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몬산의 이슬” (The Dew of Hermon)
“헐몬산의 이슬”
(The Dew of Hermon)
11-16-25
본문말씀: 시편 (Psalms) 133:1~3
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in unity!)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 같고 (It is like precious oil poured on the head, running down on the breard, running down on Aaron’s beard, down on the collar of his robe.)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설교 요약]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 말씀인데,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오늘 시편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고 나서, 흩어져 살아가는 이스라엘 12지파와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며 기쁨으로 노래한 시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v.1)라고 기쁨의 노래를 한 것은 이스라엘민족들이 ‘강하게 결속’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그분을 믿는 신앙가운데 하나로 연합하여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은 “무엇이 믿음의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모습인지?”를 크게 두가지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보배로운 기름>이 옷깃까지 흘러내림”입니다: 먼저 다윗은 형제의 연합이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를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 같고” (v. 2)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아론’은 대제사장을 대표하고, 그의 머리에 부어져 수염을 타고 옷깃 끝까지 타고 내리는 ‘보배로운 기름’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바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우리 모든 성도는 죄 용서함 받고 함께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입니다: 한편 다윗은 형제가 연합함으로 누리게 되는 은혜는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산에 내림’같다고 노래합니다 (v. 3). 먼저, 헐몬산은 ‘해발 2,814m 높이의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헐몬산의 이슬’이란 ‘새벽에 헐몬산 정상에 흠뻑 내려앉은 많은 양의 이슬’과 같이 ‘하나님의 이슬과 같은 생명의 은혜’ (호. 14:5)가 믿는 공동체 위에 부어짐을 뜻합니다. 바로 ‘함께 떡을 떼며 모이기를 힘씀으로 하나되었던 초대교회’와 같이 날마다 구원받는 생명의 역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머리로 함께 연합함으로 ‘보배로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넘쳐서, ‘헐몬산을 흠뻑 적셨던 새벽이슬’과 같이 영생의 기쁨과 열매를 풍성히 누리는 주의 몸된 교회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우리가 약 2년전 가을 이 맘때 1박 수련회를 가진 이후로 오랜만에 전교인이 함께하는 뜻깊은 ‘캐빈의 밤’을 이번 주말에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제 오후에 우리는 함께 여기 블루리지 마운틴에 위치한 아늑한 캐빈에 도착해 그동안 공부와 직장일등 일상생활 속에서 지친 심신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힐링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손사모의 <크리스챤의 이성교제와 결혼>이라는 주제의 명쾌한 특강과 더불어 열띤 Q&A 시간을 가졌고, 지난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복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함께 모여 함께 떡을 떼고 필요한 가르침과 서로의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나누고, 지체들의 상처와 아픔을 품어주고 위해서 함께 기도함으로 서로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께서 기뻐하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됨의 노력이 이런 ‘캐빈의 밤’이나 ‘수련회’에 와서만 일회성으로 가지고 그칠 것이 아니라, 이제 오늘 이 예배를 끝내고 산을 내려가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더욱 주 안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로 연결되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 말씀인데,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v. 1)라고. 대다수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의 시편말씀은 다윗이 젊은 시절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죽음의 사선을 넘는 절대절명의 도피생활을 끝내고, 이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추대를 받아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을 이어 2대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에 백성들과 함께 하나되어 기쁨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가며 지은 시라고 추측합니다. 바로 이 시편의 부제와 같이 평상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살아가던 이스라엘 12지파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절기를 맞아 함께 그분의 거룩한 성막으로 나아가며 믿음 안에 하나되어 그분을 경배할 때 다윗이 영에 충만함으로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먼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이 노래하고 기뻐하는 이런 <형제의 연합>은 단순히 ‘인간적인 강한 결속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민족이라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택하신 공동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성궤/성막’을 중심으로 함께 연결됨으로 아름다운 <야훼 하나님의 신앙공동체>로 하나 되어짐을 다윗은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다윗이 노래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아름다움과 복된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무엇이 믿음의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모습인지?”를 크게 두가지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보배로운 기름>이 옷깃까지 흘러내림”입니다: 먼저 다윗은 세절의 짧은 내용이지만, 영감 넘치는 찬양의 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같고” (v. 1,2)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형제의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선언하고 나서, 그 첫번째 이유를 <그 동거함을 통해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내림을 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하는 자가 누리는 복’을 다윗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까지 내림 같고” (v. 2)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아론’은 모세의 형이자, 초대 대제사장으로써, 그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론’은 ‘대제사장’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주는 자를 통칭합니다. 그럼으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져서 그의 수염을 타고, 옷 끝까지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기름은 ‘축복’ 곧 ‘하나님의 축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자녀가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아론을 통하여 부어 주시는 보배로운 기름, 즉 ‘축복’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다윗은 영적 충만함을 통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배로운 기름’은 ‘축복’ 곧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축복’이라고 방금 살펴보았는데, 이 <축복>이라는 영어단어는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blessing>입니다. (* God bless you!!)