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The Narrow Gate)
“좁은 문”
(The Narrow Gate)
7-13-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road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many enter through it.)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But small is the gate and narrow the road that leads to life, and only a few find it.)
[설교 요약]
이제 주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향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 (v.13-14)라고 말입니다.
주께서 <7장>을 “비판하지 말라” (v.1)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는데, 이제 오늘 <13절>말씀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천국시민의 삶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이제 ‘자 그렇다면 천국시민의 삶을 행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주님은 그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간결하게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일까요?”
첫째, ‘<영생을 추구하라>는 것’ 입니다: 주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도전하시는 의미는 ‘행위로 구원 받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도전의 의미는 ‘네가 만약 구원받았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 감으로 천국시민이 되었음을 증명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이것이 ‘영생을 추구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둘째, ‘<값싼 은혜는 없다>는 것’ 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본훼퍼’의 말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값싼 은혜/ cheap grace>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 costly grace>이기에 그에 합당한 ‘대가지불’의 ‘좁은 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셋째) <'세상종교'와 '하나님 종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절에서 주님은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v.15)고 경계하십니다.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실상은 세상종교가 추구하는 ‘자기 영광과 업적’이라는 신을 섬깁니다. 이들이 ‘넓은 문’으로 유혹하는 대표적인 거짓 선생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전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좁은 문’의 삶을 살아감으로, 참된 천국 시민이자 주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복된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에서 이제 결론의 국면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시민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마태복음 5장’의 가르치심을 시작하시고 나서, ‘6장과 7장’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 즉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말씀인 <7장 13-14절>에 이르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듣는 자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을 통해 큰 그림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정리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도 여러분 대부분 오늘 저의 설교를 듣기 이전에, 이미 주님의 오늘 본문말씀을 적어도 한두번은 읽거나 들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오늘 본문은 주의 말씀은 듣는 우리의 결단을 강력히 요구하시고 도전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오늘 주님의 이 가르침과 도전을 통해 평탄하고 손쉬운 넓은 길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과 비극을 깨닫고, 비록 좁고 협착할찌라도 그 길만이 영생과 구원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길임을 깨닫음으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 주와 함께 승리와 만족의 삶을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 그동안 여러 차례 오늘 주님의 본문말씀을 생각 (묵상)한 적이 있는데, 제가 늘 관심가지고 고민했던 점은 ‘구원이냐 멸망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라는 시각에서 이 본문을 대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주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v.13-14)는 도전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든 인간이 각자의 인생을 마감하고 주 앞에 섰을 때 맞이할 ‘최후의 심판’이요, ‘영원한 생명의 삶과 멸망 받을 심판의 삶’을 선택하라는 축구의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그것 못지 않게 놓치지 말아야 할 주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제가 성도 여러분과 주님의 산상수훈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계속해서 주의해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해서 <6장>을 거쳐 이제 <7장>에 이르러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어떻게 그 ‘주제’와 연관되어 있고, 또한 서로 앞뒤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놀라운 가르침은 이것 저것 생각나는데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서로 치밀한 논리적 연관성 속에 더욱 영적 발전을 거치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주님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마무리해 가시는 단계에서 이와 같은 앞뒤 문맥의 연관성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늘 주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시작하는 말씀은 어떤 도전의 말씀일까요?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 성도의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큰 그림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 곧 천국시민으로써의 특성을 스스로 이해하게 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올바로 적용함으로 합당한 그분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산상수훈을 시작하는 <마. 5장>에서부터 지난주 <7장12절>말씀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성도가 누릴 복된 삶의 모습’을 가르쳐 주시고 나서, 이제 오늘 말씀에서부터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이제까지 무엇이 천국시민의 참된 특성이요, 그 시민의 합당한 삶인지를 나로부터 분명히 배웠다면, 이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는 것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이제는 행동으로 그 진리를 삶으로 살아가라!’고 주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가르침을 듣고 감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한 주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임을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행동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그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간결하면서도 분명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인지?”에 대해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영생을 추구하라>는 것’ 입니다: 제가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많은 <우리 성도들이 영생을 추구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근거>의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로 오늘 본문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자들에게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넓은 문>을 택하든지, <좁은 문>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회색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임은 정확히 이 두가지 문이 어떤 문인지를 이렇게 영적으로 밝혀 주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v.13b-14)고 말입니다. 여기서 <넓은 문>은 ‘넓고 평탄하고 화려하며 매력적이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몰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은 결국 멸망과 심판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주님은 준엄하게 선언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좁은 문>은 말그대로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들이 적으나, 이 문은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선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도 제가 잠깐 언급했듯이 제가 평소에 오늘 말씀을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주의 말씀으로 이해했다고 했고, 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말씀만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분명한 선택을 행하라’고 도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행위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 (은혜)로 말미암음 입니까? 이것은 고민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고 분명히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세주 되심을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놀라운 축복과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은 그 어떤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 함임을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지금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좁은 문을 택하라’ 그럼으로 ‘넓은 문을 거부하라’는 이런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제가 방금 말씀드렸듯이, 구원이 생명이 천국시민 되는 것이 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하는 것임을 깨닫는 다면, ‘주께서 우리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주님의 도전은 결론적으로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것은 “만약 여러분 스스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세상의 넓고 화려한 넓은 문을 거부하고, 힘들찌라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선택했다면, 그리하여 지금 협착한 생명길을 가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해 이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을 점검해 볼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음을 도리어 즐거워하는 천국시민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의 마지막 도전과 같이 ‘내 자신은 주님의 가르침에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자인지, 아니면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인지’를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여러분 자신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여러분 자신이 ‘좁은 문을 택하여 협착한 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넓고 평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멸망의 넓은 문을 지나가는 불신자’인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구원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구원의 은혜를 통해 예수님을 믿어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실제로 되었느냐는 것을 이 ‘좁은 문’을 택하여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여러분은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 있는 연어는 세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죽은 연어는 단지 힘없이 흐르는 물살에도 떠내려 갈 수밖에 없듯이, 죽은 영혼은 결코 좁은 문을 택할 수 없고 협착한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 시류를 따라 힘없이 멸망을 향해 떠내려 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값싼 은혜는 없다>는 것’ 입니다: 이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주께서 <'넓은 문'은 멸망으로, 그러나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제가 먼저 복음서에 기록된 '우리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떻게 부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결코 세상 정치인이나 사이비 교주들처럼 '비현실적인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그분의 제자가 됨으로써 치뤄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좇음으로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 시작점에서부터 "그래 나만 믿으면 너희는 내 제자의 자격이 충분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고 세상의 유혹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자기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마. 10:38).
