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들” (False Prophets)
“거짓 선지자들”
(False Prophets)
7-20-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7:15~18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설교 요약]
지난 시간,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는 말씀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5장>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이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을 통해 결론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v.15)고 경계하십니다. 이 말씀은 천국시민된 성도가 좁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선 거짓선지자들을 주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주님은 강력하게 암시하십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이 거짓선지자들의 진정한 문제인지?”를 묵상해보겠습니다.
첫째, <그들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v.15)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들은 ‘양과 같이 온순하고 선량한 옷’을 입고 있기에 그 정체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이 성도들에게 끼치는 가장 큰 영적 해악의 하나는 ‘말씀을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거짓선지자들처럼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렘. 6:13-14)라고 거짓되게 예언합니다.
셋째, <그들의 열매가 다릅니다>: 주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v.16-18)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 각자는 말이 아니라 살아온 삶, 곧 그 삶의 열매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것인데, 거짓선지자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하고, 우리 자신 또한 ‘바리새인의 외식’을 경계하며 좋은 나무가 되어 풍성한 생명과 사랑의 열매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지난 시간, 주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으로 도전하셨음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단지 한가지의 도전의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5장>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이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을 통해 결론 (마무리)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께서 우리 성도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가운데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v.15) 다시 말해 “거짓선지자를 지극히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 (천국시민)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기 위해선 ‘거짓선지자들’의 헛된 교훈과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주님은 강력하게 암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의 가르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짓선지자들의 헛된 가르침을 분별하여 그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생명길을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먼저 지난 시간, 주께서 <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v.13-1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우리는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뜻인지?’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생을 추구하라’는 뜻임을 나누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좁은 문을 택한다는 나의 행위’를 통해 ‘영생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져 주신 구원의 은혜를 택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과연 구원받아 영생을 누리는 천국 백성임을 증명하라’고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좁은 문을 들어가라는 것은 ‘구원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요 값진 은혜임을 보여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값진 은혜를 소유한 자 답게 그에 합당한 ‘대가지불’을 하고 좁은 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좁은 문으로 가야 할 이유는 ‘세상종교와 하나님의 종교는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15절>에서 ‘거짓선지지들은 양의 옷을 입고 노략하는 자’라고 주님은 이들의 정체를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 그 속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세상종교>, 즉 <자기 업적과 자기 영광에 기초한 세상종교>와 그 뿌리를 같이하는 자들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주께서 선포하신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v.15)는 말씀을 통해 “무엇이 거짓선지자들의 진정한 문제인지?” ‘왜 좁은 문을 가기 위해 이들을 경계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주님의 도전에 말씀에 담긴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첫째, ‘거짓선지자들의 문제’는 <그들을 식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바로 오늘 <15절>말씀에서 주님은 거짓선지자들의 식별하기 힘듦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v.15)라고.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온순하고 착한 양 같아 보이는데, 그 속은 먹이감을 노리는 늑대와 같이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선지자들의 특성을 주님은 강하게 경계하시고 성도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거짓선지자들’의 위험성은 이들을 쉽게 식별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평상시 그들의 말과 행동, 삶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들은 영락없는 크리스챤이요, 매우 신실하고 유쾌하고 이해심이 넘치는 성숙된 크리스챤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믿음의 근거 (기초)’가 없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는 ‘양으로서의 어떤 특성도 없고, 오직 야수 본연의 사납고 잔인한 기질만이 도사리고 있는데, 안따깝게도 우리 인간은 그 사실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주께서 거짓선지자라고 지칭하시는 자들의 문제점은 매우 간교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의 분간하기 힘듦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한가지 영적 사실은 ‘이런 거짓선지자들 중에는 아주 사악한 이단종교 교주처럼 성도 대부분이 어렵지 않게 그 거짓 가르침과 영적 사악함을 파악할 수 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의 모습이 진지하고 도덕적이어서 우리 눈에 그 실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자들의 ‘모호성’ (식별의 어려움)은 놀랍게도 ‘자기 스스로가 그런 훌륭한 존재로 착각함’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흔히 심리학에서 볼 때 ‘나르시시스트’ (자기도취형 인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듯이, 이들은 정말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과대포장’하면서도 그것이 진짜 자기인 양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기만’ 곧 ‘자기가 자기 마음을 속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기만’ (자기착각)이 심각한 것은 그동안 주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누누히 경계하신 것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과 위선’은 제가 생각해 볼 때 그 절반은 의도적이지만 그 절반은 무의식 중에서 의도치 않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의도치 않게 드러난 위선도 결국 그 깊은 마음의 생각이 드러난 결과이기는 하지만요?! 