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인가 모래인가” (The Rock vs The Sand)
“반석인가 모래인가”
(The Rock vs The Sand)
7-27-25
본문말씀: 마태복음 (Matthew) 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설교 요약]
주님은 놀라운 권세의 말씀으로 이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무리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된 산상수훈은 오늘 본문의 <7장>의 말씀으로 마무리하시며 ‘그 집을 반석 위에 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돌이켜 볼 때 주님은 가르침을 시작하시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천국시민의 팔복’ 곧 ‘8가지 특징’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임을 가르쳐 주시며,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마. 5:44)고 도전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v. 2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음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평가하시는데, “과연 무엇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보이지 않는 곳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집을 비교하시면서, 이 두 집의 결정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는 ‘기초’가 무엇이냐로 결정됨을 강조하십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v.25) 바로 그 기초가 반석이냐 모래냐가 그 집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폭풍과 홍수를 맞이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 날’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암시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의 의롭고 두려우신 폭우와 폭풍의 심판을 견딜 수 있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무엇이 반석인지를 깨닫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반석일까요?’ 먼저 ‘반석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석’ 되십니다 (시. 18:2). 또한 주님의 도전과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반석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v.24)라고.
이 놀라운 주님의 산상수훈을 끝내며, 바라기는 주님의 마지막 도전의 말씀과 같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간절함으로 주의 말씀을 날마다 지켜 나가고 그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누려 나가는 주의 제자요, 천국 시민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전문]
주님은 놀라운 권세의 말씀으로 이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무리하십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으로 마무리하셨을 때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심히 놀랐습니다. 이제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이제 <7장>으로 마무리하시며 ‘그 집을 반석 위에 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함께 주님의 이 복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하여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그 집을 반석 위에 지는 지혜롭고 축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주님의 산상수훈을 마무리하시는 가르침은 이미 <7장13절>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7장15절>에서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는 경고의 말씀을 통하여 이어지는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결론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큰 그림에서 볼 때 <6장>이 ‘하나님사랑’을 통한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 나가는 가르침이라면, <7장>은 ‘이웃사랑’을 통한 진정한 이웃과의 관계를 누려 나가게 하시는 가르침임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사랑’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깊어지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오늘 결론적으로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석’ (rock)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으로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끝내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결론은 어느새 마지막 최후심판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견고히 설 튼튼한 집을 지으라는 도전과 촉구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동안 가르쳐 주신 것처럼 천국시민의 아름다운 특성을 통해 복된 열매 맺음으로 ‘거짓선지자들’처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 내게서 떠나가라” (마.7:23)는 끔찍한 평가가 주님으로부터 듣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마. 25:23)라는 칭찬과 함께 축복된 구원의 문을 통과할 것을 주님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최종적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최후의 심판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의인의 심판’을 받음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천국시민의 신분과 특권을 이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려 나가게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요, 달려갈 마지막 푯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v. 24-25)라고.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더 피부에 닿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팔레스타인의 지질학적 특성에 대해 잠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형의 대부분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질학적으로 보면 ‘석회암’으로 형성되어 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석회암보다는 훨씬 그 강도가 강합니다. 따라서 평상시는 그 석회암 위에 집을 지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강한 강도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기철인 여름에 한꺼번에 많은 비가 오면, 이 석회암의 땅은 비를 빨아들이지 못하고 대부분 땅표면으로 흘려 보내기 때문에, 강한 물살의 급류를 형성하며 표면의 흙들을 휩쓸고 흘러내려 순식간에 주위를 황폐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팔레스타인의 지질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사람들은 어떤 땅의 기초에서 집을 짓느냐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한 이슈가 된 것입니다. 