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8, 2025

“천국의 보화” (Treasures In Heaven)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19-21
Service Type:

“천국의 보화”

(Treasures In Heaven)

6-8-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주님의 ‘보화’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5장>에서 ‘천국시민의 특성과 율법의 정신’은 무엇인지를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율법의 정신을 통해 삶에 적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주님의 가르치심으로써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은 ‘경건한 삶의 실천’을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이라는 세가지 주제로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마. 6장1절>에서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1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v.19-20)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도전하시는데, 그 이유는 이 땅의 보물은 언젠가 좀이 먹고 녹슬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과연 “천국에 보화를 쌓고 있는지? 아니면 땅에 보화를 쌓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저는 우리가 어디에 보화를 쌓는지 점검하는 기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 1:8)라고 그들을 향한 자신의 깊은 사랑을 고백한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천국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이 땅에서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은 ‘영적 나그네’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순간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맞이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을 바라보는 나그네'로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히. 11:8-10).

         셋째,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지”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뿐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최고의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입니다 (신. 6:4-5). 이것이 천국에 보화를 쌓는 핵심임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생명을 다해 사랑함으로 여러분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를 올려드려, 썩지 않고 변치 않는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복된 천국시민 되시길 기도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주님의 ‘보화’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을 마무리하고 <6장>을 시작하면서 각 장의 주제를 요약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5장>의 주제는 ‘천국시민의 특성은 무엇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통해 깨닫아야 할 <영적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요, <6장>은 ‘이런 천국시민이 율법의 영적 원리를 올바로 깨닫음으로 어떻게 삶에 적용할 것인지?’ 다시 말해 ‘어떻게 삶에 실천하며 살아갈 것인지? 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6장의 주제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간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v. 19-20)는 주님의 도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각자는 지금 보화를 하늘에 쌓고 있는지? 아니면 땅에 쌓고 있는지 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되길 기대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주님은 산상수훈 가운데 <6장>을 시작하시면서 ‘율법의 영적 원리’를 올바로 깨닫아 각자 적응하는 경건한 삶의 실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런 <경건한 삶의 실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동안 <6장>을 시작하면서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본문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6장1절~18절>까지가 그 당시 유대인들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적 이유로서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핵심적인 경건의 삶을 어떻게 올바로 실천할 것인가를 주께서 기르쳐 주셨고,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기도’에 대한 <주기도문>의 가르침까지를 마무리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속해서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여 삶에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오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v.19)라고. 그런데 그동안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감탄했던 사실의 하나는 ‘주님은 삶의 일상 속에 있는 소재를 통해 생명의 진리’를 놀랍고 권세 있게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먼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v.19)라고 도전하시면서 <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물입니까?’ 물론 우리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은 단순히 값비싼 귀금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있어서 보물처럼 값지고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이 그 사람에게 있어는 ‘보물’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보물은 어떤 사람에게는 값비싼 보석이나 큰 돈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지식’이나 ‘영예’ ‘건강’ 혹은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보물처럼 소중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가치 없고, 또 그 반대도 존재하는 것이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세상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께서 이 ‘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사실은 우리 각자가 어떤 것을 보물처럼 여기고 품에 안고 살아가든 관계없이 이것을 세상에 쌓아둘 때, 이는것은 쉽게 손상되고, 상실하게 된다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온 삶을 투자하고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주님의 도전인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이 모든 세상의 보화는 결국 좀과 동록이 먹고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좀’ (moth)과 ‘동록’ (rust)이 먹는다>는 원래의 의미는 <옛날 고대에서는 옷이나 금속이 사람들에게 보물처럼 귀중한 재산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옷을 갉아먹고 망가트리는 ‘좀’이라는 벌레나 금속을 녹슬게 하는 ‘동록’으로 인해 그 재산적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좀이나 동록’은 오늘날의 개념에서도 분명히 적용할 수 있음을 봅니다. 예를 들면,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 값비싼 땅을 샀는데 어느 날 그 땅 값이 폭락 했다든지, 또는 주식이나 청년들이 관심 많은 비트 코인에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투자했더니 하루 아침에 시세가 곤두박질쳐 떨어지게 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다든지, 안전하다고 믿고 재산을 예금한 은행이지만 금리가 떨어져 막대한 손해를 보고, 가장 안타까운 것은 평생 온몸이 부서져라 피땀 흘려 큰 재물은 모았는데 젊어서부터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정작 몸이 망가져 자신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시한선고’를 받아 인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눈물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판 ‘좀과 동록’으로 망가진 인생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럼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v.19)는 주님의 말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진리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보화를 보관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성도 여러분 중에 이전에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하는 설교를 들었던 분들이 있다면, 주님의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드리는 것에 대한 설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자라면서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의 재물을 하나님께 드려 천국에 보관 하십시요’라는 식의 설교를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오늘 말씀과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계속해서 우리는 살펴보겠지만, ‘돈’ 혹은 ‘재물’로 상징되는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유 (풍요)는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가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침투해 있고,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기에 <‘돈’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다>는 것이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임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돈’ (재물/물질)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또한 죄악의 유혹으로 우리를 빠트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v.13)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된 것에서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기를 하늘 아버지께 구하라고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로 만이 아니라 실제 그의 삶에서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설’, 곧 ‘합당한 물질관리와 바람직한 헌금하는 자세’는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성도의 마지막 적용 단계에서 중요한 점검요소임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오늘 본문 <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v.21)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은 결코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앞서 제가 언급했듯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보물’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돈이 그 보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요, ‘지식’이요, 혹은 ‘건강’이고, ‘쾌락’이고, 또는 ‘철학’이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자신의 신념이나 계획’이 자신의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간직하는 보화는 각자 천태만상 다를 수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좀과 동록이 먹고 헛되고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의 고백과 같이 이런 세상의 보화는 결국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과연 천국에 보화를 쌓고 있는가? 아니면 땅에 보화를 쌓고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여러분의 보화를 쌓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가 어디에 보화를 쌓는지 점검하는 기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지”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을 할 때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여러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까? 우리 청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사람은 운동이나 게임하는 시간이 엄청 재미있고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조용히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다양한 컨셉의 유투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며, 혹은 여행이나 악기연주, 요리하기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할 때면 살맛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는 청년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 모인 사람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취미와 삶의 열정과 심장을 뛰게 하는 자신만의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친 심신을 쉬게 하고, 삶의 열정을 회복케 하고 심장을 다시 뛰게 할 그 어떤 취미생활이나 할 일이 있다면, 그는 상당히 멋진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분의 제자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로서 과연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물어보아야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이 주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하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v.20)는 말씀에 대한 우리 자신에 대한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진정한 제자로써 열정과 심장이 뛰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저는 그와 같은 멋지고 본받고 싶은 제자의 구체적인 삶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샘플의 하나가 사도 바울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바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 1:8)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육신적으로 낳은 자녀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그들을 영적으로 낳았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단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라고 자신의 고백의 진실성을 맹세하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낳은 영적 자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다’는 것은 우리의 물질을 드리고 봉사나 섬김도 있겠지만, 그 보물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열정을 다해 온 마음으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뜨겁게 맡겨 주신 주의 양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 삶을 투자(드리는)하는 것’입니다. 현재 성도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허락하신 신앙공동체와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 우리의 마음은 열려 있으며,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사랑합니까?

