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 (The Wages of Sin Is Death)
“죄의 삯은 사망”
(The Wages of Sin Is Death)
8-30-26
본문말씀: 로마서 (Romans)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로마서6장23절>을 통하여 함께 6장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오늘본문의 <롬. 6:23절>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6장 뿐 아니라, ‘5-6장’ 혹은 더 나아가 로마서 전체의 결론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먼저 사도는 5장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5:1) 우리 성도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신분을 선포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속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5:12-21).
그리고 이어지는 6장에서 사도는 ‘우리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 (6:1,15)고 선언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남’ (성령침례)으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6:3~11).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게 되었다면’, ‘너희 몸을 <의의 병기>로. 더 나아가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드리라’ (6:12~22)고 사도는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삶의 실천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는 6장을 마무리하며 <23절>을 선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로마서6장23절>이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누가 나의 주인인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5,36)라고 선언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의 종으로 죽음의 열매를 맺던 우리를 자유케 함으로, 선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삯이지만, 영생은 선물이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 (the wages of sin) 곧 ‘죄가 지불하는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 (eternal life)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the gift of God)’인 것입니다.
셋째, “그럼으로 의의 종이 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출. 5:1)라고 명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종살이하던 우리를 건져 내셔서, 선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의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거룩의 열매를 맺으면서 말입니다.
바라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살아난 자녀가 되어 ‘은혜가 왕 노릇하는 주의 다스림 아래서, 거룩과 생명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우리는 <로마서6장>의 마지막 절인 <6장23절>을 통하여 함께 6장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된 영광스런 우리 크리스챤의 신분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여러 주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1장>을 시작하면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복음>이라고 선언하고 나서. <4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를 들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롬.4:3)고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5장>에서부터 오늘 <6장>의 마지막절 ‘23절’에 이르기까지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변화된 우리 성도의 놀라운 신분의 변화는 무엇인지’를 밝혀 왔고, 우리는 함께 은혜롭게 확인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6장23절>말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6장>을 마무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의 복된 아들과 딸로 삼으셔서 변화시킨 우리 신분은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된 자녀의 신분을 누려나가고, 은혜가 왕 노릇하는 영생을 지금부터 함께 누리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23절>은 사도가 6장을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선언하고 있음을 우리는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말씀을 <6장>뿐 아니라, ‘로마서’전체의 결론이라고 까지 주장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v.23)는 말씀을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가장 짧고도 분명하게 ‘죄의 결과는 무엇이며,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은혜는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밝히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선포하는 주일설교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니라, 복음전도자의 ‘구호’나 ‘전도용 소책자’에서 핵심적 복음의 메시지로써 빠지지 않고 사용되는 말씀이 <로마서 6장23절>인 것 같습니다.
먼저, <로마서 5~6장>전체에서 ‘오늘 본문 6장23절과의 관계는 어떠한지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함께 살펴보았듯이, 사도는 <5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넘치게 받은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를 어느 정도 사랑하시는지를 사도는 <5장5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5)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부어진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사도는 이 사랑을 <로마서8장>에서 이렇게 놀랍게 선언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라고. 사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은 세상 그 어떤 피조물도 결코 막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장엄하고도 영광스럽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살펴보았지만, 사도는 <6장>을 통해 ‘왜 우리 구원받은 자가 죄에 거할 수 없는지?’ ‘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가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6장을 시작하면서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6:1)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한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15절>에서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5)라고 지속적으로 성도가 죄 지을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통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이요, ‘그럼으로 우리는 이런 복된 신분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6장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v.11)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사도는 우리 성도의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존재’임을 밝힘과 동시에 ‘그럼으로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자녀된 존재답게 살아라’고 또한 도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전은 무엇일까요? 그 도전은 첫번째가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 (v.13)이요, 둘째는 ‘우리 몸을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v.16~22)입니다. 