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3, 2025

“수고를 그치고” (Rest From Their Labor)

Preacher:
Series:
Passage: 요한계시록 (Revelation) 14:12~13
Service Type:

“수고를 그치고”

(Rest From Their Labor)

8-3-25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Revelation) 14:12~13

12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설교 요약]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지난 한달 가량 ‘큐티말씀’으로 묵상하던 <요한계시록>말씀 중에서 은혜와 영감받은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 여러분들도 잘 아시듯이 신.구약 성경 66권중 가장 마지막 책이자, 구약의 에스겔서와 다니엘서, 이사야서 등과 함께 성경을 대표하는 ‘계시’ 혹은 ‘묵시’의 말씀입니다. 한편 <요한계시록>의 숫자 (7 & 666 등)의 상징성과 다양한 초자연적인 묘사들로 인해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책을 주석함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나 이름과 계시된 상황들’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자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반드시 도래하며, 그때 ‘악인은 영벌’을, ‘의인은 영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마지막때를 우리 성도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보면, ‘십 사만 사천’으로 상징되는 순결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누릴 복락을 하늘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v. 13a)라고. 그리고 성령께서 화답합니다.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v. 13b)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된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고난은 인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2-3)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삶 가운데 겪는 여러가지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난의 연단이 인내를 이루고 우리를 강한 믿음으로 지켜주는 것입니다.

