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구의 기도” (2) (Prayer of Supplication)
“간구의 기도” (2)
(Prayer of Supplication)
6-1-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11-13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설교 요약]
우리는 이제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마지막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핵심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한 기도응답을 받을수 있도록 기도할 것인가?’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되신다는 의미와 그분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만큼 우리 성도의 기도의 내용과 자세가 결정됨을 그동안 함께 나누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간구의 기도’에서 첫번째) ‘공급하심’ (provision)의 간구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용할 양식’ (daily bread)에 대해 주님은 아버지 구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v.11). 그리고 두번째) ‘용서하심’ (pardon)을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v.12). 여기서 ‘죄 용서’는 2가지가 있는데, 이 용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용서함 받아 구원받는 죄용서’ 곧 ‘법적 용서’ (judicial forgiveness)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녀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받는 죄용서’ 곧 ‘부모의 용서’ (parental forgiveness)라는 것까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12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a)라는 주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전제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시민’의 특성이요, ‘날마다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를 받아 자녀의 당연한 모습’임을 주님은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끊임없이 구하면서 자신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앞과 뒤가 다른 모순된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치 못함을 스스로 시인함이요 (요일. 4:20),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롬. 12:19)을 의심하는 불신의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임을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끝으로, ‘간구의 기도’에서 세번째) ‘지켜주심’ (protection)을 구하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v.13a)라고. 여기서 <13절>의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길’ 구하는 기도는 앞 절 <12절>의 ‘죄에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진실로 자신의 지은 죄와 허물을 용서함 받기를 구한다면, 또한 앞으로 닥칠 죄의 유혹에서 건져 주실 것을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v.13b)이라는 ‘송영’ (Doxology)으로 기도의 가르침을 끝내십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순간마다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쉼 없이 향기나는 기도를 올려드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이제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마지막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이 주님의 가르쳐 주시는 기도를 묵상하면 할수록 이 기도문이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기도의 모범답안’ 즉 ‘기도의 방법론’ 정도가 아니라,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근본적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그분의 뜻을 내 삶 가운데서 이루어 나갈 것인가가 우리 기도의 근본핵심이 됨을 이해할 수 있었음을 그동안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찬양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마태복음 6장>의 ‘9~10절’에 이어서, 또한 우리 각자의 필요를 따라 올려드리는 <간구의 기도>의 내용인 ‘11~13절’에 대해 지난 시간과 오늘 살펴봄으로 ‘주기도문’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몇번의 시간동안 ‘주기도문’을 살펴보았다고 해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와 같은 ‘기도의 세계’를 다 이해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주의 영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날마다 한걸음 더 향기나는 제사로 하나님 아버지께 복된 기도를 쉼 없이 올려드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간구의 기도’에 대한 첫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11절’말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v.11)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양식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내어놓고 간구해야 함’을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하신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아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번쨰 간구>로서, ‘현재’의 필요한 양식에 대한 <공급하심> (provision)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간구>는 ‘과거’에 행한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하심> (pardon)의 기도인데, ‘12절’이 그 내용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라고 주께서 ‘죄 용서’를 아버지께 구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시간 ‘왜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죄 용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간혹 어떤 성도들은 우리가 구원받으면 더 이상 죄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죄에 대한 인식임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저는 지난시간 우리 <구원받은 성도와 죄와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우리 크리스챤이 ‘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죄 용서’에 있어서 지난시간 <존 맥아더>목사가 정확하게 설명한 ‘2가지 죄 용서’를 인용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는 ‘두가지 죄에 대한 용서’가 있는데, 그 첫째는 <법적 용서> (judicial forgiveness)이고, 둘째는 <부모의 용서> (parental forgiveness)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가르쳐 주시는 <죄 용서>를 위한 간구의 기도는 첫번째 ‘법적 용서’가 아니라, 바로 두번째 ‘부모의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임을 우리는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하나님께 죄 용사함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첫번째 ‘법적 용서함’ 받는 것에 해당한다면,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적인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의 하늘 아버지 되심으로써 두번째 ‘부모의 용서함’을 받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남은 평생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이제 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구원에 대한 법적 죄 용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가 그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정직히 고함으로 더욱 더 ‘부모자식 간의 친밀한 관계로 깊어지기 위한 부모의 용서’를 위해 지속적으로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구원받은 성도’가 부모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죄 용서함’에 대하여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한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는 또한 <12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라고.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v.12)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가르침은 ‘마치 우리가 나에게 죄를 짓고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죄를 용서함 받는 전제조건’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점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 <14-15절>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12절>말씀을 해석해 주시듯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v.14-15)라고. 