어찌되었건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하기 힘든 그 이유의 중심에는, 주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바리새인의 외식’은 경우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볼 때 그가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진지하고 정직한 자로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교묘하게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에게 기만당하고 있고 심각하게 스스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 자신도 자신을 분명이 그렇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주님은 <‘거짓선지자’는 ‘교리적인 거짓 가르침’ 이요, 또한 ‘무의식적 자기기만’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가르쳐 주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점을 <로이드 존스>목사는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박사와 같이 잘 알려진 해석가는 ‘본문은 <이단들>을 탐색해 내는 시금석이 아니요, 위선자들 특히 <무의식적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은 둘 중 어느 한 해석만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요소를 함께 포함하지 않고는 본문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라고 주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들 대부분이 이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독교 이단 그룹들은 거기에 비하면 분별하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거짓선지자들의 정체에 대해 단지 ‘거짓말쟁이’ ‘영적 사기꾼’등과 같이 여러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들을 본질적으로 정의해보자면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고상한 철학과 지적능력을 소유한 자라 할찌라도,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v.21)는 말씀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v.23)는 말씀에서 선명하게 확인됩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우리 인간의 눈은 교묘하게 속이고 피할 수 있지만,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눈을 피하고 속일 수는 없기에 그는 마지막 심판 날 불법을 행한 악인으로써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거짓선지자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한번 ‘거짓선지자’에 대해 분명히 해 둘 점은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뿔 달린 마귀’나 ‘사납고 무서운 짐승’처럼 우리가 한눈에 식별가능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자신을 숨기고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짓 사도들’ 곧 ‘거짓선지자들’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4-15)라고.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들 거짓선지자들에게서 보이는 또 한가지 분명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왜곡’ (distortion)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이들도 많은 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언급하고 가르칩니다. 경우에 따라 이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을 뿐 아니라, 매우 철학적이고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자들은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 ‘누가 선지자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써 그분의 뜻을 사람들에게 바로 알려주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따라서 거짓선지자는 그가 사람들 눈에는 아무리 도덕적이고 철학적이고 훌륭한 인격자인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고, 왜곡해서 전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 한 예로써 구약성경에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 때에 이런 대표적인 거짓선지자들의 한명인 ‘선지자 하나냐’ (렘. 28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하심으로 유다 왕국의 환난과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대적하며 거짓되게 예언합니다. 그 당시 하나냐와 같은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했는데,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3-14)라고 성경은 그 당시의 거짓선지자들에 의해 강요된 거짓 평화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다닌다는 교인들도 천국과 지옥, 회개와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를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단지 무조건적인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인들은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듣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원하는 것에 맞추어 말씀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와 ‘회개와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 죽음’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최후심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거짓선지자들의 메세지는 매우 잘 다듬어지고 정교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말씀을 과시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죄에 대한 회개 그리고 최후심판과 같은 복음의 핵심은 아예 빠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바른 교리에 어긋나게 교묘하게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의 왜곡은 가장 심각한 거짓선지자들의 문제인 것은 이런 거짓된 복음이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얼마나 악한 영향을 끼칠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번째로 <열매가 다르다>는 것이 거짓선지자들의 최종적 문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거짓선지자들을 식별해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열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점을 이렇게 영적으로 잘 설명해 주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v.16-18)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법칙을 따라 ‘좋은 나무에서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그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를 내는 것이 지당한 것처럼, 영적 법칙에 따라 선한 자는 그 선한 열매를, 그리고 악한 자는 그 악한 열매를 반드시 맺을 수밖에 없다 라고 주님은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막. 7:15~16)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핵심은 결국 ‘우리 속에 있는 생각이요 마음상태’임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훼방과 어리석음’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의 참모습은 결국 자신의 생각과 마음상태를 따라서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주님은 밝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그의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바침으로 ‘구원의 열매’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열매’를 거두셨지만, 양의 가죽을 쓴 늑대인 거짓선지자들은 단지 탐욕과 무자비하게 양들을 잡아먹음으로써 ‘파괴와 죽음의 열매’만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열매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열매’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쉽고, 한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사실 그 사람의 열매로 판단한다는 것도 우리의 연약한 눈과 부족한 영적 분별력으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열매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오직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만 온전히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한가지 나누고 싶은 것은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거짓 선지자들은 ‘기독교 안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는 자들처럼 선지자 노릇하면서, 악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앞에서 이런 거짓선지자들의 본질에는 ‘무의식적 위선’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의 제자들을 경계하신 바 있습니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6)라고. 어쩌면 우리는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위선자들의 외식과 부정직과 교만의 헛된 교훈을 본받고, 우리 자신을 과장하고 누룩처럼 부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웃의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고 더욱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겠지만, 우리 각자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v.18)는 주님의 말씀을 본받아 정직하고 진실하게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되기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누가 ‘거짓선지자들’일까요? 이 시간 우리는 말씀을 마무리하며, 먼저 누군가를 판단하고 지적하기 전에, 우리 주위에 있는 이와 같은 ‘거짓선생’ ‘거짓 크리스챤’을 분별하고 지혜롭게 이들을 물리치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 또한 주께서 경고하신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위선과 교만과 거짓된 자기포장’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깨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날마다 주의 성실한 제자 곧 ‘좋은 나무’가 되어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