그리고 사실 ‘의의 병기’가 되는 것과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다른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개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여기서 ‘병기/도구’와 ‘종’의 차이점을 들라면, 그 의미가 좀더 확장되고, 더욱 적극적이고도 충성되게 주인의 뜻을 따라 쓰임 받는다는 점에서 ‘병기’에 비해 ‘종’이 보다 더 발전되고 지혜와 인격적인 개념으로 승화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23절’은 특별히 사도가 6장 후반부인 <15~22절>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써,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인지를 밝혀 주고나서, 이제 6장을, 아니 <5~6장>전체내용을 정리하며 결론짓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과연 “무엇이 <로마서6장23절>이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누가 나의 주인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우리의 삶을 절대적으로 영향 미치는 존재가 있을 것인데, 그 존재는 우리의 부모님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소간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성인의 나이 정도까지는 부모의 슬하에 있다가, 점차 독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부모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런 부모와 가정에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모두는 그 부모 아래서 평생에 미칠 강력한 삶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학교 다니며 어떤 선생님을, 또 어떤 지도 교수님을 만나느냐, 또 직장 생활하며 어떤 상사와 보스를 만나는 가가 우리 삶의 중요한 변환점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모나 학교 선생과 직장 보스는 우리가 따르고 우리 인생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 대표적 인물이지만,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그동안 로마서6장의 말씀 가운데 함께 나누었듯이, 주인에 대한 인식이 우리 인간 스스로 느끼는 것과 실제와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8:33)고 주님께 강하게 반발합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반응이 무엇을 뜻할까요? 자신들은 결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 자유인인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까요? 저는 두가지면에서 유대인들은 진실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먼저는 <역사적 사실>에서 그렇습니다. 사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모를 리 없듯이,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크게 두번 남의 종이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야곱이 그의 12아들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이후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출애굽>할 때까지, 400년간 그들은 애굽의 바로왕 밑에서 종살이하며 고통가운데 신음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두번째 사실은 기원전 6세기경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이 남유다를 침공해서 왕과 귀족과 대부분의 백성들을 70년간 전쟁포로로 잡아간 사건입니다. 이것을 ‘바벨론 유수(幽囚)'라고 부르는데, 이때 유대인들은 전쟁포로로 잡혀가 어쩌면 노예보다도 더 못한 비참하고 굴욕적인 나라도 없고 인권도 없고 풀려날 기약도 없는 포로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금 와서는 예수님을 향해 천연덕스럽게 ‘우리가 남의 종이 없는데 무슨 우리가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냐?!’라고 역사왜곡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말했던 것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이들의 ‘강한 자존심’이요, ‘선민의식’의 발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제적으로 남의 종이 되었건 아니건 관계없이, 자신들은 할례 받지 못한 저 이방민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자신들은 선민이요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가 진짜 심각한 것인데,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믿는 것은 첫번째 두번의 역사적으로 남의 종이 된 사실을 부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종이 되어 살아가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맡았다는 이유로 해서 강한 자부심과 대부분 구원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믿음을 산산히 부수는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4)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너희는 죄의 종이다! 왜냐하면 그 증거로써 너희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스스로의 확신과는 달리 주님은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라고 그들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5,36)라고. 주님은 지금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죄를 섬기는 죄의 종인데,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그때에야 너희는 비로소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유대인들의 대화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진리는 <첫째, 우리 인간은 누군가 한 명 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만약 내가 진실로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는지를 내 자신이 깨닫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된 주인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만약 죄라는 악하고 거짓된 주인을 섬기고 있음을 진리의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악한 주인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악한 주인을 섬기는 마지막 종착역이 무엇인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 (v.23a)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v.23b)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종착역은 오직 두곳이라고 밝힙니다. 죄를 주인으로 섬길 때 ‘사망’이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때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삯이지만, 영생은 선물이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23절>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것은 사도가 ‘사망’과 ‘영생’을 어떤 결과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먼저 ‘사망’의 경우는 ‘죄의 삯’이라고 저의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죄의 삯”은 영어로는 “the wages of sin” (KJV)이라고 표현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영어의 ‘wages’는, 이 단어의 의미가 ‘일한 대가로 받는 품삯’이나 ‘임금/급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것은, ‘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때, 그 죄라는 행위가 불러오게 되는 대가요, 품삯이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죄가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물이 사망이다’라는 뜻입니다. 죄는 필연적으로 사망이라는 흉칙하고 저주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뿌린 데로 거둔다’는 속담을 하곤 하지만, 앞서도 함께 나누었듯이, 죄 (사단 마귀)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종으로 살아갈 때,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죽음/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의 경우는 어떨까요? 먼저 오늘 <23절>을 얼핏보면, 문장의 앞절과 뒷절이 서로 대구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그런데, 이 말씀의 문장을 자세히 확인해보면, 방금 살펴본 데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것이요, 우리 인간이 죄를 지은 대가와 그 결과물이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을 때는, 그 논리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망>은 죄의 결과물이요, 죄의 품삯이자 임금이지만, <영생>은 우리 행위의 결과물이나 품삯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 (=선물)’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의 결론입니다.