이 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런 지혜로운 조언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28~32절>에 보면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만약 누가 망대 (군사적으로나, 보안등의 이유로 적군이나 도둑이 침입하는 것을 감시하고자 높게 쌓아 올린 감시탑)를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그 비용이 얼마나 들지를 계산해 본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초만 쌓고 나중에 돈이 없어 다 짓지도 못하고 짓다가 중단하는 황당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을 치루고자 할 때도, 먼저 계산해 본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가진 1만명의 군사로써 상대방의 2만명의 군사를 상대해 이길 승산이 있는지를 냉철하게 따져 본다는 것입니다. 만약 승산이 없다면, 상대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먼저 보내 화친을 요청할 거라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자신에 속한 모든 군사들이 전멸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만약 너희가 진정 나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먼저 치뤄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계산하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의욕을 꺽기 위해, 뜨거운 믿음에 찬물을 끼얹고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그의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코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은 선한 목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런 강한 도전을 하시는 이유는 '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순교자, ‘본훼퍼’ 목사가 그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도전했듯이, 우리 주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 (cheap grace)가 아니라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값비싼 은혜' (costly grace)라는 것입니다. 본훼퍼 목사는 <’값싼 은혜’란 교회의 치리가 없는 침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찬식이요, 참회가 없는 죄 용서함이다>라고 ‘값싼 은혜’의 본질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값비싼 은혜'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시류에 따라 육신의 정욕과 욕망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닙니다. 이 '값비싼 은혜'는 '비록 우리가 값없이, 공로 없이 하나님의 그 값진 구원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았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인격적으로 결단함으로 삶을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오늘 도전하시는 '좁은 문'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값진 은혜를 값싸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셋째) <'세상종교'와 '하나님 종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주님은 오늘 본문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v.15)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장차 이 땅에 나타날 거짓선지자들에 대해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경계하시는 핵심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먼저 ‘선지자’ (prophet)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 뜻을 따라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이 거짓선지자는 ‘겉으로는 가장 경건하고 말씀에 충만한 듯 보이지만, 그 속은 <하나님>은 없고, <돈과 권력과 육신의 정욕>이 그의 신이 되어 탐욕의 노예가 된 자’인 것입니다. 겉은 양처럼 선량해 보이고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경건한 종들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속은 잔인하고 포악한 늑대 같이 죄와 정욕으로 가득 차 먹이감을 찾는 악인이라고 주님은 거짓선지자를 정확하게 묘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이런 비유를 통해 밝히시는 영적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선지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밖에도 존재하지만, 때로는 우리 속에서 날마다 우리를 유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지금까지 집중해서 드러내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과 위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형제를 미워함으로 마음으로 살인’하고, ‘이웃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음으로 간음’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이라는 성도의 복된 경건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나팔을 불고, 조용히 골방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과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영광과 사람의 박수’인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들의 본질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우리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거짓선지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옷이나 장신구’ 곧 ‘종교적 외관’은 매우 기독교와 흡사하지만, 실상 (내용)은 ‘세상종교’와 그 본질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이 아니요, ‘이 땅에서 누릴 인간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거짓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핵심은 ‘기독교와 세상종교의 차이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종교와 세상에 속한 종교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종교> 즉 ‘참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출발’하지만, <세상에 속한 종교>는 ‘인간의 행위와 업적에서 시작하고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거짓선지자들이 늘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마. 7:22)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음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v.23b) 그리고 “내게서 떠나가라” (v.23c)는 준엄한 심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불법을 행하는 악한 삶이기 때문이요, 좁은 문을 통하여 유일하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삶이 아니라, 넓은 문을 통해 세상의 수많은 자들과 동일하게 ‘육신과 악한 영’에 속한 세상의 신을 섬기는 헛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들어선 문은 크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넓은 문’입니까? 아니면 비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좁은 문’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함 받을 사람은 없고, 그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 안에서 선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온전한 구원을 완성시켜 나가시는 은혜가 넘쳐 나시길 소망합니다. 바로 여러분의 전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행해 나감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좁은 문’의 삶을 통과해 나감으로 참된 주님의 제자됨을, 그리고 영생의 자녀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삶으로 증명하는 복된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