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2, 2025

“염려하지 말라” (Do Not Worry)

Preacher:
Passage: 마태복음 (Matthew) 6:25~26
Service Type:

“염려하지 말라”

(Do Not Worry)

6-22-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6:25-26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설교 요약]

          이제 우리는 주님의 <6장> ‘결론’의 말씀을 나눌 시간입니다.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 6장>의 주제는 ‘천국시민이 어떻게 믿음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6장을 시작하면서 주님은 ‘전반부’ (1-18절)에서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핵심적 경건의 삶의 실천>을 가르쳐 주셨고, ‘후반부’ (19-34절)의 ‘첫번째 단락’ (19-24절)에서는 <재물에 대한 탐심을 경계할 것>을,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을 포함한 마지막 ‘두번째 단락’ (25-34)에서는 결론적으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어떻게 믿음을 실천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천국시민’된 성도가 믿음을 실천하는 중요한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 ‘염려’라는 소주제를 통해 우리를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도전적인 말씀과 같이 왜 우리는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염려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v.27) 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염려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백해무익인 것입니다.

둘째, “염려와 열심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노년에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임을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라고. 다윗은 평생토록 믿음을 통해 열심을 다해 살았지만, 결코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염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의 최우선적 미션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v.33)을 “염려하지 말라” (v.25,34)는 말씀 사이에서 명령하십니다. 그 만큼 ‘염려’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인 것입니다.

넷째,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6장을 마무리하며 결론적으 성도들에게 주시는 도전은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죄’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을 의심함으로 염려하느냐?’라고.