이 말씀에서 주님이 강조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지금 주께서 그분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만약 너희가 형제의 과실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도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우리의 행위를 용서의 전제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만약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위험하고 미성숙한 상태’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할 때, 나 또한 서로의 관계성에 있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목회자였던 ‘조지 허버트’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라고 형제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맞이하게 될 심각성을 날카롭게 도전한바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어 주시며, ‘이제 서로의 발을 씻어 줌이 옳도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요, ‘형제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발에 먼지가 묻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전신이 깨끗이 씻은 바 되었지만,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실수하고 죄를 범하게 된다’는 뜻임을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께서 ‘너희는 각자 자신의 발만 씻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발을 씻겨주라”고 명하시고 도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주님의 명하심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은 나만 죄 안 짓고 깨끗하게 살아가면 그만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용납함으로 서로를 섬기고 함께 세워 나가라’고 주님은 도전하고 격려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v.15)는 주님의 도전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는 너희들이 행한데로 너희에게 반응하신다’는 식의 말씀이 아니라,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자가 가지게 될 엄청난 위험요소와 불행한 삶을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내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할 때,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말이 아님을 우리는 겸손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의 말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라고 사도는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심판과 ‘친히 원수 갚으시겠다’ (롬.12:19)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는 믿음 없는 안타까운 자녀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간구의 기도’에서 마지막 세번째의 기도는 ‘미래’ (future)에 발생할 수 있는 ‘악한 유혹’에 대한 ‘지켜 주심’ (protection)입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첫번째 간구의 기도가 ‘현재’ (present)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공급하심’ (provision)이고, 두번째 간구는 ‘과거’ (past)의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하심’ (pardon)이고, 마지막인 세번째의 기도는 ‘미래’ (future)에 있을 ‘죄악된 유혹’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켜 주심’ (protection)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v.13)라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자신이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죄를 엄중히 꾸짖으셨을 때,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지은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이 <시편 51편>에서 그는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51:2,10)라고 자신의 죄를 정직히 고백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51:14)라고 미래에 있을 악한 유혹, 곧 ‘피 흘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 지켜 보호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제 되돌아봤을 때 밧세바와의 범죄를 통해 독사와 같은 죄의 날름거리는 혀와 악한 화살로 쏘아대는 사단의 공격에서 결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이런 우리 인간의 연약을 너무도 잘 알기에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며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고 우리 주님의 강하신 팔과 전능하신 능력이 그들을 강하게 세워주시고, 악한 자에게서 든든히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간구를 위한 마지막 ‘세번째 기도’는 ‘두번째 기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마치 <원인과 결과> 혹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의 관계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정직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과거의 나의 죄를 자복하고 용서함 받기를 구한다면, 당연히 앞으로 내 앞에 닥칠 죄의 유혹과 악한 영 사단의 공격에 대해 보호하여 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여 주시길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기를 기도해 놓고 선, 금방 되돌아서서는 앞으로 일어날 죄의 유혹과 악한 자의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고, 경계함과 대비함도 없다면, 그는 결국 형식적으로 기도는 했지만, 계속 ‘죄 짓겠다’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우리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지은 죄와 허물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고 죄를 미워함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이 악한 죄의 유혹에 또 다시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죄를 지으면 짓고, 안 지으면 말고!’라는식의 무책임하고 철없는 삶은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와 같이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핥아 먹고, 돼지가 더러운 진흙탕에 다시 뛰어 들듯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적어도 참되게 죄를 미워하고 참회하는 주의 자녀는 반복하기를 원치 않고 또 그렇게 노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철든 자녀요, 그분의 거룩을 좇아 행하기를 사모하는 자녀라면, 그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v.13)라고.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마무리하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분을 성경학자는 기도의 마지막 ‘송영’ (Doxology)으로써 복음서 기록여부에 관계없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마무리적 표현으로 은혜스럽게 마무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몇 주에 걸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살펴보았는데, 이것을 정리해보자면 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가 기도할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깨닫음이 우리의 모든 기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과 권세가 무궁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여러분을 사랑 하시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실만큼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어쩌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모든 기도의 내용과 태도는 결국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이해만큼 결정됨’을 저는 믿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버지의 선하심과 권세와 능력이 무궁하심을 깨닫으면 깨닫는 만큼,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찬양의 기도’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과 감격 가운데 올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하심에 오롯이 집중하는 자는 외식하는 자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으며, 조용히 골방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방인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신다고 생각하여 중언부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마음먹고 기도하고 서는 왠지 벽을 마주 대하여 기도한듯한 막막하거나, ‘정말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관심을 가지실까?’ 혹은 ‘내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며 주실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확신을 못 가지지는 않습니까? 만약 이것이 성도 여러분의 솔직한 기도에 대한 상태라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바로 바로 여러분이 인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문제일까요?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에서 약속하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나아가 그분을 경배하고, 나의 모든 간구와 사랑을 중심으로 올려 드리고, 아버지의 임재를 넘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고 말입니다. 우리를 그 아들을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한없이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된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기뻐 흠양 받으시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시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며, 악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심히 기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 좋으신 아버지께 만약 우리가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슨 말로 그분을 기분 좋게 할까? 무슨 행동으로 그분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인가? 보다도 그 선하신 아버지를 우리의 중심을 다해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경배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향한 그 진실한 경외함으로 경배의 기도를 올려 드리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의 영,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죄 용서와 악으로부터 보호함을 넘치게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남은 삶이 날마다 순간마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 감으로 쉼 없이 복된 기도를 올려 드리는 축복된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