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근원이 될지라” (Being A Blessing)
“복의 근원이 될지라”
(Be A Blessing)
8-31-25
본문말씀: 창세기 (Genesis) 12: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설교 요약]
저는 이번주부터 4주간 <창세기>에 나오는 네 명의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으로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아브라함’처럼 유명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세계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그리스도교인’ ‘유대교인’ 및 ‘이스람교인’들이 공히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인물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에 관한 맨 먼저 기록이 <창세기 11장>후반절에 나오는데, 그는 아버지 데라와 형제들과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하며 소망없이 살았습니다 (창.11:27~32/수. 24:2). 그러던 그가 어떻게 수천년이 지난 지금 수없이 많은 민족들이 그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 놀라운 존재가 된 것일까요?
그 해답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은혜>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v. 1,2)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 (=부르심)에 응답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브라함의 핵심적인 믿음일까요?” 그것은
첫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순종”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좇은 것은 매우 힘든 순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네에게 지시한 땅’ (the land I already shown you)이 아니라 ‘네에게 지시할 땅’ (the land I will show you)으로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삶’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히. 11:8) <먼저 떠날 때, 인도하심을 받는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약속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75세>였고 (창. 12:4), ‘약속의 아들’ (이삭)을 본 것은 그가 <100세>가 되어서 입니다. 그가 25년의 긴 세월을 인내로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롬. 4:17)을 그가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셋째, “성숙된 (인격)”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깊이는 그의 성숙된 인격으로 잘 나타납니다. 그는 목자의 상한 심정으로 죄악된 ‘소돔과 고모라’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고 (창. 18장),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할 우선권을 주었고 (창. 13장), 또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천사들’을 섬겼음을 보게 됩니다 (창. 18장).
바라기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순전한 믿음을 본받아 ‘지금 내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약속을 인내’로 기다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복의 근원자의 삶 사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이번주부터 4주간 <창세기>에 나오는 네명의 인물들, 곧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신.구약 성경에는 성도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수없이 많은 믿음의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성경의 첫 시작이자, 인간 창조와 죄 (타락)의 시작, 그리고 천지만물의 시작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 이 창세기임으로 이를 통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창세기는 그 의미가 남다른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선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창세기를 묘사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신앙의 선조들’의 신실한 믿음과 생생한 삶을 묵상함으로 함께 은혜 받고, 또 각자의 삶에 적용해 나가는 복된 시간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주에 살펴볼 ‘아브라함’은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하고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제가 추측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한사람이 우리 인류에 끼친 영향력은 우리 대부분이 막연히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대표적인 3대종교라고 일컬어지는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회교’에서 아브라함은 공히 이들 모든 종교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 곧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잘 들어보지 못한 ‘바하이’교, ‘드루즈’교와 같은 여러 군소종교들에서도 ‘아브라함’은 그들 종교의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음을 볼 때 이들을 다 합친다면,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인류 전체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고 표현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이라는 까마득한 고대에 존재했던 한 인물이 이토록 현재까지도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일까요?’ 그 의문을 풀어주는 열쇠가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포함된 <창세기 12장>과 창세기 전체에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1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v. 1,2)라고 말입니다. 저는 수천년 전에 생존했던 한 인물에게 어떻게 이와 같은 엄청난 축복이 임할 수 있었는지를 지금부터 성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살았을 당시의 고대 근동지역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혈통적으로 볼 때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자식 중에서 카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셋’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셋의 아들 ‘에노스’때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창. 4:26) 신앙의 가계였습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그의 아버지 ‘데라’때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정착하여 살았음을 오늘 본문 앞 <창세기 11장> 후반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 당시 ‘갈대아 우르’는 그 이름의 의미, 즉 <점성가/ 마술사>라는 뜻의 ‘갈대아’와 <빛/ 불>이라는 의미의 ‘우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수많은 점성가와 마술사가 있었고, 또한 ‘불’을 섬기는 ‘배화교’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수많은 거짓 우상들을 만들고 섬기며, 각종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음란한 행위의 의식들이 이 지역에서 만연해 있었고, 그 당시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도 이런 우상들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 점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의 하나로써, 여호수아는 이렇게 조상 아브라함을 언급합니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 24:2)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그의 아비 데라가 행했듯이 거짓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브라함이 성장하고 자라난 배경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앞서 제가 질문했듯이 ‘어떻게 