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왕노릇” (Grace Reigns)
“은혜가 왕노릇”
(Grace Reigns)
7-19-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5:20~21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 요약]
이제 사도는 <5장>을 마무리하면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v.20)고 선언합니다.
먼저 사도는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5장>을 통해 우리 성도의 변화된 신분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지를 <10절>의 ‘그의 생명을 인하여’ (by His life)를 통해 구체화했는데, 이것은 ‘그의 생명 안에서’ (in His life) 우리 성도가 ‘구원과 온갖 은혜의 선물’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가 <5장>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율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성도의 삶은 ‘율법을 무시하는 (죄 짓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6:1~2,15)
둘째)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롬. 3:20) 할 뿐 아니라, ‘죄를 더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롬. 5:20)
셋째) 그러나 성도의 삶은 ‘율법과 죄가 왕 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의로움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입니다 (롬. 5:21)
이처럼 오늘 본문의 로마서 5장 20~21절에 내포된 <율법과 은혜의 의미와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어지는 <6-7장>의 뜻을 깨닫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6장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주제로한 ‘은혜’의 영향력을 구체화하며, 7장은 <율법과 인간과의 관계>를 사도가 묘사하기에, 먼저 율법의 기능과 은혜의 근거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가겠지만, 오늘 말씀에서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의미를 먼저 이해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은혜’요,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 (엡. 2:8)
<은혜가 왕노릇>: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상태” (롬. 8:31~39)입니다
다시 말해, <은혜가 왕노릇>하는 것을 성도의 삶에서 본다면,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쁨과 감사로 열매 맺는 삶’ (갈. 5:22-23)이요, 궁극적으로 ‘영생을 빼앗기지 않고 마침내 이루는 것’ (요. 10:28)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리적으로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라고 부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통하여 성도 여러분 마음 가운데 한량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녀의 풍성한 삶을 날마다 더 깊고 넓게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그동안 <로마서 5장>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우리 성도의 존재를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가 <로마서 5장10절>에서 밝혔듯이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0)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곧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것임을 우리는 지난 시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제목의 설교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성도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누리게 되는 진정한 특권과 능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생명’의 구원이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자유함이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은혜와 축복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5장>을 마무리하면서 “~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v.21)고 선언합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해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여러분과 저의 삶이 더 이상 ‘죄로 말미암아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지 않고, ‘의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은혜가 왕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함께 이해하고, 분별하는 복된 시간 되길 원합니다.
지난 시간, 저는 두번의 설교를 통해 사도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이렇게 <13~14절>에서 진술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v. 13,14)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도가 ‘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살았던 자를 언급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심에는 유대인들의 관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말할 때 언제나 율법을 잣대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기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돌판에 새겨주신 십계명, 곧 <‘첫 율법’이 주어지기 전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 시대에서도 죄는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창세기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상에 죄가 심히 관영함으로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물로써 세상을 심판코자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규정하기 전에도, 이미 죄는 세상에 관영했고, 충만했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율법의 유무에 관계없이 이미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유전을 받은 존재였기 떄문입니다. 바로 ‘죄성’ (sinful nature)을 아담으로부터 유전 받았기에, 율법이 어떻게 판단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그 원죄인 죄성으로 인하여 죄를 범했고, 그 결과 죄의 삯 (열매)인 사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보편성’이요, 첫사랑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 죄가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하게 된 결과이며, 이 죄의 보편성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죄의 판단근거로 삼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로마서 5장>후반절, ‘12~21절’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생명과 많은 은혜의 선물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20~21절>로써 <5장>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율법’을 언급함으로써 우리 성도의 삶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5장>을 마무리하며 율법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방금도 설명 드렸듯이, 첫째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떠나서는 죄를 판단하기 어려워했지만,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죄는 관영 했다는 사실>을 사도는 분명히 밝히며, 둘째는 이것이 더 큰 이유인데,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율법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후에 개종한 기독교인들의 경우는, 현재 ‘5장’까지 사도가 주장하는 복음을 듣다 보면 마치 사도가 ‘율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기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사도가 ‘6장’에 가서 몇번씩이나 “그럴수 없느니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6장1~2절>에서, 그리고 “~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렇 수 없느니라”고 <6장 15절>에서 거듭 거듭 자신의 주장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못하도록 목을 박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마치 바울의 주장을 율법에 어긋나는 것처럼 폄하하는 ‘율법주의자들’이나, 혹은 그의 주장을 왜곡시켜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방탕한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코자 하는 ‘율법폐기론자들’ 이들 양극단론자들의 주장 모두를 사도는 반박하면서, 율법은 폐기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의 복음과 그 뜻은 방탕과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시는 것이 아님’을 사도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줄여 말해서, 사도는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으로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말은, ‘이제 그럼 율법은 안지켜도 좋다는 말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율법의 기능/역할’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임’을 그는 힘주어 강조합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해 그가 주장하는 핵심입니다. 한편, 오늘 말씀이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어질 <로마서6장~7장>을 이어주는 열쇠가 오늘 본문인데, 그럼으로 오늘 말씀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6~7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6~7장>에서 다뤄질 내용이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요약되는 ‘6장’에서 ‘그리스도와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되고, 반면 이어지는 ‘7장’에서는 ‘율법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사도가 밝혀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6~7장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그러했듯이 전정한 복음의 진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먼저 율법의 기능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남은 시간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율법의 기능’은 앞서도 확인한 것처럼, 첫째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1장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인간들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 곧 인간의 죄를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났다’고 <로마서 1장18절>에서 시작하면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악들을 숨김없이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0,11)라고 인간의 죄악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나서, <3장20절>에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라고. 