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 (Two Masters)
“두 주인”
(Two Masters)
6-15-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22~24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설교 요약]
오늘 주님의 말씀은 ‘내가 보화를 하늘에 쌓고 있는가 아니면 땅에 쌓고 있는가’는 결국 ‘내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는지?’에서 결정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눈과 온 몸’의 관계를 비유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 전체’를 상징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온몸이 어두운 것처럼, 마음이 어두우면 삶 전체가 어둡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v.24)고 결론적으로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 “돈 (재물)의 힘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보물’중에서 ‘재물’을 꼭 집어서 언급하십니다. 왜냐하면, 재물 곧 ‘돈’이 가진 막강한 힘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도 (눅. 18장), 구약의 ‘아간’이 하나님의 예물을 훔치고 (수.7장)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가 하나님을 속인 것 (행. 5장)도 재물의 강력한 힘 때문입니다.
♧ “돈을 다스려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을 향해 도전한바 있습니다. “Ear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Give all you can” (벌 수 있는 만큼 많이 벌어라, 모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모으라, 베풀 수 있는 만큼 많이 베풀라)”라고. 돈 자체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며,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한 죄입니다 (딤전. 6:10). 그럼으로 ‘돈’을 잘 다스려 나가고, 가난한 이웃과 선한 일을 위하여 올바른 도구로 사용할 때,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눅. 16:9; 딤후. 6:17-18).
♧ “너의 주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도전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v. 24)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두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참된 신앙생활을 표현하기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내 주인이 하나님이신가?>로 결정됩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선택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는 분명한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신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삶’은 ‘내 마음속 은밀한 생각과 동기가 드러나는 삶’이요 ‘경건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분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감으로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선한 일에 잘 사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주의 자녀들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부터 <마태복음 6장>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함께 살펴본 것처럼 <6장>의 전체 주제는 “어떻게 천국 시민된 우리 성도들은 경건한 삶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그 전반부가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이라는 핵심적인 경건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주님의 도전을 통해 경건한 삶의 최종적인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경건한 삶의 실천은 겉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은밀한 생각과 마음에서 결정되며, 하나님 앞에서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보물을 하늘 혹은 땅에 쌓게 되는 것은 우리의 드러나지 않은 생각과 마음에 지배되어진 결과라는 것을 영적으로 탁월하게 밝혀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내 보화를 하늘에 쌓고 있는가 아니면 땅에 쌓고 있는가는 결국 오늘 제목과 같이 ‘내가 한 주인을 섬기는지?’ 아니면 ‘두 주인을 섬기는지?’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만이 유일한 주인이십니까? 아니면, 세상과 하나님이라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십니까?
주석가 ‘매튜 헨리’는 <마. 6장>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간단히 요약했습니다. <6장의 전반부 ‘1~18절’이 외식하는 자들처럼 ‘사람의 칭찬(박수/영광)을 탐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경고라면, 후반부의 앞부분인 ‘19~24절’은 ‘세상의 부(재물)을 탐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경고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그런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v.20)는 주님의 말씀에서 지난 주에 함께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보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각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리해여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의 보물’은 우리 각자의 가치관과 성향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겐 값비싼 보석과 많은 재물이 보물이고, 또 어떤 사람에겐 ‘명예’가 또 다른 사람에겐 ‘건강’이 ‘쾌락’이 그리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각각 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 각자의 보물은 치처럼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보물, 곧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고,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자신의 보화’를 이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는 주님의 도전을 묵상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그 보물을 땅에 쌓아 둘 때, 그것은 결국 좀이 먹고 녹슬고 도둑이 훔쳐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처럼, 우리 각자의 보물은 무엇이며, 지금 우리는 그 보물을 어디에 쌓고 있는지를 묻으셨다가, 오늘 말씀에서 <눈과 온 몸>의 관계로 다시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v.22-23)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시점에서 <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눈은 마음의 창’ 혹은 ‘눈은 마음의 거울’이란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것은 ‘눈’이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뜻이며, ‘눈’이 온 몸에 있어서는 ‘마음’을 대표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도전하시는 영적인 교훈의 핵심은 <그 사람의 영적인 삶을 결정하는 중심에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이 어떠하냐가 그의 영적 삶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v.22)라는 주님의 말씀은 ‘네 마음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라는 뜻이요, ‘마음이 올바른 생각을 하면, 온 몸이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라고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적으로 <눈이 세상을 보는 시력을 담당>한다면, 영적으로 <마음이 어떻게 이 땅에서 올바르게 (믿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판단하는 영적 시력을 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마음상태가 어떠하냐가 그 삶의 삶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그 정도로 말씀을 마무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도전적으로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v.24) 이 말씀은 현재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느냐’ ‘너의 주인은 누구냐’라고 질문하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냐? 아니면 재물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오늘 주님의 도전적인 말씀을 묵상해 나가며 “무엇이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뜻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돈 (재물)의 힘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지난주 본문말씀 <19~21절>의 말씀에서 중심주제는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4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v.24)는 말씀을 통해 ‘보물’이 무엇인지를 더욱 구체화 (부각)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보물’을 <재물>이라고, 영어로는 <money/ wealth/ mammon>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펴본데로 ‘보물’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재물’ (돈)이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교묘한지에 대해서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영적으로 밝히시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기억을 하시겠지만, 한 부자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주님은 그 청년에게 십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했고, 그는 자신 있게 ‘그것을 어려서 부터 다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뉘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눅. 18:22) 여기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빠져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막.10:21)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청년을 진실로 사랑하셨고, 구원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인지? 어떻게 하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길인지? 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요, ‘그리고 나서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따깝게도 그 청년은 자기의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근심하며 주님으로부터 발을 돌렸고, 쓸쓸히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재물/돈’이 가진 막강한 힘이 아닐까요?
