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만족” (True Contentment)
“참된 만족”
(True Contentment)
10-5-25
본문말씀: 시편 (Psalms)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You make known to me the path of life; you will fill me with joy in your presence, with eternal pleasures at your right hand)
[설교 요약]
우리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이래 ‘기쁨과 만족’함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일평생 누렸던 충만한 기쁨과 만족의 근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16편>은 ‘다윗의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믹담’은 ‘(돌에) 새기다’ 혹은 ‘황금’이라는 뜻으로써, <돌에 새기듯이, 혹은 불로 연단한 황금처럼 중요한 다윗의 시편말씀>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정확히 다윗이 몇 살 즈음에, 어떤 상황에서 쓰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성경학들은 그가 매우 큰 고난과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지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인생의 역설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삶의 충만한 기쁨으로 만족에 겨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이와 같은 기쁨과 만족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다윗이 누린 복된 삶의 근거를 오늘본문 앞의 <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으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v. 8)라고. 여기서 ‘여호와를 모신다’ (I have set the Lord)는 의미는 ‘여호와께 내 자신을 확증하고 고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매일 자신을 주님 앞에서 결단함’입니다: 청년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결심했던 이런 “뜻을 정하는” 삶이 곧 다윗이 “하나님을 그의 앞에 모시는” 삶입니다. 이것은 가끔 생각나면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을 뜰때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삶 (시. 5:3)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행하신 은혜와 기이한 일을 날마다 기억하고, 그 뜻을 따라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 (시. 78:72)으로 행함으로 그분의 동행하시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시. 23:4).
이제 오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진정한 성도의 삶은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인가?” 입니다. 먼저, ‘크리스챤 희락주의’ (Christian Hedonism)을 주창한 ‘존 파이퍼’목사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그분은 가장 영광 받으신다’ (God is most glorified when His people are most satisfied in Him)라고. 다윗이 일평생 누렸던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은혜요, 동시에 그 풍성한 만족의 삶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순종의 마음을 확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삶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만약 누군가가 ‘당신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왜 크리스챤이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라고 대답하신다면, 먼저 훌륭한 대답이라고 저는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한가지를 다시 추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여러분 마음데로 죄악된 육신의 삶을 살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한 삶’은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삶’입니다. 천국만이 아니라, 지옥도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단지 문제는 영원히 고통가운데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영원한 고통과 저주의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과 묵상하고자 하는 핵심은 ‘기쁨의 삶’이요, ‘만족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과 만족 가운데 영원히 살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주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계. 21:4) 기쁨과 소망과 만족함 가운데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16편>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이 평생토록 누렸던 영적 만족과 승리의 비밀을 그 어느 말씀보다 더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바라기는 이 다윗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성도 여러분의 것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시편 16편>은 “다윗의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다윗의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은 말씀은 오늘 본문의 <시편 16편>과 <시편> ‘56편에서 60’편까지 다섯편과 함께 총 6편의 믹담이 있습니다. 이 ‘믹담’이란 의미는 ‘돌에 새기다’ 혹은 ‘황금’이란 뜻이 있는데, 이처럼 <‘돌에 새기듯이’ 그리고 ‘불로 연단한 황금처럼’ 매우 가치롭고 중요한 시편>이 ‘다윗의 믹담이라는 시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이 쓰여지게 된 배경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다윗이 지금 깊은 위기와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이 시편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 16장>에서 오늘 본문이 포함된 <8~11절>말씀이 특별히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유명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탁월하게 예언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에 보면 잘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40일동안 보이시고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고 명하셨고, 제자들은 함께 모여 그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되어 아버지의 약속이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충만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로 오순절날 주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불의 혀같이 강력한 성령강림’의 역사가 제자들 위에 임한 것입니다 (행. 2:1~4).
이때 성령충만 받은 제자들이 각기 방언을 말했을 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이들이 대낮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 술을 마셨다’하고 수군거렸을 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고 말입니다. 바로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가 ‘요엘’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이렇게 ‘약속의 성취’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놀라운 선언을 하고나서, ‘왜 이렇게 성령충만의 역사가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사도는 계속해서 영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용서함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v. 22~24).
