ‘구원’자체가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의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에 합당한 성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본받아 그분의 장성한 신분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주의 영,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기쁨과 넘치는 소망의 삶을 함께 누려가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