둘째, ‘순교는 복음의 승리를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산상수훈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로 인하여 받게 되는 순교를 포함한 모든 박해가 복된 것은 이것이 복음의 승리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셋째, ‘고난은 주님과 누릴 영광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모든 고난 가운데 주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끝까지 지킨 성도가 주와 누릴 놀라운 영광을 선언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라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의 믿음으로 살아감으로 성령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주님 만나는 날까지 복음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는 그동안 주님의 산상수훈을 은혜 가운데 함께 지난 주까지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으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던 중에 지난 한 달 가량 큐티말씀으로 묵상하고 있는 <요한계시록>말씀에서 제가 은혜와 영감받은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 여러분들도 잘 아시듯이 신.구약 성경 66권중 가장 마지막 책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에스겔서와 다니엘서, 이사야서 등과 함께 성경을 대표하는 ‘계시’ 혹은 ‘묵시’의 말씀입니다. 사실 그동안 기독교역사에서 본다면,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그 말씀이 계시적이다 보니, 여러 상징적인 숫자 (7, 666)나 특정한 단어 (종말, 휴거, 적그리스도, 심판 재림, 천년왕국, 짐승, 용 등)을 여러 사람들이 영적으로 해석해 가는 과정에서 지나친 주관적 해석과 억측으로 영적 해석을 해 나감으로 인해 물의를 빗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종말론과 예언서에 특별히 집착하는 말세론자들의 경우에는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서를 올바른 성경에 기초한 교리적 검증 없이 자의적으로 비성경적인 해석을 행함으로 인해 ‘이단’으로 규정된 많은 기독교단체들이 파생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가져온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서, 이에 대한 반동적 현상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계시록>을 아예 무시하거나 정경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서,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한명으로 꼽히는 <존 칼빈>은 성경66권을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석했던 것입니다. ‘칼빈’은 자신은 <요한계시록>을 주해할 계시와 영적 깨닫음을 받지 못했다는 상당히 겸손한 듯한 이유로 계시록을 해석하지 않았지만, 더 큰 이유는 방금 설명 드린 것처럼, 기독교역사에서 요한계시록을 자의로 해석함으로 수없이 많은 이단과 비성경적 해석의 오류를 빗었던 사람들의 실수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과 거부감으로 인해, 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극도로 신중함과 상당한 거부함으로 자제했을 것임을 추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은 장차 올 마지막 때에 대한 탁월한 예언의 말씀임과 동시에, 그 글의 상징과 묘사의 난해함으로 인해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상의 많은 논란이 이어져 왔고, 그로 인해 아예 ‘계시록’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거나 그 성경으로서의 가치를 무시하는 학자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는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목욕물이 더러워졌다고, 목욕시키던 아이까지 목욕물과 함께 버리면 안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구약 성경 여러책에서 한결같이 선포하는 마지막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날에 대한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예언의 말씀으로써 그 가치는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최종적인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축복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된 말씀이기에 그 말씀의 가치는 확고하게 인정되는 것입니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일부 극단적 종말론자나 기독교 이단들의 교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계시록에 나오는 특정 숫자나 단어나 상징적 표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비성경적이고 자의적인 그릇된 해석을 시도하는 유혹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 반대로 상징과 비유를 넘어선 보다 큰 그림에서 ‘계시록’에 기록된 <확고한 미래에 도래할 심판의 엄중함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성도의 승리와 영광을 깨닫아 나가고, 그 진리를 분명히 붙들고 이 땅을 살아나갈 때>, 이 보배로운 책을 통하여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참된 영적 능력과 미래의 소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신.구약 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마지막 심판의 때가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고,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찬 잔이 부어짐으로 마지막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듯이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오직 어린 양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이마에 세긴 ‘십 사만 사천’으로 상징되는 순결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마침내 누리게 될 복락과 축복된 삶을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v. 13a)라고. 그리고 성령께서 이렇게 화답합니다.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v. 13b)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본문말씀 <13절>에서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v. 13a)라고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을 묵상하며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에는 총 일곱번에 걸쳐 ‘누가 복된 자’인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1장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둘째말씀은 <14장3절>의 오늘 말씀입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16장15절>로서,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주께서 선언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깊은 잠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고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자는 복될 것입니다. 넷째는 <19장9절>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천국백성이 신랑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누릴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다섯째는 <20장6절>로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기록된데로, 첫 부활의 열매가 되어 주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림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22장7절>인데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두루마리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으로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는 <22장14절>로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옷을 죄와 탐욕으로 더럽히지 않고 주님의 보혈과 생명수 맑은 물에 빠는 자는 복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에는 일곱가지의 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 이 일곱가지도 단지 몇가지의 나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어서 ‘7’이라는 숫자가 가진 ‘완전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계명을 지키고, 믿음으로 인내했을 때 성도들이 받을 복이 실로 끝이 없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시록에 기록된 ‘성도의 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우리가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제가 앞서 질문했듯이 왜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된 것인지?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고난은 인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시작하며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2-3)고 도전합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성도들을 향해 도전하는 핵심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당하는 고난과 핍박에 대해 결코 좌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이 땅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결코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설명한 사람이 사도 바울인데, 그는 영적 자녀이자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그가 조만간 겪게 될 핍박과 고난을 마치 영적 백신주사를 놓듯이, 다시 말해 ‘두렵고 낙심 될 수 있는 주의 제자가 부닥치게 될 장래일’을 미리 준비시키고자 가감 없이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영적 아들 디모데가 머지 않은 장래에 겪게 될 혹독한 시련과 연단은 결코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것도 아니요 실패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도리어 정상적이요 매우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그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2천년 기독교회사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핵심은 ‘부’나 ‘명예’나 ‘출세’가 아니라 ‘고난’과 ‘인내’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긴 교회사에서 볼 때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 되기까지 초대교회성도가 수백 년간 겪었던 핍박과 중세 암흑기에 참된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했던 성도들, 그리고 지금도 기독교가 탄압받는 공산국가와 모슬렘국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지키고자 핍박을 받고 심지어 순교 받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실한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가 주의 몸된 교회를 지금까지 지켜왔다고 말하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여러분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프목사가 주장하듯이 <성도가 진정으로 그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죄와 사단의 유혹과 싸워 승리하게 되는 그 믿음의 능력 중심에는 역설적으로 ‘핍박과 고난’이 있고, 그 크라이막스가 ‘순교’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어떤 신학자는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교회는 한마디로 ‘순교자의 흘린 피를 먹고 자라났다’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둘째, ‘순교는 복음의 승리를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님의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며 ‘팔복’을 선포하시고 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1-12)고 말입니다. 