아브라함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많은 육적인 그리고 영적인 후손을 두고,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잘 언급한 것처럼, ‘강 저쪽, 갈대아 우르에서 아비와 친척들과 더불어 우상숭배하며, 소망없이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어느 날 찾아오셔서 그에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심히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포함한 <창세기 12장> 전체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도적이요, 일관된 뜻을 따라 그 은혜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베풀어진 것이요, 아브라함이 먼저 그 어떤 요구를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복된 삶을 시작하는 그 모든 원인과 근거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아브라함>이라는 한사람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그를 통하여 수 없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되는 복된 미래의 결과는 그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하신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 너로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는 그 첫 출발점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심히 복된 ‘복의 근원자’로서의 놀라운 미래를 철저하게 약속하고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부터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함께 나눠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조상’ (롬. 4:11~16)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불렀는지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총 ‘50장’에 이르는 <창세기>에서 ‘열네장’에 이르는 분량을 할애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사람의 삶을 기록케 하신 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그의 믿음의 후손이 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그의 믿음을 본받아 그 자취를 따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바로 ‘믿음의 분명한 샘플’ 다시 말해 ‘믿음의 조상’으로써 그의 삶을 통하여 무엇이 믿음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믿음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 갈수 있는 것인지를 하나님은 자세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브라함의 핵심적인 믿음일까요?” 그것은
첫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순종”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게 그의 믿음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은 그 누구보다도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구체적으로 적용했는지를 묵상해 볼 때, 그 첫 걸음이 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떠났던 순종’의 사건에서 시작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왜 본토 아비 집을 떠났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느 날 찾아오셔서, 그에게 가슴 벅찬 비젼을 주셨습니다. 소망에 벅찬 축복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며,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이런 약속의 말씀과 함께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는 명하심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떠남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충분히 예상을 하시겠지만, 이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4천여년전인 고대 부족시대로써, 자기가 사는 일가친척의 지역을 떠나서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위험하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 당시는 나그네와 이방인을 보호할 그 어떤 국제법이나 인권이 별도로 보장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 못지않게 또 한가지 그의 떠남이 힘들었으리라 충분히 예상되는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브라함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한 땅> (the land I already shown you)”이 아니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 (the land I will show you)”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딜레마가 있었고, 그 명령을 보류할 인간적인 여러가지 구실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저라면 ‘갈 곳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떠납니까? 먼저 가르쳐 주시면 가겠습니다!’라고 대꾸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어떠했을 것인가를 히브리서기자는 이렇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라고.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그 표현속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막막함과 심적 부담이 컸을지를 강하게 느낍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처럼 핑계나 구실을 데며, 미루지 않고, 단지 순종함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아브라함의 순종이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가 알 수 없는 미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주관하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아브라함의 떠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 11:10)고 밝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답고 복된 성을 의심 없이 바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은 이 세상에서는 ‘약속의 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여기서 우리가 깨닫고 적용해야 할 영적 진리는 <‘떠난다’는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택함 받은 자녀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요, 사명>이라고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일가친척 아비 집’을, 우상 숭배하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현재까지 인간적으로 삶의 근거를 삼고 뿌리내리고자 했던 ‘아비 집’은 어디 입니까? 여러분의 ‘우상 숭배하던 갈대아 우르’는 어디입니까? 이처럼 우리 모든 성도는 이 땅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야 하는 나그네 인생이기에 ‘순례자’ 곧 ‘pilgrim’의 인생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동시에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제자로써 순종함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 땅에 남아 연기하고, 보류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또 한가지 순종; ‘이삭을 바치는 순종’ 하나님의 final test! 믿음의 첫시작과 마지막 끝이 순종의 test)