바라기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룀'으로써 (빌. 4:6)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증거하며, 평화와 승리를 누리는 천국시민의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오늘 주님은 우리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으로 실천해야 할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섬세한 돌보심과 지켜 주심을 오늘 말씀을 포함한 6장 후반부를 마무리하시며 매우 실제적이요 본질적으로 가르쳐 시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v.25)고 말입니다. 왜일까요? 왜 우리는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를 곤경에 처하게 내버려두는 아버지가 아니시요, 반대로 믿음으로 간구했을 때 그 필요를 따라 신실하게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크신 권능으로 그의 자녀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실 뿐 아니라, 무궁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그의 자녀들을 때를 따라 먹이시고 입히시고 장성하게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 여러분은 염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염려하며, 그 염려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이제 오늘 본문의 주님의 말씀을 포함한 후반부 마지막말씀은 <6장>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그동안 제가 몇 주에 걸쳐 말씀드렸듯이 <6장>의 주제는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잘 깨닫아 삶 가운데 올바르게 적용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먼저 ‘전반부’에서 ‘구제, 기도 및 금식’이라는 신앙생활의 핵심적 요소를 통해 경건생활의 실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후반부 앞부분인 <19-24절>에서 ‘돈/재물에 대한 탐심’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 마지막부분, 곧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한 <25~34절>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염려하지 말라”는 도전과 격려의 말씀을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솔직히 놀랐던 것 한가지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과 같이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전하고, 돈의 위력이 엄청나게 지배하는 자분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21세기의 우리 크리스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이전에, 1차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전의 고대사회에서 살아가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산업과 문화와 환경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달라졌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속 생각과 가치관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기자의 깨닫음과 같이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전. 1:9)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저는 ‘첫 인간 아담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첫 인간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 열매를 따 먹고 범죄하고 나서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에서 잘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무서움을 느꼈고, 두려워 숨었던 것’ 입니다 (창. 3:10). 그 이전까지만 해도 아담의 삶은 그와 그의 아내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 곧 ‘행복의 동산’이라는 이름과 같이 행복하고 기쁨에 충만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와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나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범죄하고 나서는 이제 두려움과 염려가 몰려온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죄를 범했다는 ‘죄의식’과 그로 인해 ‘벌받을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였던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 속에 뿌리 깊게 내재해 있는 ‘죄의식’과 그로인한 ‘두려움과 염려’는 긴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런 죄의식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말입니다. 제 말씀은 여러분이 만약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그분의 보혈을 힘입어 죄 씻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을 그동안 억눌렀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의 힘으로부터 이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 필요가 없고, 죄의식과 불안과 염려라는 정신적이요 영적 질병에 고통받고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그를 믿는 제자들을 향해 선언하셨듯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6)는 뜻입니다. 지금 주께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 된 거듭난 성도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일깨워 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요, 아들이 주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과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신분은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다스려 나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지만, 신분이 바뀌었다고 삶이 자동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나라의 왕자와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여러분이 출생했다고 해서, 자동을 그 신분에 합당한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자라나면서 부모의 적절한 가르침과 본인의 노력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그 신분에 걸 맞는 존재로 성장해 나갈 때 여러분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죄를 이기고 영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적으로 주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 (sanctification)요, 바로 <6장>의 주제인 ‘성도의 경건생활의 실천’이 가능할 수 있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론적으로 주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도전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하지 않는 삶’이 천국시민의 최종적인 믿음의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주님은 왜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염려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천국시민’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성도들을 향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적 암>과 같이 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염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신분)을 누리게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자동으로 믿음이 자라나고 죄와 싸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생명의 말씀으로 자녀의 신분에 합당하게 자라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성숙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가 바로 ‘염려하지 않는 것’임을 주님은 말씀으로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염려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고 영적 성장과 열매 맺는 삶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리어 걸림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렇게 주님은 비유로 염려의 백해무익함을 질문하듯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v.27)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자기의 키를 ‘한자’ 곧 ’30.3cm’만큼의 키를 더 키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염려’가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며, 더 나아가 신앙과 반대되는 것인지를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설교자가 ‘염려’에 대한 흥미로운 통계 자료를 제시한 것에 대해 잠시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 통계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염려하는 이유>는 ‘40%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염려’, ‘30%가 [과거에 발생한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염려’, ‘12%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막연한 타인에 대한 부정적 생각]에 따른 염려’, ‘10%가 [건강에 대한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한 염려’, 그리고 ‘8%가 [실제적 문제에 직면]에 따른 염려’라는 것입니다. 이 통계에 의하면, 90% 가 넘는 경우가 비현실적이거나 의미 없는 염려를 하는 것이고, 극소수인 8%의 [실제적 문제에 직면]한 염려도 사실은 염려가 결코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신적 본성은 자연스럽게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생각을 몰아갈지라도, 우리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이런 백해무익한 염려에서 속히 벗어나도록 믿음으로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염려와 열심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적잖은 크리스챤 중에서도 성실과 열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활에 대한 염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마치 열심으로 알고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구약말씀을 보면, 다윗왕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성실한 삶을 이렇게 한마디로 감명 깊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 78:72)라고. 다윗은 청년시절부터 양들을 키우던 목자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시절을 거치며 이스라엘왕국의 전성기를 이룬 2대 왕이 되어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젊어서는 목숨을 걸고 어린 양들을 사나운 늑대와 사자의 공격에서 지켰고,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도 마음의 성실과 손의 공교함으로 백성들을 온 힘을 다해 섬김으로 다스려 나갔던 실로 이스라엘 역사 최고의 성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수많은 왕국의 일들을 처리하며 ‘노심초사’하고 ‘불안해고 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스스로 잘 묘사한 시가 그가 노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그 유명한 <시편 23편>입니다. 이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이처럼 다윗은 어린시절 목자시절 뿐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선한 목자와 어린 양>의 관계임을 기쁘고 행복하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가운데 수없이 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기 뿐만 아니라, 승리와 영광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 한가지는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선한 목자 되신다는 것입니다. 한결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둔 노년의 다윗왕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확신 가운데 고백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삶을 성실과 열심’으로 사는 것과 ‘삶에 대해 불안해 하고 염려하는 것’을 혼돈하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주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게으르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이 복된 삶을 마음의 성실과 손의 공교함을 다해 다윗과 같이, 청년 다니엘과 같이, 그리고 사도 바울과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과 같이 성실과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그 맡긴 달란트를 잘 투자하고 관리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염려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의 뿌리는 ‘믿음과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신과 인간적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염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께서 천국 시민이 된 성도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약속이자 동시에 지상명령을 한마디로 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6:33절>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v.33)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우리의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 최우선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곧 우리의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성도의 으뜸가는 미션이자 약속의 말씀을 “염려하지 말라”는 도전의 말씀을 2번씩 하시는 그 사이에서 하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염려’는 성도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최우선적인 사명에 순종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임을 주님은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도전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가 얼마나 심각한 영적 해악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점인 것입니다. 염려는 마치 ‘서서히 끓어오르는 냄비 안에서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염려와 근심>은 우리 성도의 영적 능력과 생명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일상적인 필요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와 불안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게 될 때, 우리의 관심과 열심은 모두 염려에 빼앗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장차 재림할 것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 재림때는 마치 노아 시대 때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8-39)라고 말입니다. 노아의 시대 때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죄가 심히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물로 모두 심판했던 그 사람들의 죄가 주님의 말씀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하는 그냥 일상적인 삶이 전부요, 별로 죄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노아시대 사람들의 진정한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그 당연시되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완전히 묻혀 ‘하나님을 상실’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찬송은 없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은 더 이상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주의 재림때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이라는 늪’에 빠져 생활의 염려와 걱정으로 하나님을 상실하게 되는 얼마나 무서운 결과인 것인지를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넷째,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해가면서 우리가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 주님의 핵심적인 말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성도들을 향한 단순한 제안이나 조언 (격려)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진실로 그의 제자들을 돌보시고 지키고자 하는 차원의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염려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없다’가 아니라 ‘반드시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점을 매튜헨리가 잘 설명했는데, 그는 주석하기를 “이생의 일들에 대하여 불안하고 괴로와하며, 믿지 못하는 <염려의 죄>만큼 우리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더욱 철저하고 진지하게 경고하신 죄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염려’는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비롯된 악한 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렇게 믿음이 적음으로 염려하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v.30~32)고 말입니다.

