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주실 것이요” (Ask And It Will Be Given You)
“구하라 주실 것이요”
(Ask And It Will Be Given You)
7-6-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7:7~8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he who seeks finds; and to him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설교 요약]
오늘 본문말씀처럼 분명하게 약속하시고,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을 도전하시는 주의 말씀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v.7)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7~12절>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소주제’의 말씀과 <7장>주제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주께서 이 시점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7장의 주제>와 같이 ‘비판하지 않음으로써 이웃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이 쉽지 않지만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구해야만 함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끈기있게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그 중심에는 ‘기도’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이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끈기 있고 포기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 (v.7)를 통해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기도응답하시는 3가지 방식>이 있는데, 1) ‘기도하면 바로 응답’하시는 경우, 2) ‘기도했지만, 잘못 구했기에 <않되>라고 응답’하시는 경우 (약.4:3), 그리고 3) ‘올바로 구했지만, <기다리라>고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이 세번째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야 합니다 (빌. 4:6).
셋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9-11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v.9-11)라고 반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을 의심하지 않고 그 사랑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간구하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바리기는 주의 때를 기다리는 기도제목이나, 여러가지 삶의 고통이 있을찌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 끝까지 구함으로 신실하신 그분의 응답을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의 경우에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아니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오늘 본문말씀처럼 분명하게 우리의 확신과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주의 약속과 은혜를 추구해 나갈 때 응답 받을 것임을 밝히신 주의 말씀도 없는 것같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v.7) 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약속 가운데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그분의 자녀에게 허락된 모든 특권과 은사의 복을 깨닫고, 온 힘을 다해 추구해 나감으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신 은혜를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7절>에서 시작하여 <12절>까지 이어지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소주제’의 주님의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매우 분명한 약속의 메시지이지만, 어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 본문의 말씀이 왜 여기서 등장하는지에 대해 헷갈려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먼저 저희가 잠깐 기억하기 원하는 것은 지난 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주께서 <7장>을 시작하셨는데,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v.6)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지난 주 설교를 마무리하며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6절>의 말씀이 ‘비판하지 말라’는 주제와 관련 없는 말씀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혀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7장의 <1~5절>까지가 ‘믿는 성도들 간의 관계에서의 비판과 판단의 문제’라면, <6절>은 ‘우리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 있어서 발생하는 비판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그 핵심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6절>이 앞의 <1-5절>과 아무 관계없는 내용을 주께서 불쑥 끄집어 내신 것으로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 <7~8절>에 대해서도 잘못된 이해(시각)을 가진 학자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7장>으로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시면서 아무 주제의 말씀이나 솟아 놓으신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시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v.7)라고 시작되는 오늘 말씀과 <7장>전체의 내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7장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 <7장의 주제>는 <’인간관계’로써, 곧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으로 <1~5절>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서로 비판하지 않고 서로를 용납하며 인내함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심내용>이라면, <6절>은 ‘믿지 않는 불신자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어떻게 영적 분별력을 통해 올바른 관계를 실천할 것인가’를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7~12절>까지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소주제의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주님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이 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오늘 본문 <7-8절>이 뜻하는 것은 ‘만약 우리가 나의 육신적인 판단과 죄악된 기질로 믿는 형제를 판단하지 않고, 또 믿지 않는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서로 논쟁하거나 서로를 헐뜯지 않고, 올바른 영적 판단을 통해 참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이 오늘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v.7)라는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올바른 이웃과의 사랑을 실천하기 원하지만, 내가 가진 육신의 한계와 지혜와 사랑이 부족함으로 인해 간절히 바라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못함을 깊이 통감한다면, 이제 ‘포기하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젖 동생 야고보의 권면의 말씀과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하면 주시리라” (약. 1:5)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겸손히, 그러나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우리의 부족한 지혜와 사랑을 채워 주시길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강력히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주님의 권면의 말씀에 담긴 본질적인 가르치심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의미일까요?” 그것은
첫째, “끈기있게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v.7)라는 말씀을 통해 주께서 도전하시고 격려하시는 중심에는 ‘우리 성도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를 말씀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어느 날 더러운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가 주의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 주기를 구했으나, 그들이 좇아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에 주께서 그들에게 오셨고 그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 주셨을 때, 그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주께 묻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8)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라고.