물론 나라와 장소에 관계없이 기초공사는 가장 으뜸가는 건축의 수칙이 되겠지만, 특히 평상시는 단단한 석회암 흙이지만 장마철에는 폭우와 함께 힘없이 휩쓸려 내려가는 이스라엘의 지질적인 특성상 어떤 기초 (땅) 위에 집을 짓을 것인가는 유대인들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는 중요한 사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을 것’을 도전하시며 말씀을 마무리함을 통해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라고 질문하십니다. 누가 과연 <지혜로운 사람> (a wise man)일까요? 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곳 팔레스타인의 태풍과 홍수로 인한 급류에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지울 수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그는 곧 그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든든히 받쳐줄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하는 자’인 것입니다. 비록 땅을 파고, 많은 양의 흙을 거두어 내고 땅 속 깊이 박힌 바위에 닿도록 기초를 판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집을 건축함에 있어서 이처럼 생명과도 같은 ‘기초공사’에 온 정성과 힘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철저한 기초공사’ (=터다지기)만이 미래에 지어질 그 집이 오랜 세월을 무너지지 않고 튼튼히 설 수 있는 열쇠임을 지혜로운 자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 ‘지혜롭지 못한 자’는 어떤 자일까요? 그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이라고 주님은 정의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리석은 사람> (a foolish man)일까요? 무엇보다도 그는 ‘조급 (=성급)한 자’입니다. 그는 기다릴 줄 모르고, 언제나 ‘빨리 빨리’라고 소리칩니다. 자신이 미래에 이 집에서 누리게 될 복된 삶을 바라보고 번거러울지라도 기초를 다져가며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우선 빨리 손쉽게 짓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한편 이런 어리석은 자는 ‘보이는 것에만 노력하는 자’입니다. 오늘 주께서 ‘두사람의 집 짓는 과정’을 설명하심에 있어서 발견하게 되는 차이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기초’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두사람이 어느 장소에, 어떤 모양으로,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집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님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남의 눈과 평가에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내가 살 집이요, 나를 지켜줄 집인데, 어리석은 자는 안타깝게도 남들의 평가와 인정과 박수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경계하신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거짓선지자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리석은 자는 ‘인간의 의견과 철학’과 ‘사람으로부터 영광’받고자 하는 헛된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래 위에 짓는 집’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임박한 폭우로 인해 무너져 내릴 부실공사의 집에 대해서는 깨닫지도 못하고,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그럴싸하고 화려해 보일 것인가 하는 ‘사상누각’의 헛된 집 짓기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평가하시고, 듣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을 도전하셨다면, “과연 무엇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보이지 않는 곳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잠시 살펴본 것처럼 주님이 설정한 이 비유의 말씀 속에서 ‘두 사람’이 각각 집을 짓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대조적이거나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단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추측컨데, 이들은 한 동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집터를 정하고 집을 짓고, 각자 나름데로 심혈을 기울여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누가 더 멋진 집을 지은지 알 수 없고, 어쩌면 모래 위에 지은 자가 더 화려한 집을 지었으리라고도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는 자는 언제나 남의 눈을 의식하고, 보이는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에 외관적으로는 이런 류의 집이 더 화려하고 멋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에 집을 지었느냐? 그리고 얼마만큼 화려하고 멋진 외관의 집을 지었느냐? 는 전혀 주님의 고려하시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주님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주님의 관심은 ‘외관’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기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집을 결정적으로 갈라 놓는 것은 어느 지역도, 외관도, 집 짓는데 사용된 자재도 아니요, ‘기초’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v.25-27)고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그 집의 견고성 (영구성)을 결정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관이 아니라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공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드러나는 외관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기초공사를 어느 만큼 튼튼히 했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6장>에서 바리새인들이 ‘경건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구제할 때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것’과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금식할 때도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6:2-18). 이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리고 사람들이 보이는 부분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런 척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작 구제할 때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관심이 없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는 기도하지도 금식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이렇게 한마디로 강하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외식하는 유대종교지도자 대부분은 집의 외관과 장식은 화려하게 가꾸지만, 그 집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기초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집 안에는 죽은 시체와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하여 결국 비가 오고 바람 불 때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폭풍과 홍수를 맞이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실 저와 집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다 보니, 현재까지 인생의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많이 겪지는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20대를 넘어가다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은 그 사람이 불신자가 되었건, 크리스챤이 되었건 관계없이 인생의 폭풍과 홍수를 한번쯤은 경험해 보셨으리라 저는 짐작해 봅니다. 