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9, 2024

“노예된 인간” (A Slaved Person)

Preacher:
Passage: 사도행전 (Acts) 16:16~18
Service Type:

“노예된 인간”

(A Slaved Person)

5-19-24

본문말씀: 사도행전 (Acts) 16:16~18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18 이와 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설교 요약]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믿음의 여인 ‘루디아’를 지난시간 살펴보았고, 오늘 ‘귀신들린 여종’에 대해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저자 누가는 그녀를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a slave girl who had a spirit by which she predicted the future)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바울일행을 보자 몇 날을 좇아 다니며, 소리질러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은 귀신 곧 ‘악한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나올 것을 명했을 때, 그는 즉시 쫓겨나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그녀를 사로잡았던 악한 영이 물러나고, 여종은 자유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 ‘귀신들렸던 여종’의 상태와 같이 우리를 압제하고 얽매게 하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노예처럼 얽매는 것인가요?

첫째, “”가 우리를 얽어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만이 자유함을 주실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죄사함 받지 못한 자’는 여전히 ‘죄의 종’ (요. 8:34)인 것입니다.

둘째, “육신의 정욕”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여기서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가 명심할 한가지 사실은 ‘구원받았어도, 죄를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첫번째로 말한, ‘죄’>는 ‘원죄’ (original sin)로서 예수 믿어 사함 받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되고 우리를 얽어맵니다. 그럼으로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습관”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나쁜 습관, 곧 ‘<잘 씻지 않는/게으른/늘 부정적인 말하는/낭비하는/미루는/의심하는/정리정돈 하지 않는 등의 수많은 습관>이 우리를 얽어 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신의 정욕과 싸워 나가고, 지혜롭게 나쁜 습관의 횡포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믿음의 여인’ 루디아를 통해 은혜 받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것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는 영적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루디아의 믿음을 통하여 복음에 대한 열린 마음도 그녀 자신이 결정하기 전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셔야 가능할 수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인격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시지만,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은 주의 영,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또 한 명의 여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자 누가는 그녀를 소개하며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a slave girl who had a spirit by which she predicted the future)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 소녀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죄와 육신과 거짓 영들에 사로잡힌 자는 과연 누구인지를 분별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 하게 하는 자라” (v. 16) 그 빌립보 지방에 귀신들린 소녀 한명이 있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석가 ‘매튜헨리’는 그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녀는 신들린 자’로서 델포스 신전에서 아폴로 신의 신탁을 받아 전달한다고 자처하는 처녀였다. 그러한 무지와 우상숭배의 시대에는 악령이 사람들을 자기의 뜻에 따라 포로로 속박시켰다. 그러므로 만일 악령이 그들에게 신탁을 주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다면, 악령은 그들로부터 받아왔던 그러한 숭배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신들린 여종은 그동안 점을 쳐서 자기 주인에게 많은 금전적인 이익을 남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 일행이 그곳에 나타났을 때, 이들을 쫓아다니며 여러 날을 크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소리쳤습니까?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v. 17b)라고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도 바울은 심히 괴로와 했다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왜 바울은 괴로와 했던 것일까요? 얼핏 보기에는, 여종이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참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정하는데로, 바울과 일행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써 구원의 길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라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왜 이 여종으로 인해 그토록 심히 괴로와했던 것일까요?