그러면서 두번째 인용하는 구약의 말씀이 오늘 <시편 16쳔>의 다윗의 시편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셨으니” (행. 2:25~28)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다윗의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 임이니이다” (시. 16:10)라는 고백을 통해 장래 그의 후손 가운데서 오실 메시아의 대속죽음과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v. 10)고 고백했을 때, 정말 자기의 육신이 죽지 않고, 썩지 않을 것을 믿었다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6)라고 <시편 23편>에서도 밝혔듯이 하나님께서 먼훗날 완성시켜 주실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말씀임과 동시에 어쩌면 다윗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성령충만을 통해 오실 메시아의 ‘대속죽음’과 부활을 영광스럽게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 (a man after my own heart)라고 영예스럽게 불러 주신 다윗의 기쁨과 만족의 삶을 묵상하며, 다윗의 영적 축복과 승리의 비결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무엘상>기록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싸워 이기고 일약 이스라엘왕국의 떠오르는 별이 되어 사울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울왕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윗이 ‘너무도 용맹했고, 사울왕과 백성들을 위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해 충성함’으로써 적들과 용맹하게 싸워 크게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여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을 때, 여인들은 이렇게 다윗을 위해 노래를 지어 그를 환영했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라고 말입니다. 이 노래소리를 듣고 사울왕은 갑자기 다윗에 대한 마음에 시기가 싹트게 되고, 점점 그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자기왕권을 도전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울왕은 급기야 그를 죽이고자 온 이스라엘을 쥐잡듯이 찾았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다윗의 파란만장한 역경의 삶은 실로 고통스럽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요셉>의 삶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고난과 역경’은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깨닫느냐에 따라서 실로 놀라운 ‘인생역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뜻을 깨닫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놀랄만한 <인생역전의 명수>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기막힌 ‘반전’의 삶을 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의 삶인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특별히 다윗이 자신을 죽이고자 집요하게 쫓아오는 사울왕을 피해 도피하며 살았던 10여년의 극심한 고난의 시간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의 아들로 빗으시는 축복된 훈련 (연단)의 시간>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그의 수많은 주옥 같은 시편말씀 가운데서 그가 이런 고난의 풀무불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지은 시가 상당수 그 속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크게 놀라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삶의 골짜기가 깊을수록, 그리고 산봉우리가 높고 험난할수록 그를 신실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는 더욱 깊고 보호하시는 능력은 더욱 강하기에 다윗의 시편 고백은 실로 감동적이고 깊은 영혼의 울림이 되어 하나님을 향한 만족과 감사로 빛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무엇보다도 다윗이 누렸던 그 영적 안정감과 승리의 비밀을 오늘 본문 앞의 <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으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v. 8)라고 다윗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영어버젼 <KJV>에서는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을 확정 (고정)하다’라고 영어로 표현할 때 <set a time>이라고 말하는데, 이처럼 “I have set the Lord”라고 했을 때 ‘나를 하나님께 고정하고 확정시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라는 뜻은 <나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앞에서) 고정시켰습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다윗의 마음상태, 즉 ‘삶의 자세’가 그의 인생을 그토록 탁월하고 복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 (a man after my own heart)라는 칭찬을 듣게 한 열쇠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아침에 시계 ‘알람’을 고정시켜 놓고 매일 그 시간에 일어나듯이 <매일 자신을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단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 떠 오르는 한사람이 있는데 그는 ‘청년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어린시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 했을 당시 용모가 뛰어나고 학문을 겸비하여 왕을 모실만한 소년의 한명으로 발탁되어, 바벨론의 최고학문을 익히고 왕이 제공하는 귀한 음식과 포도주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정하신 음식의 규정을 어김으로써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이 <다니엘서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정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단. 1:8~9)고 말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뜻을 정하고 환관장에게 채식과 물만 먹게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윤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 (purposed in his heart/ resolved)는 말이 <8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시다’는 말고 일치하는 뜻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와 같이 뜻을 정하여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시고, 그분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고정시키고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신년초에 한번, 혹은 계절이 바뀔 때 생각나면 한번 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인격적으로 결단하면서 하루하루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새벽마다,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며 자기 인생의 주인되신 여호와께 그분을 향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고 뜻을 정하여 찬양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어린 소년시절 아버지의 양떼를 치며 인생을 첫 출발하던 그때부터, 청년시절 용맹한 군인으로써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릴 때도, 그리고 장년 이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어도 변함없이 이른 아침 팔레스타인의 펼쳐진 지평선과 이슬 맺힌 초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이렇게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했으리라 저는 상상해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고 말입니다.
이렇게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둘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함>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와 기이한 일을 감사하고 노래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속한 <시편 16편>에서만 해도,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고 그분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v. 5~7)라고.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말씀읽기와 기도’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복음 17장>에서 ‘어떻게 우리는 믿음을 더 할 것인지? 에 대해 살펴보며, 믿음의 주인되신 예수님께 간구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도로 더 깊은 영의 충만한 세계를 경험해야’한다고 우리는 함께 말씀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기도의 중요성을 주님은 이렇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고 말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성도의 영적 삶에 ‘비옥한 땅’과 ‘풍성한 물’과 같아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성장시키고 교정해나가며 기도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때 다윗이 하나님을 그의 앞에 모셨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 있는 신앙의 기쁨과 은혜를 누려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결론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진정한 성도의 삶은 충만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일까요?” 그것은 ‘왜 다윗이 하나님을 그의 앞에 모시고 살았는지?’를 역으로 생각해볼 때 필연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왜 다윗은 하나님을 그의 앞에 모시고 살고자 결심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를 원수의 공격에서 막아 주시고,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언제나 건져 주시는 선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시. 40편)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죄와 허물을 숨기지 않고 주께 자복했을 때, 그 많은 허물에 사하심을 받고 그 죄가 가리어 지는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 (시. 32편)을 다윗은 넘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왜 다윗이 그토록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를 이렇게 밝히는 이유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6-8)라고. 여기서 ‘불법을 사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죄를 가리우셨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린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기에 그의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우리는 말로 다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누렸던 그리고 오늘날도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누리는 최종(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점에 대해서 ‘크리스챤 희락주의’ (Christian Hedonism)을 처음으로 주창했던 ‘존 파이프’목사는 <영혼의 마지막 잔치/ The soul’s final feast>라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마지막 갈망과 소망이 무엇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 깊이 회개하는 갈망에 응답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셔서 죄의 짐을 들어 올려 주시고 우리 마음을 기쁨과 감사로 채워 주십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라고. 하지만 결국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어떤 좋은 선물도 갈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그 자체를 갈망합니다. 그분을 보고 알고 그분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영혼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그 이상은 더 추구할 것이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즐거움, 기쁨, 환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이 경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갈구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는 것입니다> (* Christian Hedonism: ‘God is most glorified when His people are most satisfied in Him’)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평화와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까? 다윗은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확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삶의 순간마다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아버지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요, 동시에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누렸던 참된 안식과 만족의 비밀임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아침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성도 여러분의 마음을 확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안식과 만족을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