이제 정리해보자면,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도전하시는 순서를 보자면 먼저 오늘 말씀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v.25)는 말씀에서 만약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사소한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을 어찌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6절>말씀에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조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v.26)라고 질문하십니다. 영원한 진리의 선생답게 주님은 공중의 날라가는 새들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기르시는지, 그리고 이어지는 <28절>에는 들에 핀 백합화를 가르키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입히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공중의 새, 그리고 들판의 백합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여 가르치시고 도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왜 염려하느냐?’는 것이요, ‘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권능과 약속을 믿지 못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사도 바울은 주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 갇힌 몸이었지만, 기쁨과 영적 승리에 충만하여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빌립보서>입니다. 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주 안에서의 넘치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힌 몸이었지만, 감옥 밖에 있는 자유로운 성도들을 향해 도리어 거듭 거듭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고 촉구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토록 암담한 현실 가운데서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앞에 두고 ‘염려하지 않고, 자족하며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사람’, ‘감사의 사람’ ‘승리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을 알 수 있는 열쇠가 편지를 마무리하는 <4장>에 이렇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라고. 더 이상 육적인 염려에 장악되지 말고 믿음으로 물리치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뢸 때 하나님은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주의 제자들, 곧 천국시민의 승리의 비밀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 가운데 기도와 간구로 날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만족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영적 승리로 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평화와 만족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원하지는 않지만 불쑥 불쑥 염려하고 걱정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십니까?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v.25)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심으로 열심과 성실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되, 염려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 가는 복된 천국시민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간구한 이 모든 것을 더 하여 주시는 아버지의 권세와 은혜를 날마다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