좀 더 구체적을 살펴보자면,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사례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구약에서 본다면,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한 이휴 광야길을 가는 동안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눠가지는 과정에서, 유다 지파에 속한 ‘아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을 몰래 훔쳐 땅에 감추었던 것입니다 (수. 7장). 결국 이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보면, 첫번째 초대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 곧 사랑과 성령의 충만을 넘치게 경험했던 예루살렘교회가 태동하고 나서 얼마가지 않아 또한 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해 놓고선, 그 재물에 욕심이 나서 그것을 드리지 않고 집에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가 알고 이렇게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4)라고. 이리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엎드러져 죽게 되는 비극적 최후를 마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구약의 <아간>이나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는 하나님을 모르고 신앙이 없는 불신자가 아니라,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따깝게도 그들의 마음에 재물에 대한 유혹이 찾아오게 되자, 결국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물질/재물/돈’이라는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맘몬’이라는 세상신의 유혹과 힘에 ‘나는 자신 있다’고 큰 소리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v.13)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재물이 가진 이 막강한 힘을 분별할 수 있고, 경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없이 재물을 추구하고 끌려 다니며 그 재물의 종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둘째, “돈을 다스려라”는 것입니다: 사실 ‘돈’ 자체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The use of money” (돈의 사용법)이라는 그의 설교 메시지에서 이렇게 우리 크리스챤들, 특별히 청년 크리스챤들을 향해 도전한바 있습니다. “Ear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Give all you can” (벌 수 있는 만큼 많이 벌어라, 모을 수(저축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모으라, 베풀 수 있는 만큼 많이 베풀라)”라고 말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죄도, 돈을 잘 저축하는 것이 더더욱 잘못도 아닙니다. 만약 그 번 돈을 의미 있게, 그리고 가치 있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주님께서 어떤 <옳지 않은 청지기>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나옵니다. 비유를 요약하면, ‘그 청지기는 그동안 부자인 주인의 소유를 많이 낭비했는데, 주인이 그것을 알고 그를 그 자리에서 파면하려 하자 그가 한가지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서 ‘기름 100말은 50말로, 그리고 밀 100석은 80석’으로 대폭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실직한 후에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집으로 자기를 영접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와 같은 청지기의 시도를 주님은 설명하시고 나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9)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재물 (돈)은 비록 불의하고 세속적인 탐욕의 도구로 전락되기 쉽지만, 도리어 그 돈을 투자하여 많은 영혼들을 살림으로서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너희들이 행한 선행의 증인이 되어 기쁨으로 너희를 맞이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도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이자, 청년 목회자였던 디모데를 향해 그의 첫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며 당부했던 내용인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딤후. 6:17~18)고 말입니다. 돈은 이 땅에 쌓아두면 썩고 냄새 나게 되지만, 필요를 따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비옥한 거름과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부자들에게 ‘돈은 악하니 돈 벌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높이지 말고 겸손히 하여 필요한 자들에게 후하게 나눠주고 선한 일을 많이 하게 하라’고 격려하고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돈이 삶의 목표가 아니요 주인이 아니라, 삶의 올바른 도구로써 다스려 나가고 필요한 종으로 지혜롭게 사용할 때, 돈은 이처럼 귀하게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돈이 삶의 도구입니까? 아니면 목표입니까?
셋째, “너의 주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의 제목을 ‘두 주인’이라고 잡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두 주인을 모시고 살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든 아니면 세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마지막 말씀 <24절>에서 주께서 도전하시는 결론입니다.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v. 24)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말씀을 뒤집어보면, 만약 내 자신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고 느낀다면, 나는 사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 곧 ‘세상을 상징하는 재물’이라는 ‘맘몬신’만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민족을 이끌었던 모세를 이어 하나님의 명하심을 좇아 가나안정복을 성공리에 이끈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용맹과 충성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이제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마지막 선언했던 그의 결단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과연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은 무엇인가?’하고 묵상해 봅니다. 우리 성도의 믿음의 핵심은 사실 그리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아들과 딸로 삼아 주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날마다 더 알아 나가고, 알아 나가는 만큼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경배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하심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좋으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요, 그 아버지는 우리 성도의 유일한 ‘참된 주인’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신다>는 뜻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거부할 또 다른 주인 (=우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교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말로만(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고선, 실제로는 은밀하게 ‘바알’과 ‘아세라’와 ‘몰렉’과 ‘금송아지’우산 신들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청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십니다.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v.24)라고 말입니다. ‘너희는 택하라 하나님을 택하든지, 아니면 은밀한 너의 우상을 택하든지 하나를 택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그 선하신 권능의 보혈로 구원하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생각과 우리를 날마다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 수많은 ‘우상들’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딸이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돈’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돈의 그 막강한 힘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분명히 ‘돈에 대한 사랑’을 경고하는 정확한 이유인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찔렀도다” (딤전. 6:10)고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 살아감으로 돈의 종으로 전락하는 비참한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축복된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돈을 선한 도구로 지혜롭게 잘 활용하여, 선한 일에 값지게 여러분의 재물을 투자함으로 주님 다시 만나는 날 ‘잘 했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고, 천국에서 여러분이 투자한 수많은 영혼들이 여러분을 맞으러 나오는 이런 복된 미래를 준비하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