이런 사도가 ‘인간과 율법의 관계’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율법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수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로마서 전체에서 대반전을 가져오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 곧 <하나님의 의>의 길이 무엇인지를 이어지는 <로마서 3장21절>말씀을 통해 사도느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이 시작되는 시작은 ‘우리 인간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착각 (환상)을 버리고, 율법을 통해 나의 죄와 허물을 철저히 인식하고 고백함으로,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분의 의로우심을 통하여 죄 없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됨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아직까지도 믿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가 주장하는 ‘두번째 율법의 기능’에서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죄를 더 증가시킨다(넘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0절>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v. 20) 여기서 “범죄를 더하게”라는 표현은 “범죄를 증가시키게” 혹은 “범죄를 더욱 넘치게”라고 <한글성경버젼>에 따라 번역되는데, 골자는 ‘율법이 우리 인간의 죄를 경감시키고, 줄이고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부채질하고 촉발시킨다’라고 사도는 엄청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보다도 ‘율법’에 있어서 역설적인 사실은 더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할 율법이 도리어 우리 인간을 더 악한 죄로 몰아넣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엄청난 역설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이런 율법의 모순과 역기능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어떤 문제도 아니요, 그 선한 율법 자체의 문제도 아닙니다. 단지 문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죄를 유전 받은 우리 인간의 ‘죄성’ (the sinful nature)이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의 막강한 힘이 내 육신을 장악하고, 내 안에서 왕노릇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아무리 선한 줄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것을 행할 힘과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실제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강력한 죄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죄의 막강한 힘으로 인하여 율법이 결국 우리 속에서 죄를 더욱 증가시키고, 범죄를 양상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사도가 통렬하게 밝힌 대표적인 말씀이 <로마서7장>이라고 믿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롬. 7:7,8,13) 사도의 주장처럼 ‘죄가 죄로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죄가 심히 죄로 만 천하에 밝혀짐으로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댈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악을 더욱 증가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면, 예를 들어, ‘여러분의 손바닥을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닦아서,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한 세균들이 득실데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영적 전자현미경>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의 덩어리들이 얼마나 크고 흉측한지를 부인할 수 없도록 확대하여 분명히 확인케 하심으로, 영적 환부를 도려내야 함을 깨닫게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예/ 십계명 읽지 말자?!/ 한 승려…)
그러나 사도가 진정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전부가 아니라, <은혜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역사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입한 범죄의 영역’과 ‘은혜가 가입한 은혜의 영역’이 얼마나 상반된 지를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대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v. 20,21)라고. 제가 오늘 말씀을 성도 여러분과 마무리하며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난 날 예수님 믿기 전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강력한 원죄의 힘으로 말미암아 죄가 우리 속에서 왕 노릇하는 삶을, 다시 말해 우리는 죄의 노예로 사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속함으로써 그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우리 속에서 왕 노릇하는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 것인지를 사도는 이 말씀에서 온 힘을 다해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은 <죄가 왕 노릇하는 삶>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은혜가 왕노릇 한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이런 말이 여러분에게 더 이상 별 감동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된 우리 성도의 신분의 변화에 대해 여러분이 별 감동이나 기쁨이나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그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 사랑을 안타깝게도 깨닫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번 구원하신 은혜는 결코 취소되거나 박탈되지 않는 것’임을 저는 이해합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단 가운데서도,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구원>에 관련한 ‘성경교리’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인 것입니다. 특별히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구원관에 반기를 들고 참된 신앙을 위한 ‘개혁의 깃발’을 높이 올렸던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의 3대모토’라 불리는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이라는 구호 아래, 천주교회 교황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일시 한다든지, 성례전과 선행을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여기는 비성경적 가르침을 과감히 배격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대표적 종교개혁가이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존 칼빈’의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교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그 엄청난 복음의 비밀을 가장 웅대하게 선언하는 교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견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고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라고 말입니다.
저는 앞으로 <6~7장>의 말씀을 묵상해가며, 기회 닿는 대로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의미를 더욱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앞서 살펴본데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중요한 기독교리를 함께 나눈다고 하는 ‘천주교회’와 여러 기독교교단들에서 볼 수 있는 구원관의 차이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기독교회의 역사가 길다고 하는 ‘천주교회’조차도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게 됩니다. 같은 기독교회 안에서조차 이러하다면, 초대교회 당시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이라든가, 하물며 ‘개종하지 않은 율법주의적 관점의 유대인들’의 경우는 이와 같이 ‘한번 택한 자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가히 혁명적이요, 그들의 눈에는 이 사상은 ‘율법폐지론’이나 다름없이 느껴지고, 어마 어마한 종교적 지각변동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늘로부터 임하게 되었음을 선포함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복음’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녀를 향한 그 사랑’ 곧 ‘우리를 그의 아들을 통해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가운데 폭포수같이 부어 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을 마침내 완성으로 이끄시는 ‘은혜의 복음’임을 이제 <5장>을 마무리하며 더욱 분명히 밝혀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한번 구원하셨지만, 우리 각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어떻게 믿음 생활 잘 하는지 봐서, 구원을 주시기도 하고 취소하기도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빌립보교회>성도들에게 밝혔듯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구원의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곧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날’까지 우리 속에서 성령으로 그의 충만하고 끊을 수 없는 사랑 가운데 역사 하셔서 마침내 그 구원을 완성시키심을 우리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왕노릇하는 엄청난 기쁨과 능력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와 같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믿는다면, 이 구원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여러분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고 넓은 은혜로 반드시 완성될 것을 믿습니까? 바라기는 그 어떤 율법의 행위도, 또한 ‘율법폐기론’적인 방탕한 생각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성도 여러분 마음 가운데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녀의 풍성한 삶을 날마다 더 깊고 넓게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