저는 이 한마디 주님의 말씀 가운데 ‘기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엄청나게 담아 내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기도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주의 제자로써 허락하신 권능과 영적 승리를 줄 수 없다’고 그의 제자들에게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아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약속하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칠 뿐 아니라 (막. 16:17-18), 성령충만한 권능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갈 충성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고 주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끈질기고도 열정적인 (적극적인) 기도에 힘쓸 것을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몇 번 기도해 놓고, 금방 응답이 없으면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하는 동기가 선하다면,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선한 목적이기에 결코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응답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끈기있게 포기하지 말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최근에 마음의 소원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속히 응답 없음으로 낙심하고 자포자기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끈기있게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저의 성격을 스스로 생각해 봤을 때, 그다지 급한 성격이라기 보다는 조금 느린 성격이고, 기다리기도 대체로 잘 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볼 때 ‘가장 쉽지 않고 실천하기 힘든 것을 꼽으라면, 저는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써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것’이 솔직히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 생각해볼 때, 요즘처럼 모든 것이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 컴퓨터의 처리 속도와 인터넷 화면의 진행속도가 어느 정도 빠른지가 곧 ‘그 제품의 질과 상품성 (가격)’을 결정할 만큼 세상은 신속한 반응과 결과물을 요구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특별히 크리스챤 청년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속에서 성장해 오면서 ‘빠르고 신속한 것이 좋은 것이요, 우수한 것이다’라고 은연중에 학습된 우리 청년들은 ‘이렇게 기다리며 주의 때를 기다린다’것 자체가 답답하고, 뭔가 융통성 없고, 구 시대적 습관 (가치관)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한가지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마지막 주의 재림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성도의 최종적인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그 어떤 능력이나 행위’보다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주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신랑을 기다리며 졸지 않고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말입니다 (마. 25장). 그렇다면, 여기서 ‘주의 때’가 무엇일까요? 이 때는 구체적으로 앞의 ‘기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때이며, 또한 폭포수 같은 은혜를 경험하는 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는 기도에서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인내’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번 말씀을 드린데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응답하시는 <3가지 유형>의 마지막 ‘3번째’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방법에는, 첫째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바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바라는 기도응답은 이 첫번째 경우일 것입니다. 한편, 두번째로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No’라고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들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섯 살 먹은 어린 아이가 갑자기 권총을 사 달라고 때를 쓰고 졸라댈찌라도, 정상적인 부모라면 결코 아이에게 위험한 권총을 사주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기도했지만, 바로 응답하시지 않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경우’입니다. 이런 기다리게 하시는 기도응답은 우리를 때로는 초조하고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제 자신의 경우를 되돌아볼 때 주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만큼 저를 신앙과 인격적으로 자라고 성숙하게 하는 시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이런 기다림의 응답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자세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써 사도 바울의 이 권면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코 미래에 있을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권능과 사랑으로 반드시 나를 지키시고, 선하게 응답하심을 신뢰하기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장차 우리 앞에 이루어질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감사함으로 우리의 간구할 기도의 제목을 기쁨으로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을 우리 성도들에게 도전하시고 나서, 이어지는 <9-11절>에서 이렇게 반문하심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v.9-11)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주님은 ‘왜 우리 성도 곧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확신 가운데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지?’를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약속하신 때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은 지극한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9-11절>말씀을 통하여 ‘세상의 악한 자들 조차도 그 자식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을진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선하신 아버지께서 그 구하는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진실로 믿고 신뢰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믿는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 믿음의 근거로서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32절>말씀을 꼽고 싶습니다. 바울은 이 <로마서>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심을 놀랍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롬. 8:32)라고. 이 말씀처럼 저에게 그 무한하신 사랑과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게 하는 말씀도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셔서, 그분의 아들과 딸로 삼기 위하여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독생자의 생명으로 값 주고 사신 그런 엄청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이렇게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하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늘 아버지께서 어찌 그 밖의 모든 것도 그의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주시기를 아까워하겠습니까?”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강력히 반문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생명을 내어 놓고 우리를 자녀 삼았다면, 어떻게 그 생명과 비교조차도 안되는 사소한 다른 어떤 것도 주시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매우 정교한 논리로 여러분과 저에게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선하심과 긍휼하심이 끝이 없으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시요, 우리를 향한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놀랍도록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3~25)라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명심하고 더 풍성히 깨닫아 나가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힘주어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간절히 이루워지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응답 받지 못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그로 인해 여러분을 낙심시키고 고통케 하는 삶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올바른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못함으로 힘들어하고 고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심을 믿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v.7-8)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아직까지 응답 받지 못하고, 주의 때를 기다리는 기도제목이나 엉켜버린 인간관계나 삶의 고통이 있을찌라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주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신실하신 응답과 약속하신 넘치는 은혜를 성령충만을 통해 풍성히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