거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여종이 말한 “지극히 높은 하나님” (the Most High God)이라고 의미의 그 지방 헬라어 원어는 “호 데오스 호 휴시스토스”로서 헬라인들에게 있어서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를 가르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지금 여종이 소리쳐 외치는 것은 바울과 일행들을 가르쳐서 성경에 기록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종이라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 로마’의 여러 신들을 대표하는 신 <제우스>의 종들이라고 소리쳐 외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황당한 주장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바울이 또한 괴로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만약 그녀에게서 귀신 즉 악한 영을 쫓아 냈을 때 닥칠 핍박과 위기상황’을 그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바울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을 걷게 한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행. 14:11)고 놀라와 하며 신으로 섬기고자 했던 자들이, 얼마후에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와서 선동했을 때 바울을 돌로 쳐 거반 죽게 하는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조용히 복음을 듣는 군중들이, 내일은 악한 자들의 선동에 따라 순식간에 잔인한 폭도로 돌변할 수 있음을 바울은 충분히 예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압제하고 있는 귀신 곧 악한 영 사단 마귀를 향해 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v.18b)고. 그때 귀신이 즉시 그녀에게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와 한끝에 그녀속에 있는 귀신을 좇아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근본이유는 ‘하나님의 영’과 ‘귀신으로 위장한 악한 영’은 본질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서로 원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언젠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업신여기면서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마. 12:24)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마. 12:25-26)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은 성령의 역사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도 성령과 마귀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대적하는 것이기에 여종 속에 있는 악한 영을 대적하여 쫓아내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영은 때로 위장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복음에 협조적이고, 서로 같은 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것은 사단의 교활한 술수임’을 사도는 영으로 분별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영을 꾸짖어 쫓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사도가 앞으로 벌어질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마귀를 쫓아낸 것은 ‘사단 마귀에 종이 되어 고통에 신음하는 이 소녀가 심히 불쌍하고 가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그녀에게서 마귀가 쫓겨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여종에게서 귀신이 쫓겨남으로, 그녀가 더 이상 점으로 돈을 벌어주지 못하게 되었음을 주인들이 파악하고는 그녀의 주인들은 분노에 차서 예상했던 것처럼,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상관들에게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v.20-21)고 고발했을 때, 상관들이 그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게 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 명했습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 우리를 노예처럼 얽매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노예처럼 가두고 구속하여, 자유하지 못하게 얽매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가 우리를 얽어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진정으로 복된 약속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주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따져 묻는 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심각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v.34,44)라고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서 선언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우리를 가두고 얽어 매는 그 중심에는 ‘죄’가 있다는 사실이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께서 주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그 아들이 주는 생명의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자는 결코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불신자로 살아가는 자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는 비참한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주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철학적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할찌라도, 불신자는 ‘죄의 종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거부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우리에게는 선한 율법’이 있다고 자부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구원받은 존재라고 착각하지만, 주님은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는 죄의 종’이요, 그럼으로 ‘너희의 아비는 사단 마귀’라고 준엄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믿음의 여인 ‘루디아’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직 귀를 기울여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는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구원받아 참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강력한 죄에 얽매인 종의 상태에서 벗어나 주께서 약속하신 <자유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육신의 정욕”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제가 요즘 우리 교회 청년들과 함께 <독서토론> 시간에 “존 오웬”의 <죄 죽이기/The Mortification of Sin>를 통해 많은 유익과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존 오웬은 이 책에서 주제가 되는 말씀으로써 <로마서 8:13>말씀을 잡았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오웬은 <죄 죽이기>의 분명한 원칙으로써, 만약 ‘내 속에 거하는 죄를 죽이기 원한다면, 반드시 신자라야만 한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신자’ (believer)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구원받은 신자에게만 죄 죽이기가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앞서도 이미 설명했듯이, 내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면, 나는 이미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죄 용서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죄에 대해 죽었고, 죄는 더 이상 나에 대해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죄 용서함 받지 못한 자, 곧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는 여전히 ‘죄 용서함’을 받지 못했기에 그 죄의 힘 아래 놓여 있음으로 해서 결코 ‘죄’라는 막강한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 죄의 힘 아래에서 신음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불신자)의 절망적인 외침인 것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3-24)고 말입니다. 저는 제 개인적으로 <로마서>가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가장 큰 역할의 하나는 “우리 거듭난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를 그 어떤 다른 성경말씀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로마서 6~8장>을 통해 우리 ‘성도와 죄와의 관계’를 잘 영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롬. 6장>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분과 함께 죄로부터 죽었다’고 말하고, <롬. 7장>에서는 ‘아담의 원죄를 가진 인간존재 (=불신자)는 죄의 막강한 힘을 벗어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롬. 8장>에서는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분의 영, 생명의 성령님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자유)’된 존재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 <죄 죽이기>에서 ‘만약 내가 거듭난 성도라면, 이제 내가 할 것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죄를 죽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성도라도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완전히 죄를 죽일 수는 없고, 이 죄 죽이기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짓게 하는 그 중심에는 바로 ‘육신의 정욕’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도전하고 나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요일. 2:15-16)라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가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을 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우리 속에 거하는 죄로 인해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으로 상징되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죄의 유혹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습관”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내가 예수 믿었다고, 죄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제 ‘죄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불가능한 죄의 막강한 힘과 맞서서 성령의 능력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우리 ‘거듭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날마다 깨어서 ‘육신의 정욕’을 성령으로 죽이고, 진리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생명의 성령을 통해 주님의 참 제자에게 약속하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습관’의 문제를 언급하고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여기서 ‘습관’이라고 범주는 ‘죄’와의 상관관계가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습관은 경우에 따라서 죄로 악화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죄라기 보다는 “좀 답답하고, 불편하고, 지혜롭지 못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나 행동 방식이 어떤 이유로 굳어져버려서 바꾸기 힘들게 된 상태>가 ‘습관’인데, 물론 이런 습관은 긍정적인 경우도 있고 부정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부정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각자의 습관은 수없이 많고 다양하겠지만, 그 중에서 <잘못된 습관>을 제가 ‘우리를 얽매는 심각한 문제’로 분명히 지적하는 것은 우리는 이런 잘못된 습관이 가져오는 문제를 지금도 매우 다양하게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 본다면, 어떤 사람은 <잘 씻지 않는 습관>, 다른 사람은 <게으른 습관>, <늘 부정적인 말하는 습관>, <낭비하는 습관>, <미루는 습관>, <의심하는 습관>, <정리정돈 하지 않는 습관>, <물건을 못버리는 습관>등 너무도 다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그 습관이 처음엔 무심코 사소하게 시작될찌라도, 나중엔 그 잘못된 습관이 나를 심각하게 옥죄고 얽어 매는 폭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제가 <습관의 문제>에서 성도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핵심은 ‘우리의 인생이 길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 청년들은 저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많겠지만, 큰 의미에서는 ‘대등소의’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의미없이 낭비하기에는 너무도 소중하고, 화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해 가면서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엡. 5:15)라고 도전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도는 이렇게 답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라고. 세월을, 곧 ‘주어진 시간’을 아끼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월을 아낄수 있는 지혜는 ‘술 취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가능하다고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행. 5:17-18). 그럼으로 ‘만약 내가 가진 습관 중에서 그 무엇이 잘못된 습관임을 내가 인정한다면, 이제 결단함으로써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 그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 습관을 극복하고, 나를 얽매는 그 습관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 16장>에서 두명의 여인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주를 영접함으로 자유케 된 여인 ‘루디아’, 그리고 ‘악한 영’에 사로잡혀 비참하게 살아가던 ‘귀신들린 여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행이 사도 바울의 도움으로 그 불쌍한 여종은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은, 우리는 더 구체적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어린 소녀를 압제하고 강하게 통제하듯이,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그 무엇은 없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주의 은혜로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죄가 거하는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겨 나가고, 지혜롭게 우리를 얽어 매는 잘못된 습관과 생각과 세상의 헛된 가치관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 모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