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축복’이라는 영어단어 ‘blessing’은 그 어원이 ‘피흘림’이라는 ‘bleeding’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에서 유추해볼 때, 축복된 ‘blessing’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피흘림의 ‘bleeding’이 있어야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론’으로 상징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되신 ‘그리스도요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의 보배로운 피를 남김없이 흘리심으로써, 그 피를 통하여 우리 모든 성도들은 믿음으로 죄용서 받고 천국백성이 될 뿐 아니라, 함께 연합함으로 주의 영 성령의 충만을 통해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리듯이’ 온 공동체가 그 부어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복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인종과 성격과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을 허무셔서 성령님으로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된 공동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해 거룩하고 보배로운 기름처럼 부어 주심으로 흘러내리는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둘째,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입니다: 저가 청년사역자의 한 사람으로써 늘 청년들을 섬길 수 있음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제 개인적으로 자주 묵상하고,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이와 같은 모습 되기를 소망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110편 3절>말씀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좋아하는 성도 여러분도 많겠지만, 여기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말씀에서 <새벽이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성도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제가 청년시절 불렀고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저는 ‘새벽이슬’이라고 했을 때 그 노랫말이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그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 처럼~” 여기서 연상되듯이 ‘아침 이슬’이라 하면, ‘영롱하고 깨끗하며, 세상의 먼지와 더러운 물질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와 순결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처럼 <시편 110편>말씀에서 다윗이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묘사할 때, 이 청년들의 ‘순수함과 깨끗한 영혼’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 ‘새벽 이슬’의 의미는 그 이상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래 히브리문학에서 볼 때, ‘새벽 이슬’이라는 표현방식은 <엄청나게 많은 규모의 숫자>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한 표현방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새벽에 숲속의 나뭇잎새와 초원의 풀잎만이 아니라, 온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수를 셀 수 없는 새벽이슬처럼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주의 청년들이 믿음을 통해 주의 거룩하고 의로운 옷을 입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나아온다’고 다윗은 아름답고 하나된 청년들의 모습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의 ‘새벽이슬’과 오늘 본문 <시편 133편>의 ‘헐몬의 이슬’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다윗은 <2절>의 ‘보배로운 기름’에 이어 <3절>에서 ‘헐몬의 이슬’로써 ‘형제의 연합이 가져오는 축복’을 노래합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v. 3)라고. 여기서 다윗이 언급한 ‘헐몬’은 ‘헐몬산’ 혹은 ‘헤르몬산’으로 불리며, 이스라엘 북쪽에서부터 레바논에 걸쳐 있는 해발 2,814m 높이의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그 높이는 백두산보다도 70m가량 더 높은 산입니다. 그래서 이 헐몬산은 일년 중에 8개월 이상이 눈으로 덮여 있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기후가 따뜻해질 때 그 눈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요단강의 근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헐몬산’에서 또 한가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산의 해발이 높다 보니 ‘많은 양의 이슬이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 산을 ‘성지순례’하고 돌아온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새벽녘에 이 산 정상에 가보면 마치 방금 전에 소나기가 지나간 것처럼 온 대지가 많은 양의 이슬로 듬뻑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이해하자면, 고지대의 공기가 밤새 갑작스러운 기온변화로 차가와질 때 공기중의 수분이 뭉쳐서 급속히 많은 물방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헐몬의 이슬’이라고 했을 때는 ‘많은 양의 이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다윗이 표현하듯이, 영적으로 볼 때 헐몬산에서 내린 새벽 이슬은 낮은 시온산들의 메마르고 황폐한 땅으로 흘러내려 비옥한 땅을 만들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에서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호. 14:5)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스라엘의 이슬’되셔서 그들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축복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 핵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로 흘러내림’처럼, 서로에게 ‘생명을 살리는 이슬’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첫 초대교회를 시작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성도들이 보여주었듯이 ‘함께 교제하고 떡을 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쓸 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 2:42~47).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v. 3b)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분의 생명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헐몬산의 이슬처럼 흠뻑 부어 주심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께 연합함으로, 서로를 사랑함으로 종노릇하고 (히. 10:24),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함께 예배함으로 (요. 4:23),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영생으로 가득찬 천국’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머리는 둘이고 몸은 하나인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한 아이로 보아야 할까요? 두 아이로 말해야 할까요?’라고. 그리고 탈무드는 이렇게 그 결론을 밝힙니다. ‘만약 한쪽 아기의 머리에 깜짝 놀랄 정도의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다른 쪽 아이가 놀라 울면 그들은 한 아이이고, 반대로 다른 아이가 전혀 놀라지 않으면 그들은 두명의 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탈무드를 통해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한 유대인이 고통받은 때 다른 유대인이 함께 아픔을 느끼면 그들은 한 유대인이지만, 만약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아포슬은 어떤 공동체입니까? 한 지체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며, 또한 한 지체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한 지체가 기뻐하든 혹은 슬퍼하든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함께 나누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공동체입니까?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함께 연합함으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져 온 몸으로 흘러내린 하나님의 보배로운 기름’과 같이 축복을 받아, ‘헐몬산을 흠뻑 적셨던 새벽이슬’과 같이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열매를 성령 안에서 누려 나가는 우리 아포슬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