이런 인생의 폭풍과 홍수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인생의 시련’은 ‘나의 부주의와 게으름 그리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반복되는 나쁜 습관’으로 인하여 부딪히게 되는 쓰라린 경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눈을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행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세상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세상에는 도덕과 양심을 어기고 그야말로 철면피같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약한 자의 재산을 빼앗고 힘없는 자의 피를 빨아먹으며 재산을 축척하고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악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오늘날 적지 않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중의 하나도 교회 안에서 조차도 ‘양심과 정의’가 지켜지지 않고 ‘돈으로 부패하고 권력에 아부하고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적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죄악된 우리 인간의 모습은 수천년 전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시편에 보면 시편기자가 이렇게 탄식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시.73:3-5)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시편 기자의 탄식과 부르짖음도 바로 악인이 득세하고 악인이 오히려 더 잘살고 죽어서도 재산을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고통 없이 죽는다는 것이 그의 엄청난 고통이요, 하나님을 향한 강한 항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뒤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73:17-19)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갔을 때 그는 비로소 마지막 심판의 공의로우심과 완전하심을 목격하고 심히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 날’ 우리 모든 사람 한명 한명이 주님의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암시하십니다. 바로 주님의 의롭고 두려우신 폭우와 폭풍과 같은 심판의 엄중하심 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엄중한 영적 폭풍과 홍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무엇이 반석인지를 깨닫아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확인할 것은 ‘과연 무엇이 반석인가?’하는 점입니다. 이 반석은 무엇보다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기 인생의 든든한 반석이 되셔서 원수 앞에서 자신에게 상을 베풀어 주실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언제나 그와 함께 동행하신 신실한 하나님을 이렇게 경배하고 찬송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라)” (시. 18:1,2)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영원하신 창조주시요, 우리를 모든 환난과 고난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든든한 반석 되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선하심과 진실한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세상의 환난에서 다윗처럼 건지심을 받고 마지막 심판 날 주님 앞에 의인이 받을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 나가는 것>이 반석입니다. 주님은 오늘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면서 이렇게 분명히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v.24-25) 주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라고 분명히 ‘무엇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인지’를 영적으로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요,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삶으로 실천하는 자가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라고 주의 말씀을 듣기만하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치 않는 자를 ‘자신을 속이는 자’ (deceive yourselves)라고 강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요한복음>에서도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를 겉모습으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마음 속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주님의 판단은 공의로우신 것입니다. 나는 과연 말로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듣고 또한 지켜 행하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지 주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 지혜로운 자가 되어라”고 우리 모두를 말씀으로 도전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저는 올해를 시작하며 여러분과 함께 묵상해온 주님의 ‘산상수훈’을 오늘로서 끝내며, 조용히 그 가르침을 지난 한주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가르침을 시작하시며 ‘무엇이 천국시민의 특성인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요, ‘마음이 청결한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핍박 받기를 기뻐하고 어떤 대가지불도 감당하는 자’라고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지?’를 가르쳐 주시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위대한 힘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케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6장>에서 ‘하나님사랑’ 그리고 <7장>에서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주님의 산상수훈을 끝내며 이 가르침은 한마디로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는 그의 자녀’ 곧 <천국시민이 살아갈 사랑의 삶>을 가르쳐 주심이라고 믿습니다.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는 말씀과 같이 진정한 천국시민의 삶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삶인 것입니다. 그 어떤 부득이함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오직 자원하는 마음과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 만날 때까지 날이 갈수록 주님의 몸된 지체로써 서로 사랑을 주고 받아 누려 나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오늘 마지막 도전의 말씀과 같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간절함으로 주의 말씀을 날마다 지켜 나가고 그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누려 나가는 주의 제자요, 천국 시민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