제가 올해 들어 그동안 주님의 산상수훈을 함께 나누고, 지난 주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으로 그 가르침을 마무리했는데, 주님은 마지막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 같으리니” (마. 7:25)라고 도전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인 주님의 가르침도 만약 여러분이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님은 이 점을 이미 산상수훈을 시작하면서 ‘천국시민의 특성’에서 밝히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게 될 때 그의 제자들이 당하게 될 고난과 핍박을 주님은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앞서 제가 이미 언급했듯이 야고보와 사도 바울이 밝힌 성도가 겪게 될 고난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1)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신실하게 따르는 그의 제자가 당할 핍박을 은근슬쩍 덮어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명히 드러내시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자신을 따를 때 결코 ‘핑크 빛 미래와 출세와 막강한 권력’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2)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핍박 받기를 택했다면, 주님은 지혜로운 자요, 실로 복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마지막 날 불의 공력 가운데서도 타 없어지는 허무한 삶이 아니라, 불 가운데서 견디어 내는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과 핍박이라는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믿음의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에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고 불가운데도 견디어 내는 복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마음 가운데 최근까지도 늘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부담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미래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떤 난관과 고난이 놓여 있을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요, 막연한 미래에 대한 초조와 긴장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요, 머리로는 ‘예수님을 믿기에 불안하고 염려해서는 안된다’는 크리스챤의 당위성을 저 자신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렇게 스스로 되뇌어 보았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저를 또 다시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지난 ‘산상수훈’의 주님의 가르침과 ‘요한계시록’의 큐티말씀을 통해 제의 문제점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주님께 저를 맡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v.12)라고. ‘마지막 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 그분을 맞을 준비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라고 말씀은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요? 주님 안에서 죽기까지 말입니다. 우리 주께 나의 계획과 목표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맡길 때 주님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칭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가 나를 위해 너의 생명을 맡겼으니, 이제 영광과 소망 가운데 다시 눈을 떠 나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의 고난을 이겨 나가고,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주님을 신뢰함으로 그분께 모두 맡기게 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진정한 복음의 승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셋째, ‘고난은 주님과 누릴 영광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현재의 고난의 의미와 고난을 넘어선 영광을 이렇게 놀랍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저는 오늘 계시록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수고를 그치고 쉬리라’는 성령의 약속은 궁극적으로 ‘순교로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향한 위로와 소망의 약속이지만, 동시에 ‘살아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순결을 저버리지 않고 인내와 믿음으로 환난을 통과한 모든 신실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임을 믿습니다. 마치 우리 한국역사에서 보면, ‘고려왕조’시대에서 ‘조선왕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을 통해 끝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육신’ (死六臣)이 있는가 하면, 비록 죽임 당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과 같이 끝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켰던 ‘생육신’ (生六臣)이 있듯이 말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라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도 이처럼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위한 순결한 신앙을 위해 살든지 죽든지 인내와 믿음으로 살아 갈 수 있다면, 그런 삶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수고를 그치고 쉬는 삶’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 인생이요, 우리 스스로는 결코 참된 자유와 안식 (쉼)을 누릴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아시기에 이런 복된 위로와 소망의 초청을 하셨던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주님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순결과 사랑을 위해 혹독한 고난을 끝까지 달게 감당하는 수많은 성도의 믿음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장래의 영광이 너무도 크고, 그 은혜가 소망스러움을 영으로 깨닫았기 때문이요, 그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의 삶을 살아가기에 실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에 빚진 자의 능력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힘차게 외쳤듯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는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 곧 그와 함께 왕노릇 할 미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순교를 얼마 남겨두지 아니하고 이런 개선장군과 같은 놀라운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리라)” (딤후. 4:7,8)고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가 보여준 그 온전한 믿음의 경주와 영적 싸움의 승리는 결국 주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이요, ‘주와 함께 누릴 영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미래에 주어질 영광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우리 성도들을 그 어떤 고난과 죽음까지도 넉넉히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현재 여러분 앞에 닥친 고난 앞에 늘 불평하고 좌절하십니까? 아니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넉넉히 이기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셨다면 여러분의 삶은 실로 축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하는 것은, 내가 비록 구원받았다고 할찌라도 우리 앞에 주어진 이 땅의 삶은 결코 ‘꽃길’만 있고 ‘핑크빛 인생’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경건히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도리어 수많은 핍박과 연단이 가로 놓여진 고난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와 같은 이 땅에서 성도의 맞이할 삶을 직시하십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제가 중도하자해서는 결코 안되는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 곧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으로 격려하십니다. “너희가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말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살든지 죽든지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심으로, 주 안에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성령을 통해 참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축복을 이 시간부터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