이런 ‘사망과 영생’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결과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의 하나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사망/죽음은 우리가 저지른 죄의 결과물>이지만, <영생은 우리가 행한 그 어떤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의 그 어떤 노력이나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사’ (the gift of God)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선물’ (gift)이라는 표현에서 이해하시겠지만, 선물은 본질적으로 ‘그 어떤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은 어떤 나의 노력이나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주는 사람의 선한 마음으로 그냥 선사해 주는 것이기에 받는 자가 언제나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4장>에서 ‘다윗의 글’ 곧 ‘다윗의 <시편 32편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가 영생을 받은 것은 ‘일한 대가가 아닌 선물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사도는 시편의 글 “불법이 사함을 받고 ~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 4:7,8)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먼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6)라고 설명하면서, 다윗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행위가 가리워지고 용서함 받아 의롭다고 불리어진 사실을 영으로 깨닫음으로 말미암아 그 받은 은혜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망은 우리가 저지른 죄의 결과이지만,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과 구원을 내 의로운 행위의 결과라고 여기거나, 나의 종교적 열심의 대가라고 만약 생각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바리새인’식 착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우리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속하여 죄라는 주인을 섬기며 죽음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가로 (핏값으로) 지불하셔서 죄 용서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값없이 그 아들 안에서 영생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축복된 존재양식인 것입니다.
셋째, “그럼으로 의의 종이 되자”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진정한 영광과 은혜는 무엇인가를 함께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가끔씩 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애완견 훈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즐겨보는 이유는, 물론 강아지들이 귀엽기도 하고, 문제 있는 개들을 신통하리 만치 잘 훈련시키는 전문가의 처방도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개들의 대부분의 문제는 주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인이 어떻게 그 개를 훈련하고 키우느냐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저를 많이 공감케 하고,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대부분 적용됨을 저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는 어릴 적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라났습니다. 그것은 좋은 영향력이든, 혹은 나쁜 영향력이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시간 성도 여러분에게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은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받아온 부모님과 형제와 가까웠던 그 누군가로부터의 영향격이 선하고 아름답게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감사하시고 더욱 그 복된 유산을 승화시켜 나가시길 응원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안타깝게도 자라오면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되었다면, 그것이 여전히 여러분의 삶의 깊은 쓴 뿌리가 되어 여러분의 복된 삶을 방해한다면,’ 이제 이스라엘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서, 요단강에 바닥에 12돌을 쌓고 그 돌들을 강한 물살에 흘려 보냈던 ‘길갈의 순간’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과감하게 그 쓴 뿌리를 과거와 함께 흘려 버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 곧 ‘과거의 아픔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흘려 버리는 결단’이 중요한 것은, 악한 영 사단 마귀는 우리의 연약한 육체, 바로 ‘죄가 거하는 육신’을 통해 온갖 우리의 정욕과 욕심과 자랑을 부추길 뿐 아니라, 이런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악용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되고, 굳건하게 일어서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빛을 발하고 약한 영과 싸워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끝없는 자기연민과 지친 영혼의 무기력한 상태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영적 무기력과 자기 상처로 인해 주저앉아 있는 성도들을 향해 일어설 것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2,13)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바로의 손에서 건져 내시면서, 이렇게 분명히 바로왕에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출. 5:1) 하나님은 바로왕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Let my people go!)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민족은 자신의 택한 백성이요, 세상 가운데서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구별한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바로에게 그들을 가게 할 것을 명령하셨고, 거부하는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으로 치셔서 마침내 자유케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세상 가운데, 바로라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는 우리를 건져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땅, 애굽에서 건져 내셔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가게 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영광스런 신분으로 변하여 살아가게 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런 영광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동안 ‘6장’에서 사도가 지칠 줄 모르고 강조해온 ‘너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요, ‘너희 몸을 의의 종으로 주인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의 종’ 곧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종과 본질적으로 다른 천국의 자녀된 자들만이 깨닫고, 적용할 수 있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의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부활정’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5~57)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누리십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누렸다면, 여러분은 이 영광된 신분의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자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존재’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아들과 딸’로 살아가기를 온전히 힘쓰고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뜻이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의의 종>으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왜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 무서위서가 아니라, 점점 더 성령을 통해 성숙된 그분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요, 나의 선하신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의의 종이 되어 그분이 허락하신 생명의 거룩한 열매를 풍성히 맺히길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v.23) ‘영생’은 단순히 <양적으로 영원한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영생’은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은혜가 왕노릇하는 이런 <질적으로 완전하고 생명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답게 그분의 의의 종이 되어, 날마다 그의 영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유함을 누리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며, 허락하신 거룩함의 열매를 날마다 충만히 거두는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그 속에서 생수가 날마다 솟아나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성령충만의 은혜와 열매를 풍성히 맺는 복된 주의 자녀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