         둘째, “내가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오늘 본문을 강해설교 하면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할 몇 가지 점을 언급하면서 <지금 세상의 돌아가는 일들과 ‘정치적 관심’에 대한 내 정직한 모습은 어떠한가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가’ 하는 점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로이드 목사가 도전하는 핵심은 우리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세상살이와 세상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도 아니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서도 안된다’는 뜻이 아님을 믿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도리어 우리 크리스챤이 주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존재임을 앞장 <5장>에서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 세상의 빛이라” (마. 5:13-14)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 목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관심 가질 뿐 아니라 내 감정과 가치관이 점점 더 개입되어 내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가 아니면 ‘가이사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 22:21)고 분명히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을 지혜롭게 분별하고 잘못 드려서는 안됨을 도전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정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중요한 <자기 정체성>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뿌리를 박고 마냥 체류자>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가야 할 본향을 바라보는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우리는 언제나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나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결국 살아가면서 맞부딪치게 될 수많은 결정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보게 되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앞서갔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그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수 있었던 것도’ ‘아브라함이 부르심에 순종한 것도’ ‘모세가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던 것도’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시련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들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뼈를 묻고 살아가는 체류자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영적으로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장).

더 나아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 중에서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을 설명하면서 이런 나그네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8-10)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영원히 뼈를 묻을 ‘체류자’입니까? 아니면 이 땅에 잠시 머물지만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거룩한 ‘나그네’입니까?

         셋째,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지”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성도 여러분과 ‘우리 자신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제가 이해하기에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또 최고의 것을 원하시는 (기대하는)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최고의 것을 원한다고 했을 때, 그 ‘최고’는 남들이 볼 때 모두가 대단하다고 인정하고, 가장 값어치 있고 뛰어난 그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중심을 그분께 드릴 수 있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이렇게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라고 말입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사랑을 원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고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이세상과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여러분 혼자만 짝사랑하기를 원치 않고 그 사람도 여러분을 그만큼 사랑하기를 원하듯이 말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사랑하는 그 대상에게서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과 저의 마음의 중심을, 진실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그 어떤 물질이나 봉사 이전에 우리의 중심과 사랑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울 왕에게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를 선언한 요지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라고 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주님도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다음주에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주님은 오늘 말씀에 이어서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v.24)라고 분명히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골자는 하나님과 세상 그 어떤 것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보화를 하늘에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에 쌓고 있습니까? 만약 하늘에 쌓고 있다고 믿으신다면, 어떻게 하늘에 쌓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갈 때에 여러분의 감정과 정서와 관심과 사랑까지도 사로잡고 유혹하는 이 땅의 수많은 보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화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좀이 먹고 동록이 쓸고 도둑이 뚫고 도적질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v.20)고. 바라기는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로서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를 올려드리고, 썩지 않고 변치 않는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