둘째, “약속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제가 가끔씩 스트레스 받고 힘들 때 묵상하는 소망스런 말씀중의 하나가 <시편 126편>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눈물 나고 힘든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결코 많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의 부르심을 받고 조카 롯과 함께 떠났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4).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모든 상황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함으로 떠나는 그의 믿음은 참으로 훌륭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분명한 것 한가지는 그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니 75는 요즘처럼 백세시대를 사는 우리가 보더라도 분명히 고령의 나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을 따라 마침내 약속하신 땅에 도착했습니다 (창. 12:5). 그러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아브라함도 간절히 바랬던 자식을 보는 것이 아직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 ‘사라’는 안타깝게도 젊어서 부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식주시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가지는 기쁜 소식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v. 2)는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 해가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떠난 지 무려 25년이 지나도록 말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무려 100세요, 사라가 90세 될 때까지 하나님은 약속하신 아들을 그에게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엄청난 인내함으로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인내 함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훌륭한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서11장>과 함께 <로마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의 인내하는 믿음을 잘 설명합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19~20)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인내로 약속하신 자녀를 기다렸고, 자신은 백세요 더군다나 아내 사라는 불임의 몸상태에다가 90세라는 말그대로 절대적인 ‘임신불가능’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해 본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는 신뢰했기에 끝까지 인내함으로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적용할 두번째 질문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주신 ‘많은 민족의 아비와 어미’가 되어 ‘복의 근원자’가 되는 그 구체적인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약속을 믿음으로 지금 인내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셋째, “성숙된 인격”입니다: 사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좋고 훌륭한 모습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도 숨김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목숨이 두려워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인 것’이라든가, ‘하나님의 약속을 못 기다리고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사라의 여종 몸에서 낳은 것’과 같은 연약 함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의 연약하고 실수한 과오를 ‘믿음의 조상’이 이 정도 실수를 했으니 나도 해도 괜찮겠지?’라는 엉뚱한 적용을 해서는 안되고, 반대로 그의 실수를 거울삼아 조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마무리해 나가면서 그가 가진 여러 훌륭한 자질 가운데 ‘성숙된 인격’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이 점을 함께 나누고 싶은 이유는 오늘날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들은 많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남들이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숙된 인격의 신앙인은 결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숙된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숙하게 된 인격’의 모습일까요? 저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생명사랑’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운데 <창.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구함으로 그곳에 ‘의인 열명만 있으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끈질기게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 18:23-32). 안타깝게도 그 성에는 ‘의인 열명’이 없음으로 불과 유황의 참혹한 심판을 받았으나, 아브라함의 그 생명사랑의 목자의 상한 심령을 감동적으로 느끼게 한 사건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의 목자들과 자신의 목자들이 양들을 먹이는 좋은 초장을 차지하고자 서로 다툼이 있었을 때, 이렇게 윗사람으로서 ‘기득권을 포기’할 뿐 아니라, 조카에게 먼저 땅을 택한 기회를 주는 ‘아량’을 베푼 것입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9)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제안입니다. 자기가 조금도 손해 안 보겠다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양보의 미덕인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세 천사’, 정확히는 두명의 천사와 하나님이 앞서 언급했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상을 이제 살펴보고 그 죄에 상응하는 심판을 내리고자 그 성으로 가는 길에 아브라함의 천막에 먼저 들렀을 때, 그가 그들을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는지 <창. 1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 세명이 ‘천사와 하나님’되심을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처음보는 나그네들에게 별관심과 친절을 주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나그네와 손님을 향한 극진한 ‘환대과 배려심’으로 대접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고 아브라함의 행위를 칭찬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을까요?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그들을 단지 손님이요, 나그네와 같은 나에게 전혀 도움과 이득이 전혀 가지 않을 사람들까지도 돌아보고 잘 대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그냥 순수하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보호의 손길이 부족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기고 돌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 아브라함의 성숙된 인격이요, 성숙된 믿음의 열매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저는 아브라함의 그 성숙된 <생명사랑>과 <자기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는 아량과 나그네를 섬기는 그 <배려의 정신>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늘 상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쌀쌀 맞고 이권에는 밝고, 이기적이며 늘 신경질적인 크리스챤들을 그 누구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아브라함의 삶을 그토록 복되게 만든 것일까요? 그 이름이 창대케 되고 수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는 ‘복의 근원자’요, ‘믿음의 조상’이 되게 만든 것일까요?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라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에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임을 저는 믿습니다. 창세기와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도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떠났던 순종의 믿음’과 ‘백세 되어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마지막 순종의 믿음'이요, 그 사이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을 신뢰하며 인내로 기다렸던 믿음’이며, 그로 말미암아 ‘점점 더 생명사랑과 이웃을 내 몸처럼 따뜻하게 섬겼던 성숙된 인격의 믿음’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름이 더욱 창대케 되고 많은 민족의 아비와 어미가 되는 이런 진정한 ‘믿음의 조상’으로써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